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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국가만들기 시민모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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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국가만들기 시민모임 – 대한민국 국가(歌) 만들기 시민모임 - 친일. 친나치 행각을 벌인 안익태 애국가를 뛰어넘어</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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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우원식 국회의장 ‘추강 김지섭 의사 추모 강연회 및 토론회’ 참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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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일제강점기 최초로 일본본토에서, 특히 일본 천황이 사는 왕궁에 폭탄을 던진 ‘추강 김지섭’ 의열단원의 무장투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국회토론회가&amp;#038;nbsp;25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9간담회의실에서&amp;#038;nbsp;열렸다.


   
      
      3월 25일 국회 의원회관 제9간담회의실에서 열린 &amp;#039;추강 김지섭 의사 추모 강연회 및 토론회&amp;#039;에 우원식 국회의장, 이종찬 광복회장, 정진욱 국회의원, 김문수 국회의원 등 1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축사를 보낸 가운데, 김용달 교수의 발제와 이해영 교수, 박경목 교수, 강윤정 교수가 토론으로 참석했다.
   

&amp;#038;nbsp;
바쁜 일정 가운데도 직접 강연회 및 토론회에 참석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일본 왕궁 앞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 의사의 의열투쟁은 일제가 신성시하던 대상을 향한 첫 의거로, 독립투쟁의 대상과 방법이 확대되는 전환점이 된 사건”이라며 “저의 외조부 김한 선생도 김지섭 의사와 마찬가지로 의열단에서 활동했는데,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선열들의 정신과 업적을 잘 계승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이어 "독립운동가 발굴에만 그치지 않고, 더 깊고 넓게 연구되도록 지원하고, 계기가 있을 때마다 한분한분 의미를 재조명해 널리 알려야 한다"며 "독립운동에 대한 정확한 기록과 연구, 교육을 통해 사회적 기억을 잘 형성해서 그것이 상식 수준이 되면 역사 왜곡 시도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홍범도 장군 흉상 사례에서 우리 모두가 확인했다"고 강조했다.아울러 "올해 광복 80주년, 을사늑약 12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우리의 뿌리와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고히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청산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온 국민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윤봉길 의사의&amp;#038;nbsp;상하이&amp;#038;nbsp;훙커우 공원에서 열린&amp;#038;nbsp;일본&amp;#038;nbsp;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義擧)도 1932년이다. 의열단원들의 무장투쟁은 훨씬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섭 의사의 일본 본토, 더욱이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왕궁에 직접 폭탄을 투척한 의거는 매우 중요한 업적이다"라고 강조했다.&amp;#038;nbsp;
한편, ‘추강 김지섭 의사 추모 강연회 및 토론회’는 더불어민주당 김문수 의원이 주최하고, 더뉴스, 보훈방송, 혁신리더포럼이 공동으로 주관하며, 광복회,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6.10만세운동유족회, 권오설권오상기념사업회, 國歌만들기 시민모임 등이 후원했다.이날 강연회 및 토론회에는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지낸 김용달 교수가 발제 및 좌장을 맡고, 한신대 이해영 교수, 충남대 박경목 교수, 경국대(구 안동대) 강윤정 교수가 토론을 맡았다.특히, 일본 본토 최초 무장투쟁의 뜻을 높이 기려 이종찬 광복회장은 추모사를 낭독하고, 우원식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 정진욱 의원 등 10여명의 국회의원이 참석해 축사 후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amp;#038;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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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일제강점기 최초로 일본본토에서, 특히 일본 천황이 사는 왕궁에 폭탄을 던진 ‘추강 김지섭’ 의열단원의 무장투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국회토론회가&nbsp;25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9간담회의실에서&nbsp;열렸다.</p>
<p></p>
<div class="cheditor-caption-wrapper" style="text-align: center;">
   <figure class="cheditor-caption" style="border: 0px solid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fffff; margin: 0px; text-align: left; display: inline-block; width: 740px;">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504/20250401113630_tklitpnd.jpg" alt="photo_2025-03-25_19-39-06 (2).jpg" style="width: 740px; height: 493px;" />
      <figcaption class="cheditor-caption-text" style="margin: 10px 0px 10px 0px;color:#999; text-align: left; line-height: 18px; font-size: 12px; letter-spacing: -0.04em; text-align:justify;">3월 25일 국회 의원회관 제9간담회의실에서 열린 '추강 김지섭 의사 추모 강연회 및 토론회'에 우원식 국회의장, 이종찬 광복회장, 정진욱 국회의원, 김문수 국회의원 등 10여명의 국회의원들이 축사를 보낸 가운데, 김용달 교수의 발제와 이해영 교수, 박경목 교수, 강윤정 교수가 토론으로 참석했다.</figcaption>
   </figure>
</div>
<p>&nbsp;</p>
<p>바쁜 일정 가운데도 직접 강연회 및 토론회에 참석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일본 왕궁 앞에 폭탄을 투척한 김지섭 의사의 의열투쟁은 일제가 신성시하던 대상을 향한 첫 의거로, 독립투쟁의 대상과 방법이 확대되는 전환점이 된 사건”이라며 “저의 외조부 김한 선생도 김지섭 의사와 마찬가지로 의열단에서 활동했는데,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선열들의 정신과 업적을 잘 계승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br /><br />이어 "독립운동가 발굴에만 그치지 않고, 더 깊고 넓게 연구되도록 지원하고, 계기가 있을 때마다 한분한분 의미를 재조명해 널리 알려야 한다"며 "독립운동에 대한 정확한 기록과 연구, 교육을 통해 사회적 기억을 잘 형성해서 그것이 상식 수준이 되면 역사 왜곡 시도는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홍범도 장군 흉상 사례에서 우리 모두가 확인했다"고 강조했다.<br /><br />아울러 "올해 광복 80주년, 을사늑약 12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우리의 뿌리와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고히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청산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온 국민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br /><br /></p>
<p>이종찬 광복회장은 "윤봉길 의사의&nbsp;상하이&nbsp;훙커우 공원에서 열린&nbsp;일본&nbsp;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義擧)도 1932년이다. 의열단원들의 무장투쟁은 훨씬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섭 의사의 일본 본토, 더욱이 일본 천황이 살고 있는 왕궁에 직접 폭탄을 투척한 의거는 매우 중요한 업적이다"라고 강조했다.&nbsp;<br /><br /></p>
<p>한편, ‘추강 김지섭 의사 추모 강연회 및 토론회’는 더불어민주당 김문수 의원이 주최하고, 더뉴스, 보훈방송, 혁신리더포럼이 공동으로 주관하며, 광복회,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6.10만세운동유족회, 권오설권오상기념사업회, 國歌만들기 시민모임 등이 후원했다.<br /><br />이날 강연회 및 토론회에는 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지낸 김용달 교수가 발제 및 좌장을 맡고, 한신대 이해영 교수, 충남대 박경목 교수, 경국대(구 안동대) 강윤정 교수가 토론을 맡았다.<br /><br />특히, 일본 본토 최초 무장투쟁의 뜻을 높이 기려 이종찬 광복회장은 추모사를 낭독하고, 우원식 국회의장과 더불어민주당 정진욱 의원 등 10여명의 국회의원이 참석해 축사 후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br /></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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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kimjaibong@gmail.com 김재봉</author>
<atom:updated>2025-04-01T11:38:59+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5-04-01T11:33:16+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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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트로트 전성시대: 엔카와 트로트, 그리고 한국음악의 세계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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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더불어민주당 양문석 의원이 주최하고,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대표 이해영)이 주관하는 ‘2025년 한일관계 심포지움’으로 ‘트로트 전성시대: 엔카와 트로트, 그리고 한국음악의 세계화’란 토론회를 개최했다.
  &amp;#038;nbsp;  
권도희 경북대 교수가 ‘일제 강점기 일본음악 양식과 가요’, 강은일 단국대학교, 해금연주자가 ‘한국음악의 정체성’, 김태균 사단법인전통예술교육문화협회 예술감독이 ‘K-한류를 위한 문화전략 과제’란 주제로 발표했고,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가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에는 의왕시 덕장중학교 신현국 교사와 김진호 국립안동대학교수가 맡았다.
  &amp;#038;nbsp;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은 친일 및 친나치 행각을 벌인 안익태 애국가의 문제점을 오랜 시간 지적해왔으며, 특히 안익태 애국가가 수록된 ‘코리아 환타지’와 ‘만주환상곡’의 연관성, 그리고 불가리아 곡 표절 의혹까지 있음을 음악적인 분석을 통해 입증해왔다.

   
      2월 3일 오후2시,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의실에서 &amp;#039;국가만들기 시민모임&amp;#039;이 주관하고 더불어민주당 양문석 의원이 주최한 ‘2025년 한일관계 심포지움’으로 ‘트로트 전성시대: 엔카와 트로트, 그리고 한국음악의 세계화’ 토론회가 열렸다.
      
   
&amp;#038;nbsp;
(관련기사 https://www.th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23)
(관련기사 https://www.th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27)
  &amp;#038;nbsp;  
주제발표자인 권도희 교수는 일제강점기 일본 음악 양식과 대중가요를 조명하면서 최근 TV조선의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으로 촉발된 ‘트로트는 우리의 전통가요’란 무리한 시도에 대해 따끔한 경고를 날렸다.
  &amp;#038;nbsp;  
특히 조선 세종대왕을 기점으로 약 500여년간 중국의 음악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 전통의 음악을 지켜오고 유지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일본의 요나누끼 단음계를 바탕으로 한 대중가요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음악 속에는 우리 전통의 가락이 어느 정도 녹아 있었음을 지적했다.
  &amp;#038;nbsp;  
일본의 요나누끼 단음계를 사용한 대표적인 곡은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이 있다.
  &amp;#038;nbsp;  
해금 연주자 강은일 교수는 한국음악의 정체성 부분에서 ‘전통과 한국’이란 부분은 구분되어야 하지만, 전통과 한국이 혼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전통과 현대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amp;#038;nbsp;  
특히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으로 시작된 트로트를 한국 전통음악으로 포장하려는 시도에 대해 “트로트가 전통음악이 될 수 없다. 트로트는 대중 음악 중에 하나다”라고 말했다. 강은일 교수는 “전통음악이 되려면 ‘역사성 확보, 문화적 정체성 반영, 공식적 지위 인정’이란 3가지 요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amp;#038;nbsp;  
일본도 19세기 서구음악을 받아들이면서 일본 전통 음악에 요나누끼 단음계를 바탕으로 하는 음악을 완성했다고 지적한 강은일 교수는 “트로트는 전통음악이 아닌, 대중가요”라고 재차 강조했다.
  &amp;#038;nbsp;  
한가지 아쉬운점은 한국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대중음악까지 발전했으면, 오늘날 완전히 새로운 K-POP이 출현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amp;#038;nbsp;
&amp;#038;nbsp;
김태균 예술감독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의 상황을 연결하여 문화예술 전반에 어떤 영향이 스며들었는지 문제점을 지적하며, 뉴라이트와 국가 신축, 그리고 트로트 열풍에 대해서 조명했다.
&amp;#038;nbs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p>
<p>더불어민주당 양문석 의원이 주최하고,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대표 이해영)이 주관하는 ‘2025년 한일관계 심포지움’으로 ‘트로트 전성시대: 엔카와 트로트, 그리고 한국음악의 세계화’란 토론회를 개최했다.</p>
<p>  &nbsp;  </p>
<p>권도희 경북대 교수가 ‘일제 강점기 일본음악 양식과 가요’, 강은일 단국대학교, 해금연주자가 ‘한국음악의 정체성’, 김태균 사단법인전통예술교육문화협회 예술감독이 ‘K-한류를 위한 문화전략 과제’란 주제로 발표했고,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가 좌장을 맡아 종합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에는 의왕시 덕장중학교 신현국 교사와 김진호 국립안동대학교수가 맡았다.</p>
<p>  &nbsp;  </p>
<p>‘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은 친일 및 친나치 행각을 벌인 안익태 애국가의 문제점을 오랜 시간 지적해왔으며, 특히 안익태 애국가가 수록된 ‘코리아 환타지’와 ‘만주환상곡’의 연관성, 그리고 불가리아 곡 표절 의혹까지 있음을 음악적인 분석을 통해 입증해왔다.</p>
<div class="cheditor-caption-wrapper">
   <figure class="cheditor-caption" style="border: 0px solid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fffff; margin: 0px; text-align: left; display: inline-block; width: 720px;"><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502/20250204111501_xziondvz.jpg" alt="보편-이해영photo_2025-02-03_15-08-56.jpg" style="width: 720px; height: 438px;" />
      <figcaption class="cheditor-caption-text" style="margin: 10px 0px 10px 0px;color:#999; text-align: left; line-height: 18px; font-size: 12px; letter-spacing: -0.04em; text-align:justify;">2월 3일 오후2시,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의실에서 '국가만들기 시민모임'이 주관하고 더불어민주당 양문석 의원이 주최한 ‘2025년 한일관계 심포지움’으로 ‘트로트 전성시대: 엔카와 트로트, 그리고 한국음악의 세계화’ 토론회가 열렸다.</figcaption>
      </figure>
   </div>
<p>&nbsp;</p>
<p>(관련기사 <a href="http://https://www.th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23" target="_blank">https://www.th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23</a>)</p>
<p>(관련기사 <a href="https://www.th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27" target="_blank">https://www.th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27</a>)</p>
<p>  &nbsp;  </p>
<p>주제발표자인 권도희 교수는 일제강점기 일본 음악 양식과 대중가요를 조명하면서 최근 TV조선의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으로 촉발된 ‘트로트는 우리의 전통가요’란 무리한 시도에 대해 따끔한 경고를 날렸다.</p>
<p>  &nbsp;  </p>
<p>특히 조선 세종대왕을 기점으로 약 500여년간 중국의 음악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 전통의 음악을 지켜오고 유지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일본의 요나누끼 단음계를 바탕으로 한 대중가요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음악 속에는 우리 전통의 가락이 어느 정도 녹아 있었음을 지적했다.</p>
<p>  &nbsp;  </p>
<p>일본의 요나누끼 단음계를 사용한 대표적인 곡은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이 있다.</p>
<p>  &nbsp;  </p>
<p>해금 연주자 강은일 교수는 한국음악의 정체성 부분에서 ‘전통과 한국’이란 부분은 구분되어야 하지만, 전통과 한국이 혼용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전통과 현대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p>
<p>  &nbsp;  </p>
<p>특히 미스트롯, 미스터 트롯으로 시작된 트로트를 한국 전통음악으로 포장하려는 시도에 대해 “트로트가 전통음악이 될 수 없다. 트로트는 대중 음악 중에 하나다”라고 말했다. 강은일 교수는 “전통음악이 되려면 ‘역사성 확보, 문화적 정체성 반영, 공식적 지위 인정’이란 3가지 요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p>
<p>  &nbsp;  </p>
<p>일본도 19세기 서구음악을 받아들이면서 일본 전통 음악에 요나누끼 단음계를 바탕으로 하는 음악을 완성했다고 지적한 강은일 교수는 “트로트는 전통음악이 아닌, 대중가요”라고 재차 강조했다.</p>
<p>  &nbsp;  </p>
<p>한가지 아쉬운점은 한국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대중음악까지 발전했으면, 오늘날 완전히 새로운 K-POP이 출현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nbsp;</p>
<p>&nbsp;</p>
<p>김태균 예술감독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의 상황을 연결하여 문화예술 전반에 어떤 영향이 스며들었는지 문제점을 지적하며, 뉴라이트와 국가 신축, 그리고 트로트 열풍에 대해서 조명했다.</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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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kimjaibong@gmail.com 김재봉</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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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에키타이안,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영상 최초공개! 그리고 ‘안익태애국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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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 이미 나는 약 10년 전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의 자료실에서 찾아낸 40초가량의 이 연주회 클라이맥스 장면을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영상은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이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쟁뉴스의 후반부에 실려 있다. 당시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말미에 문화뉴스 꼭지에 실린 이 연주회 소식 말고도 그 날의 전쟁뉴스는 꽤 긍정적인 톤이다.
  &amp;#038;nbsp;  
이후 나는 &amp;#038;lt;안익태케이스&amp;#038;gt;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사전 예약을 거쳐 베를린 소재 독일연방기록원(Bundesarchiv)산하 영상원(Filmarchiv)를 방문했다. 저 클라이맥스 장면의 원 필름을 보기위해서다. 이 영상은 2000년대 잠시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파리에 머물 때였는데, 그 전날 베를린에서 하룻밤을 묶고 아침 일찍 영상원을 찾으니 직원이 내가 신청한 필름을 준비해 두었다. 영상원은 과거 내가 베를린에 살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이미 연방기록원은 안익태 즉 나치 시절 기록물에 포함된 에키타이안 파일을 열람 복사하기 위해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영상원은 처음이었다. 혼자 앉아 보고 또 보고하면서 직원의 동의하에 나의 휴대폰으로 그 영상을 두 번 촬영했다. 몇 달 전에 예약하고 또 파리에서 비행기로 이 이른 시간에 방문했던 때문인지 직원도 촬영요청에 선 뜻 동의해 주었다. 물론 대각선으로 검은 테이핑을 한 뒤에 말이다. 
  &amp;#038;nbsp;  
몇 년 전 나는 광복회에 바로 이 필름 원본 입수를 권고한 적이 있다. 비록 친일파의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역사 아닌가, 그렇다면 공법단체인 광복회라면 그 필름을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지금 공개하는 이 필름은 그렇게 입수된 원본 필름의 사본이다. 이 필름은 당시 국회토론회에서 공개한 바 있다. 그리고 축약본이 광복회 홈피에 올라간 적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이 영상은 전 국민이 한 번은 보고 들어야 할 우리 흑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판단된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안익태가 만든 ‘애국가’는 트로트처럼 ‘사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비록 법정 국가는 아니지만 ‘공적 의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amp;#038;nbsp;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안익태의 ‘명예회복’을 외치고 나섰다. 나로서는 국민 스스로가 이런 일부 극소수 뉴라이트의 주장에 얼마나 동의할 것인지 충분한 자료와 근거를 제공하고 판단해 보자는 쪽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에키타이안의 2차 대전 시기 영상자료는 모두 3가지다. 먼저 프랑스 국립영상원 자료가 있다. 두 번째는 시기적으로 이보다 앞선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 깊은 페스티 비가도홀에서 열린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 1주년 기념 연주회 영상이다. 여기서 에키타이안은 일본을 대표해서 ‘에텐라쿠’를 연주했다. 해방 후 에키타이안은 이를 ‘강천성악’이라 달리 부르며 청중을 우롱한 바 있다. 앞의 두 영상은 모두 내가 올려놓은지라 유튜브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영상이 바로 여기에 소개한 영상이다. 첫 번째 영상은 약 7분 50초 정도인 이 영상의 마지막 40초를 편집해 나치의 전쟁뉴스 영상에 내보낸 것이다. 
  &amp;#038;nbsp;  
이 곡이 연주된 때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인 시점에서 1년이 채 안 된 시점이다. 당시 상해 임정은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발동해 조선과 일본은 전쟁상태였다. 일본의 놀라운 전과를 목격한 독일 전역은 당시 일본 붐이 불고 있었다.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 일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amp;#038;lt;독-일협회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amp;#038;gt;가 독일 전역에, 그리고 &amp;#038;lt;일독협회&amp;#038;gt;가 일본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 바로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는 어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안이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전시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자 일본 귀족으로서 에키타이와 마찬가지 지휘자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다음이 에키타이였다. &amp;#038;lt;독일협회&amp;#038;gt;는 나치선전성의 지휘·감독을 받는 기관이었다. 즉 그 정점에 괴벨스가 있다. 안익태를 추적하면서 여러 차례 서신 교환을 한 바 있는 미 시카고대학 음대 티모시 잭슨 교수는 1942년 연주회 녹화가 괴벨스의 지시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시점 독일외교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반소 제2 전선을 열어 주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독일 동부전선의 압박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이 연주회는 일본 괴로 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이었다. 이 행사는 만주일대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던 그런 각종의 기념행사 중 하나였다. 즉 에키타이안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한 바로 그 적국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개최된 각종의 행사에 일본을 대표해서 이적행위에 솔선수범한 것이다.
  &amp;#038;nbsp;  
에키타이안이 하필 ‘만주국’을 찬양하는 곡을 만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의 스폰서인 에하라 고이치가 당시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이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참사관이었지만 에하라 고이치는 동경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얼빈시 부시장을 역임한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하얼빈시 총무처장 그리고 부시장으로 재직 시 731부대 창설에 핵심적으로 조력하고 이후 독일과 일본의 생화학전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급상 참사관이지만 정식 공사인 한인 여의문 보다 실세였다. 바로 그런 그의 사저에 에키타이안은 2년 반 가까이 주소지를 두고 여기서 기식했다. 바로 베를린 호숫가에 있는 이 집에서 작곡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그리고 미 CIA 전신인 OSS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 고이치는 전쟁 말기 일본의 재독 첩보조직의 총책이었다, 쉽게 말해 재독 일본 스파이 수장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은 셈이다. 에키타이안과 같은 시기 에하라 고이치가 관리하던 베를린 체류 또 다른 조선인이자 현대 무용가 박영인(쿠니 마사미)을 OSS는 ‘가장 영리한 첩보원agent’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스파이총책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안은? 박영인은 전시에 독일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다녔다. 에키타이안은 전시에 추축국과 친추축국 그리고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그들을 위해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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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의 오프닝 크레딧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만주제국Mandschoutikuo 건국 10주년 기념 축하 연주회,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베를린 대편성 라디오방송교향악단이 라미LAMY 합창단 협연하에 작곡가 에키타이안이 지휘하고 에하라 고이치가 합창 대본을 쓴 ’축전곡Festmusik’.” 그리고 배경에 깔린 총보의 제목도 ‘축전곡’으로 되어 있고 바로 그 밑에 에하라 고이치가 일본어로 쓴 ‘오족협화’를 찬양하는 합창대본이 음역되어 있다.      
  &amp;#038;nbsp;  
1942년 9월 18일의 이 영상은 이 축전곡의 마지막 악장이다. 영상의 5:30초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에하라 고이치다. 그리고 합창대본을 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동양인이 만주국 공사 여의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후 그는 중국에서 ‘한간’ 혐의로 총살되었다. 당시 주독 일본대사 육군중장 오시마 히로시는 영상 6:36초에 등장한다. ‘히틀러보다 더 히틀러스럽다’는 평을 받던 인물이다. 6:40초 즈음 에하라 고이치가 다시 잠깐 등장하고 6:59초 너무나 익숙한 애국가의 ‘우리나라 만세’와 거의 같은 선율이 등장한다. 물론 이때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만주국이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에키타이가 청중석을 가리키는 데 아마 에하라 고이치가 아닐까 싶다. 
  &amp;#038;nbsp;  
이 영상은 전곡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1944년 말 이후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해지자, 사실상 추축국 편이었던 스페인의 프랑코정권은 추축국을 지원하기 위해 에키타이안의 &amp;#039;만주국&amp;#039;을 수차례 방송한 사실이 바르셀로나 라디오 방송국 편성표에 그 일자, 시간과 더불어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이 방송이 &amp;#039;음반&amp;#039;을 통해 나갔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축전곡’의 전곡을 들어야 과연 에키타이안이 안익태 애국가선율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로서는 꽤 장기간, 이 음반을 추적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상에서도 보듯 악보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에키타이안 본인이 이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 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amp;#038;lt;코리아환상곡&amp;#038;gt;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가 스페인 도피 중 가지고 있던 이 곡의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한 바로 그것이다. 나는 몇 년 전 에키타이안이 만주국 악보를 한국환상곡으로 표지 갈이를 한 바로셀로나 북쪽 휴양지 사가로라는 곳을 직접 답사한 적이 있다.  훗날 에키타이는 이 악보를 &amp;#039;민족의 영도자&amp;#039;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1955년 문득 애국자로 둔갑 이승만 탄신기념연주를 위해 귀국한 에키타이안은 이승만에게 이 악보를 헌정한다. 바로 그 악보는 현재 김형석이 관장으로 있는 독립기념관에 있다! 
  &amp;#038;nbsp;  
1944년 이미 전황은 가망이 없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 히틀러 생일주간에 열린 연례 베토벤 페스티벌 연주를 위해 에키타이안은 에하라 고이치와 파리를 방문했다. 이 연주회에서 저 유명한 알프레드 코르토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협연했다. 알프레드 코르토는 그 직후 파리가 해방된 뒤 ‘입국 금지 인물 persona non grata’로 지목되어 한참 동안 프랑스에 올 수가 없었다. 에키타인안도 이 리스트에 올랐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연주를 끝으로 에키타이는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망’간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애국자가 이제 해방이 되었는데 그리운 조국으로 가지 않았을까. 일본인이지만 일본으로, 조선인이지만 조선으로도 가지 못한, 그렇다고 독일에 남을 수도 미국으로 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의 스페인행은 그의 친일, 친나치 행적을 은폐하기에 나름 &amp;#039;잘 된(?)&amp;#039; 선택일지 모르겠다. 프랑코 독재가 싫어 파블로 카잘스는 살아생전 조국인 스페인에 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가 나치 패망 후 손쉽게 도망갈 곳 중 하나가 스페인이었다.
  &amp;#038;nbsp;  
최근 나는 해외 경매사이트에 에키타이안의 ‘흰백합화’ SP판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곡은 특히나 에키타이안의 몇 안 되는 곡 중 작곡 연도나 곡 내용이 불명인 상태로 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어디서 작곡되었는지는 이미 밝혀졌다. 에하라 고이치가 전후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귀국한 뒤 동경에서 자신의 후일담을 수필로 낸 것을 내가 발굴할 적이 있다. 여기에 이 ‘축전곡’과 함께 ‘흰백합화’도 자신의 집에서 작곡했다고 되어 있다. 가격이 터무니없어 나는 이 음반을 사지 않았다. 아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만주국 ‘축전곡’ 음반이 경매사이트에 등장하면 그것은 내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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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에키타이안의 명예회복을 말한다. 하지만 그전에 이런 자의 애국가를 불러야 했던 우리 국민의 ‘명예회복’이 먼저다. 그래야 한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 이미 나는 약 10년 전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의 자료실에서 찾아낸 40초가량의 이 연주회 클라이맥스 장면을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영상은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이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쟁뉴스의 후반부에 실려 있다. 당시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말미에 문화뉴스 꼭지에 실린 이 연주회 소식 말고도 그 날의 전쟁뉴스는 꽤 긍정적인 톤이다.</p>
<p>  &nbsp;  </p>
<p>이후 나는 &lt;안익태케이스&gt;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사전 예약을 거쳐 베를린 소재 독일연방기록원(Bundesarchiv)산하 영상원(Filmarchiv)를 방문했다. 저 클라이맥스 장면의 원 필름을 보기위해서다. 이 영상은 2000년대 잠시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파리에 머물 때였는데, 그 전날 베를린에서 하룻밤을 묶고 아침 일찍 영상원을 찾으니 직원이 내가 신청한 필름을 준비해 두었다. 영상원은 과거 내가 베를린에 살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이미 연방기록원은 안익태 즉 나치 시절 기록물에 포함된 에키타이안 파일을 열람 복사하기 위해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영상원은 처음이었다. 혼자 앉아 보고 또 보고하면서 직원의 동의하에 나의 휴대폰으로 그 영상을 두 번 촬영했다. 몇 달 전에 예약하고 또 파리에서 비행기로 이 이른 시간에 방문했던 때문인지 직원도 촬영요청에 선 뜻 동의해 주었다. 물론 대각선으로 검은 테이핑을 한 뒤에 말이다. </p>
<p>  &nbsp;  </p>
<p>몇 년 전 나는 광복회에 바로 이 필름 원본 입수를 권고한 적이 있다. 비록 친일파의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역사 아닌가, 그렇다면 공법단체인 광복회라면 그 필름을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지금 공개하는 이 필름은 그렇게 입수된 원본 필름의 사본이다. 이 필름은 당시 국회토론회에서 공개한 바 있다. 그리고 축약본이 광복회 홈피에 올라간 적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이 영상은 전 국민이 한 번은 보고 들어야 할 우리 흑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판단된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안익태가 만든 ‘애국가’는 트로트처럼 ‘사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비록 법정 국가는 아니지만 ‘공적 의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p>
<p>  &nbsp;  </p>
<p>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안익태의 ‘명예회복’을 외치고 나섰다. 나로서는 국민 스스로가 이런 일부 극소수 뉴라이트의 주장에 얼마나 동의할 것인지 충분한 자료와 근거를 제공하고 판단해 보자는 쪽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에키타이안의 2차 대전 시기 영상자료는 모두 3가지다. 먼저 프랑스 국립영상원 자료가 있다. 두 번째는 시기적으로 이보다 앞선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 깊은 페스티 비가도홀에서 열린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 1주년 기념 연주회 영상이다. 여기서 에키타이안은 일본을 대표해서 ‘에텐라쿠’를 연주했다. 해방 후 에키타이안은 이를 ‘강천성악’이라 달리 부르며 청중을 우롱한 바 있다. 앞의 두 영상은 모두 내가 올려놓은지라 유튜브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영상이 바로 여기에 소개한 영상이다. 첫 번째 영상은 약 7분 50초 정도인 이 영상의 마지막 40초를 편집해 나치의 전쟁뉴스 영상에 내보낸 것이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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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 곡이 연주된 때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인 시점에서 1년이 채 안 된 시점이다. 당시 상해 임정은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발동해 조선과 일본은 전쟁상태였다. 일본의 놀라운 전과를 목격한 독일 전역은 당시 일본 붐이 불고 있었다.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 일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lt;독-일협회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gt;가 독일 전역에, 그리고 &lt;일독협회&gt;가 일본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 바로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는 어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안이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전시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자 일본 귀족으로서 에키타이와 마찬가지 지휘자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다음이 에키타이였다. &lt;독일협회&gt;는 나치선전성의 지휘·감독을 받는 기관이었다. 즉 그 정점에 괴벨스가 있다. 안익태를 추적하면서 여러 차례 서신 교환을 한 바 있는 미 시카고대학 음대 티모시 잭슨 교수는 1942년 연주회 녹화가 괴벨스의 지시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시점 독일외교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반소 제2 전선을 열어 주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독일 동부전선의 압박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이 연주회는 일본 괴로 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이었다. 이 행사는 만주일대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던 그런 각종의 기념행사 중 하나였다. 즉 에키타이안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한 바로 그 적국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개최된 각종의 행사에 일본을 대표해서 이적행위에 솔선수범한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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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에키타이안이 하필 ‘만주국’을 찬양하는 곡을 만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의 스폰서인 에하라 고이치가 당시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이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참사관이었지만 에하라 고이치는 동경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얼빈시 부시장을 역임한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하얼빈시 총무처장 그리고 부시장으로 재직 시 731부대 창설에 핵심적으로 조력하고 이후 독일과 일본의 생화학전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급상 참사관이지만 정식 공사인 한인 여의문 보다 실세였다. 바로 그런 그의 사저에 에키타이안은 2년 반 가까이 주소지를 두고 여기서 기식했다. 바로 베를린 호숫가에 있는 이 집에서 작곡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그리고 미 CIA 전신인 OSS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 고이치는 전쟁 말기 일본의 재독 첩보조직의 총책이었다, 쉽게 말해 재독 일본 스파이 수장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은 셈이다. 에키타이안과 같은 시기 에하라 고이치가 관리하던 베를린 체류 또 다른 조선인이자 현대 무용가 박영인(쿠니 마사미)을 OSS는 ‘가장 영리한 첩보원agent’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스파이총책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안은? 박영인은 전시에 독일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다녔다. 에키타이안은 전시에 추축국과 친추축국 그리고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그들을 위해 복무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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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 영상의 오프닝 크레딧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만주제국Mandschoutikuo 건국 10주년 기념 축하 연주회,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베를린 대편성 라디오방송교향악단이 라미LAMY 합창단 협연하에 작곡가 에키타이안이 지휘하고 에하라 고이치가 합창 대본을 쓴 ’축전곡Festmusik’.” 그리고 배경에 깔린 총보의 제목도 ‘축전곡’으로 되어 있고 바로 그 밑에 에하라 고이치가 일본어로 쓴 ‘오족협화’를 찬양하는 합창대본이 음역되어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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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42년 9월 18일의 이 영상은 이 축전곡의 마지막 악장이다. 영상의 5:30초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에하라 고이치다. 그리고 합창대본을 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동양인이 만주국 공사 여의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후 그는 중국에서 ‘한간’ 혐의로 총살되었다. 당시 주독 일본대사 육군중장 오시마 히로시는 영상 6:36초에 등장한다. ‘히틀러보다 더 히틀러스럽다’는 평을 받던 인물이다. 6:40초 즈음 에하라 고이치가 다시 잠깐 등장하고 6:59초 너무나 익숙한 애국가의 ‘우리나라 만세’와 거의 같은 선율이 등장한다. 물론 이때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만주국이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에키타이가 청중석을 가리키는 데 아마 에하라 고이치가 아닐까 싶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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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 영상은 전곡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1944년 말 이후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해지자, 사실상 추축국 편이었던 스페인의 프랑코정권은 추축국을 지원하기 위해 에키타이안의 '만주국'을 수차례 방송한 사실이 바르셀로나 라디오 방송국 편성표에 그 일자, 시간과 더불어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이 방송이 '음반'을 통해 나갔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축전곡’의 전곡을 들어야 과연 에키타이안이 안익태 애국가선율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로서는 꽤 장기간, 이 음반을 추적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상에서도 보듯 악보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에키타이안 본인이 이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 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lt;코리아환상곡&gt;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가 스페인 도피 중 가지고 있던 이 곡의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한 바로 그것이다. 나는 몇 년 전 에키타이안이 만주국 악보를 한국환상곡으로 표지 갈이를 한 바로셀로나 북쪽 휴양지 사가로라는 곳을 직접 답사한 적이 있다.  훗날 에키타이는 이 악보를 '민족의 영도자'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1955년 문득 애국자로 둔갑 이승만 탄신기념연주를 위해 귀국한 에키타이안은 이승만에게 이 악보를 헌정한다. 바로 그 악보는 현재 김형석이 관장으로 있는 독립기념관에 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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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44년 이미 전황은 가망이 없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 히틀러 생일주간에 열린 연례 베토벤 페스티벌 연주를 위해 에키타이안은 에하라 고이치와 파리를 방문했다. 이 연주회에서 저 유명한 알프레드 코르토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협연했다. 알프레드 코르토는 그 직후 파리가 해방된 뒤 ‘입국 금지 인물 persona non grata’로 지목되어 한참 동안 프랑스에 올 수가 없었다. 에키타인안도 이 리스트에 올랐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연주를 끝으로 에키타이는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망’간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애국자가 이제 해방이 되었는데 그리운 조국으로 가지 않았을까. 일본인이지만 일본으로, 조선인이지만 조선으로도 가지 못한, 그렇다고 독일에 남을 수도 미국으로 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의 스페인행은 그의 친일, 친나치 행적을 은폐하기에 나름 '잘 된(?)' 선택일지 모르겠다. 프랑코 독재가 싫어 파블로 카잘스는 살아생전 조국인 스페인에 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가 나치 패망 후 손쉽게 도망갈 곳 중 하나가 스페인이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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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최근 나는 해외 경매사이트에 에키타이안의 ‘흰백합화’ SP판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곡은 특히나 에키타이안의 몇 안 되는 곡 중 작곡 연도나 곡 내용이 불명인 상태로 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어디서 작곡되었는지는 이미 밝혀졌다. 에하라 고이치가 전후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귀국한 뒤 동경에서 자신의 후일담을 수필로 낸 것을 내가 발굴할 적이 있다. 여기에 이 ‘축전곡’과 함께 ‘흰백합화’도 자신의 집에서 작곡했다고 되어 있다. 가격이 터무니없어 나는 이 음반을 사지 않았다. 아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만주국 ‘축전곡’ 음반이 경매사이트에 등장하면 그것은 내가 산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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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누가 에키타이안의 명예회복을 말한다. 하지만 그전에 이런 자의 애국가를 불러야 했던 우리 국민의 ‘명예회복’이 먼저다. 그래야 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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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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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북리뷰] 애국가에 국가(國歌)의 자격을 묻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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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한미 FTA,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와 현실의 첨예한 이슈에 예리한 정론으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해온 한신대 이해영 교수가 ‘애국가’를 들고 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음악적 가치가 아닌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애국가가 과연 국가(國歌)로 적절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그리고 정치적 행위로서 국가란 무엇인지 불편하지만 마주해야 할 물음을 우리에게 묵직하게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저자가 오랫동안 치열하게 찾은 자료들의 제시와 분석, 날카롭고 곧은 정치·역사적 관점 속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된다.국가(國歌)는 시민 주권의 구현체인 국가(國家)와의 정서적 결속이자 충성의 서약이다. 따라서 국가(國歌)는 정치적이고 시민 종교적인 면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인 애국을 담아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르고 듣는 안익태의 [애국가]에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숭고한 애국심을 지닌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휘장 속에 가려진 안익태의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행적과 [애국가]의 변천 과정을 통해 과연 우리가 [애국가]를 국가로 제창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것에 대해 합의할 것인지 우리에게 판단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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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말1. 안익태 「애국가」의 탄생2. ‘프린스 리’는 누구인가?3. 더블린에서 베를린으로4. 그러면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5. 「에텐라쿠(월천악越天樂)」인가, 「강천성악(降天聲樂)」인가?6.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과 에키타이 안7. 독일 협회(獨日協會,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와 나치 독일8. 1942년 9월 18일 그날의 「만주국」9. 우리에게 만주국이란? 소설가 박영준, 그리고 에키타이 안의 경우9.1. 만주국의 민족 협화9.2. 소설가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 개작9.3. 에키타이 안의 「만주국」 개작10. 「애국가」 논쟁: 국가 상징의 재구성을 위하여10.1. 두 개의 ‘분단’ 애국가의 형성10.2 안익태 「애국가」의 공고화: 이승만과 박정희10.3. 봉인과 도전참고문헌, 사진 및 도판 출전맺는 말
   
      
   
   
      ■출판사 리뷰
      
         
            에키타이 안에게 애국을 묻다애국가가 포함된 &amp;#039;코리아 판타지&amp;#039;는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됐다. 안익태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조선의 새 &amp;#039;애국가&amp;#039;의 작곡가라고 말하지만 임시 정부는 안익태 작곡의 &amp;#039;애국가&amp;#039; 신 곡조의 사용을 허가했을 뿐이었다. 더블린 초연 이후 안익태는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의 베를린 저택에 2년 반 가까이 기거했다. 에하라 고이치는 다름 아닌 주 베를린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 정보기관 총책이었으며, 다양한 분야에 있는 300여 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 저자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정황들은 에키타이 안이 일본 정보기관의 특수 공작원이나 정보원이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최소한 에키타이 안은 유럽에서 추축국 중심으로 연주 여행을 하며 일본제국을 선전하는 고급 나팔수 역할을 하고 편익을 제공받았다.일본 궁중음악에서 우리 전통음악으로의 둔갑저자는 안익태의 행적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친일적 성격을 파헤치고 후에 이 작품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까지의 변모들을 보여준다. 우선 &amp;#039;강천성악(하늘에서 내려온 음악)&amp;#039;은 전통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59년 작곡된 것이 아니다. 악보와 음원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아악의 선율을 서양 악기로 편곡해 전시 유럽에서 선전용으로 연주한 &amp;#039;에텐라쿠&amp;#039;의 개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남아 있는 영상 자료를 비교하여 저자는 밝히고 있다.또한 에키타이 안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대일본제국 2600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하고 일본 천황에게 헌정한 &amp;#039;일본 축전곡&amp;#039;의 지휘를 맡았다.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동경으로 적은 에케타이 안의 나치 독일의 제국 음악원 회원증에는 나치 독일 비밀경찰의 ‘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기재 사항 없음’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 나치 비밀경찰로부터 정치적 흠결이 없다는 확인을 받았다는 의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관계로부터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독일 협회(獨日協會)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은 예술과 문화 교류를 통해 정치적·군사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으며 그 중심에 독일협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키타이 안의 베를린 필 연주회는 바로 이 독일 협회의 주최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amp;#039;만주국 환상곡&amp;#039;의 &amp;#039;한국 환상곡&amp;#039;으로의 변신에키타이 안은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를 위해 만주에서 유행하는 선율들을 활용하여 &amp;#039;만주국 환상곡&amp;#039;을 만든다. 이 곡의 작사는 일본 정보기관 총책 에하라 고이치가 맡았다. 문제는 우리가 부르고 듣는 애국가가 &amp;#039;만주국 환상곡&amp;#039;의 피날레 부분이라는 것이다. 일본제국이 만주 사변 이후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건국을 축하위해 만든 곡을 우리의 국가로 재사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에키타이 안은 친일 부역의 산물인 &amp;#039;만주국 환상곡&amp;#039;을 1944년 파리 해방을 앞두고 파시스트 독재 국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면서 악보를 폐기했다. 그리고 1938년 더블린 판을 개작하여 새롭게 1944년 판 &amp;#039;한국 환상곡&amp;#039;을 냈다.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유사한 주제를 되풀이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스스로 만든 &amp;#039;애국가&amp;#039;를 ‘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하다 그것을 다시 애국이라 주장하면서 그 중간 과정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우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다.상상의 법정을 열 때해방 이후 안익태의 애국가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대한민국의 정식 국가(國歌)에 대한 필요성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법정(法定) 국가는 아니지만 ‘관행상’ 국가로 기능한 것이다. 이후 안익태는 이승만 정권에 친화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박정희 정권에도 영합하는 행위를 보였다. 2000년 &amp;#039;만주국 환상곡&amp;#039; 영상이 발견되기 전까지 애국적 인물로 영예와 권력을 누렸던 것이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은 폐지되었지만 우리는 상상의 법정을 열어 이른바 ‘기억 투쟁’을 해야 한다. 에키타이 안은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에 협력하는 부역을 했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 저자는 통일 전까지는 현행 그대로 두거나 제2의 애국가를 만들어 부르기, 공론화하여 새로운 애국가를 공모하기 등의 대안들은 제안한다.
         
         
      
   
      
   
   ■저자소개 - 이해영
   
      
         
      
      1962년 마산에서 나고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당시로선 서독) 마부룩(Marburg) 대학교에서 철학박사(Dr.Phil.)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을 거쳐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지금에 이른다. 이 대학에서 국제평화인권대학원 원장을 맡은 적이 있고, 그 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투기자본감시센터, 참여연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KNCC, 국제통상연구소등 다수의 시민단체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해 왔다. 산업통상부, 몇 개의 국회상임위, 국회입법조사처 등에서도 오랫동안 자문을 한 바 있다. 21세기정치학회 이사를 했고, 한국안보통상학회, 국제지역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박사학위 논문으로 『그람시와 하버마스: 시민사회, 생활세계 그리고 정치』 (독문, 1994)를 상재했고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2000), 『낯선 식민지, 한미 FTA』(2006)를 저술했다. 이 밖의 공저로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2008), 편저로 『1980년대: 혁명의 시대』(1999), 『한미FTA 국민보고서』 (2006), 『한미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2007)가 있다. 논문으로 「칼 슈미트의 정치사상: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2004) (『21세기 정치학회보』 14(2)호), 「역사문제와 ‘동맹의 논리’: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중심으로」(2016) (『씨알의 소리』 2016년, 11·12호) 등 다수가 있다. 주된 연구 영역은 서양정치사상과 국제정치경제다. 대학에선 마키아벨리, 그람시, 슈미트, 하버마스 등을 강의한다. 국제관계에서는 국제통상을 주되게 하면서 한미관계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지정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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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한미 FTA,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와 현실의 첨예한 이슈에 예리한 정론으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해온 한신대 이해영 교수가 ‘애국가’를 들고 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음악적 가치가 아닌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애국가가 과연 국가(國歌)로 적절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그리고 정치적 행위로서 국가란 무엇인지 불편하지만 마주해야 할 물음을 우리에게 묵직하게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저자가 오랫동안 치열하게 찾은 자료들의 제시와 분석, 날카롭고 곧은 정치·역사적 관점 속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된다.<br /><br />국가(國歌)는 시민 주권의 구현체인 국가(國家)와의 정서적 결속이자 충성의 서약이다. 따라서 국가(國歌)는 정치적이고 시민 종교적인 면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인 애국을 담아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르고 듣는 안익태의 [애국가]에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숭고한 애국심을 지닌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휘장 속에 가려진 안익태의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행적과 [애국가]의 변천 과정을 통해 과연 우리가 [애국가]를 국가로 제창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것에 대해 합의할 것인지 우리에게 판단을 요구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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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75852_lcspoxwr.jpg" alt="이해영 - 안익태 케이스.jpg" style="width: 540px; height: 800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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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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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목차</div>
<div>
   <div>들어가는 말<br />1. 안익태 「애국가」의 탄생<br />2. ‘프린스 리’는 누구인가?<br />3. 더블린에서 베를린으로<br />4. 그러면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br />5. 「에텐라쿠(월천악越天樂)」인가, 「강천성악(降天聲樂)」인가?<br />6.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과 에키타이 안<br />7. 독일 협회(獨日協會,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와 나치 독일<br />8. 1942년 9월 18일 그날의 「만주국」<br />9. 우리에게 만주국이란? 소설가 박영준, 그리고 에키타이 안의 경우<br />9.1. 만주국의 민족 협화<br />9.2. 소설가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 개작<br />9.3. 에키타이 안의 「만주국」 개작<br />10. 「애국가」 논쟁: 국가 상징의 재구성을 위하여<br />10.1. 두 개의 ‘분단’ 애국가의 형성<br />10.2 안익태 「애국가」의 공고화: 이승만과 박정희<br />10.3. 봉인과 도전<br />참고문헌, 사진 및 도판 출전<br />맺는 말</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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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출판사 리뷰</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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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에키타이 안에게 애국을 묻다</b><br /><br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 판타지'는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됐다. 안익태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조선의 새 '애국가'의 작곡가라고 말하지만 임시 정부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신 곡조의 사용을 허가했을 뿐이었다. 더블린 초연 이후 안익태는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의 베를린 저택에 2년 반 가까이 기거했다. 에하라 고이치는 다름 아닌 주 베를린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 정보기관 총책이었으며, 다양한 분야에 있는 300여 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 저자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정황들은 에키타이 안이 일본 정보기관의 특수 공작원이나 정보원이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최소한 에키타이 안은 유럽에서 추축국 중심으로 연주 여행을 하며 일본제국을 선전하는 고급 나팔수 역할을 하고 편익을 제공받았다.<br /><br /><b>일본 궁중음악에서 우리 전통음악으로의 둔갑</b><br /><br />저자는 안익태의 행적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친일적 성격을 파헤치고 후에 이 작품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까지의 변모들을 보여준다. 우선 '강천성악(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은 전통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59년 작곡된 것이 아니다. 악보와 음원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아악의 선율을 서양 악기로 편곡해 전시 유럽에서 선전용으로 연주한 '에텐라쿠'의 개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남아 있는 영상 자료를 비교하여 저자는 밝히고 있다.<br /><br />또한 에키타이 안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대일본제국 2600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하고 일본 천황에게 헌정한 '일본 축전곡'의 지휘를 맡았다.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동경으로 적은 에케타이 안의 나치 독일의 제국 음악원 회원증에는 나치 독일 비밀경찰의 ‘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기재 사항 없음’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 나치 비밀경찰로부터 정치적 흠결이 없다는 확인을 받았다는 의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관계로부터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독일 협회(獨日協會)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은 예술과 문화 교류를 통해 정치적·군사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으며 그 중심에 독일협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키타이 안의 베를린 필 연주회는 바로 이 독일 협회의 주최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br /><br /><b>'만주국 환상곡'의 '한국 환상곡'으로의 변신</b><br /><br />에키타이 안은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를 위해 만주에서 유행하는 선율들을 활용하여 '만주국 환상곡'을 만든다. 이 곡의 작사는 일본 정보기관 총책 에하라 고이치가 맡았다. 문제는 우리가 부르고 듣는 애국가가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라는 것이다. 일본제국이 만주 사변 이후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건국을 축하위해 만든 곡을 우리의 국가로 재사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에키타이 안은 친일 부역의 산물인 '만주국 환상곡'을 1944년 파리 해방을 앞두고 파시스트 독재 국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면서 악보를 폐기했다. 그리고 1938년 더블린 판을 개작하여 새롭게 1944년 판 '한국 환상곡'을 냈다.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유사한 주제를 되풀이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스스로 만든 '애국가'를 ‘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하다 그것을 다시 애국이라 주장하면서 그 중간 과정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우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다.<br /><br /><b>상상의 법정을 열 때</b><br /><br />해방 이후 안익태의 애국가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대한민국의 정식 국가(國歌)에 대한 필요성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법정(法定) 국가는 아니지만 ‘관행상’ 국가로 기능한 것이다. 이후 안익태는 이승만 정권에 친화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박정희 정권에도 영합하는 행위를 보였다. 2000년 '만주국 환상곡' 영상이 발견되기 전까지 애국적 인물로 영예와 권력을 누렸던 것이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은 폐지되었지만 우리는 상상의 법정을 열어 이른바 ‘기억 투쟁’을 해야 한다. 에키타이 안은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에 협력하는 부역을 했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 저자는 통일 전까지는 현행 그대로 두거나 제2의 애국가를 만들어 부르기, 공론화하여 새로운 애국가를 공모하기 등의 대안들은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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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저자소개 - 이해영</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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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마산에서 나고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당시로선 서독) 마부룩(Marburg) 대학교에서 철학박사(Dr.Phil.)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을 거쳐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지금에 이른다. 이 대학에서 국제평화인권대학원 원장을 맡은 적이 있고, 그 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투기자본감시센터, 참여연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KNCC, 국제통상연구소등 다수의 시민단체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해 왔다. 산업통상부, 몇 개의 국회상임위, 국회입법조사처 등에서도 오랫동안 자문을 한 바 있다. 21세기정치학회 이사를 했고, 한국안보통상학회, 국제지역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br /><br />박사학위 논문으로 『그람시와 하버마스: 시민사회, 생활세계 그리고 정치』 (독문, 1994)를 상재했고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2000), 『낯선 식민지, 한미 FTA』(2006)를 저술했다. 이 밖의 공저로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2008), 편저로 『1980년대: 혁명의 시대』(1999), 『한미FTA 국민보고서』 (2006), 『한미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2007)가 있다. 논문으로 「칼 슈미트의 정치사상: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2004) (『21세기 정치학회보』 14(2)호), 「역사문제와 ‘동맹의 논리’: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중심으로」(2016) (『씨알의 소리』 2016년, 11·12호) 등 다수가 있다. 주된 연구 영역은 서양정치사상과 국제정치경제다. 대학에선 마키아벨리, 그람시, 슈미트, 하버마스 등을 강의한다. 국제관계에서는 국제통상을 주되게 하면서 한미관계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지정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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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20:16:20+09:00</atom: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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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북리뷰] 우리는 우크라이나전쟁과 연결되어 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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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이 책은 2022년 2월에 시작된 이상한 전쟁, ‘우크라이나전쟁’의 원인, 경과 그리고 해법을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는 “푸틴 치매설” “러시아군 키예프 대패설” 등 이 전쟁에 대해서는 한쪽(이른바 서방 1세계)으로 치우친 해석/보도에 관하여 “과연 사실이 그러한가?”라고 질문한다.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전쟁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브레히트의 연극처럼 이 전쟁을 바라보는 독자의 관점을 낯선 방향으로 뒤집고, 이 전쟁의 드러나지 않은 혹은 의도적으로 가려진 국면으로 독자를 잡아당긴다.지은이는 전쟁과 평화는 천당과 지옥처럼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절대로 이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의 해석이라고 말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니라 상호의 이익과 전략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들리지 않던 우크라이나전쟁의 다른 국면을 가리킨다. 전쟁이 정치라는 선으로 평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전쟁의 해석을 통해 해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바로 그 순간 평화를 상상하고 실행할 교두보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 지정학적 변화를 인식하고 미래로 나아갈 교두보를 찾고자 한다. 나아가 그로부터 이어질 미래 한국의 삶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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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1장. 들어가며정답 없는 전쟁을 바라보며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1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2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32장. 전쟁의 성격과 원인1 대리전쟁으로서의 우크라이나전쟁─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실존 위협론’─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대응─우크라이나전쟁은 제2의 아프가니스탄전쟁인가?2 ‘내전의 계속’으로서 우크라이나전쟁─2014년 마이단: 존엄혁명 아니면 ‘뻔뻔한 쿠데타’─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3 루소포비아의 정치학3장. 2022년 전쟁의 전개1 전쟁은 언제 시작되었나?2 전쟁의 1단계: 러시아의 패배인가 거대한 기만인가?3 전쟁 2단계의 전개와 특성─전쟁의 전개 양상: 작전과 전투─아조프연대와 마리우폴 전투─탈산업화 시대의 물량전4 하이브리드전쟁─경제전쟁으로서 대러 제재: EU의 자해인가 러시아의 고립인가?─프레스티튜트와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언론(정보)전쟁5 전쟁의 3단계: 돈바스를 넘어 노보로시야?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1 지정학적 대전환과 신냉전: 단극에서 다극으로─다극 체제로의 평화적 이행은 가능한가?: 지정학의 귀환과 중러 전략협력 체제─미국의 대전략: 글로벌 나토와 동맹 궁핍화─다극 체제와 글로벌사우스2 달러 헤게모니의 위기: 새로운 준비통화의 출현3 산업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 글로벌 경제의 종말?4 정의로운 신세계질서?5장. 한국의 ‘지정치경제적’ 대위기?1 한국의 지정학적 정체성과 오리엔탈리즘2 한국의 대전략: 다극 체제와 포스트 한반도평화프로세스6장. 클라우제비츠와 함께 칸트로?주참고문헌찾아보기
   
      
   
   ■책 속으로
   
      
         대리전쟁으로서의 우크라이나전쟁개전 초기부터 나는 이 전쟁은 고전적 전면전(적지, 적 영토의 점령을 동반한 적의 완전 섬멸과 무장 해제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한 제한전limited war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 정치적 목표에 과연 우크라이나 전역의 군사적 점령과 이후의 정권 교체까지 포함되는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푸틴은 개전과 동시에 이 전쟁의 정치적 목표로 ‘돈바스 해방’, ‘나치 제거’, ‘탈군사화’를 제시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펼치고 있는 특수 군사작전은 바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인 셈이다.&amp;#038;nbsp;---「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
            
               
            
            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대응나토 동진, 특히 그 순번이 우크라이나에 왔을 때 이 문제가 얼마나 휘발성이 강해질지 미국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8년 2월 1일자 모스크바발 비밀 전문을 살펴보자.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 국무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나토, 유럽연합 협의기구로 전달된 전문은 “러시아는 나토에 의한 포위와 역내 영향력 축소 시도를 인지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안보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할지도 모르는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되지 않은 결과를 우려하고 있다”고 전한다. (중략) 나토 가입 문제가 장기적으로 미러 관계의 최대 불안 요소이며, 양국을 전형적인 대결 태세로 몰고 갈 수 있다고 보고한다. 즉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초래할 위험에 내전과 영토 분할, 신냉전이 모두 포함되므로 이는 결국 러시아가 개입 여부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고 밝힌다. 즉 이 말을 뒤집으면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개입을 강요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amp;#038;nbsp;---「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2014년 마이단: 존엄혁명 아니면 ‘뻔뻔한 쿠데타’저항운동의 첫날부터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마이단에 가담했다. 진보, 현대화, 인권 등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세력과 급진 민족주의파의 합류는 시민 저항이 반헌법적 정권 타도로 귀결된 무장 투쟁으로 바뀌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마이단 혁명에서 급진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쿠데타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마이단운동이 형성되었다. 이 근시안적이고 불행한 동맹의 비극적 결과를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다. 젤렌스키는 앞서 약속한 화해 정책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세력 쪽으로 유턴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체 국민 중 소수에 불과한 급진파 정치인, 법원, 경찰관, 미디어 종사자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프로파간디스트들은 “젤렌스키는 유대인이라서 나치가 될 수 없다”라고 되풀이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어젠다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우크라이나의 정치 과정을 통제하는 이들이 바로 급진 세력이라는 것이 진실이다.&amp;#038;nbsp;---「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2014년 이른바 유로마이단 운동은 네오나치의 공간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미국이 있었다. 특히 나토 대사를 지냈고 현재 국무부 차관인 빅토리아 눌런드가 핵심 고리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 무장 나치들은 지리멸렬한 우크라이나 군경을 대신해 사실상 미국이 조직한 국립 경찰을 장악했고 국방군에도 정식 편입된 상태다. 조선의 해방 직후를 생각하면 된다. 미국은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이유로, 또한 우크라이나의 민주화를 지원한다는 구실로 인종주의,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나치 집단의 뒷배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어떻게 네오나치가 국회의장이 될 수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amp;#038;nbsp;---「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전쟁의 1단계: 러시아의 패배인가 대기만술인가?젤렌스키는 한편으로 나토가 우크라이나 가입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해야 나토 가입이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전쟁을 일종의 나토 입장권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4월 러시아 국방부는 ‘전쟁 2단계’를 선언했다. 그러자 서방 언론은 러군이 키예프 점령에 실패해 패주했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가 승리했다는 말이다. 이 우크라이나 대승론은 장기 전쟁의 모멘텀이다. 이로써 전장의 실제 상황과 분리 자립된 상상 속의 내러티브 전쟁이 시작되었다. 관념 속, 머릿속 새로운 전장이 만들어진 것이다.&amp;#038;nbsp;---「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탈산업화 시대의 물량전첫째, 미국의 연간 포탄 생산량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잘해야 10일에서 2주를 버틸 수 있다. 둘째, 러시아는 지금까지 1100발에서 2100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은 연간 110발의 프리즘PRISM, 500발의 재즘JASSM, 60발의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구매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러시아가 고작 3개월 만에 미국이 한 해에 생산하는 미사일의 네 배를 태워버렸다는 뜻이다. 버시닌 중령은 미국의 포탄 재고로는 우크라이나전쟁을 10~14일 정도만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이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군이 참여한 최근의 워게임에서 영국군은 확전 8일 만에 비축한 포탄을 다 써버렸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 버시닌은 서방은 대규모 전쟁을 치를 만한 산업 역량이 없다고 추론한다. 두 강대국의 장기전에서 승패는 어느 쪽의 제조업 기반이 더 튼튼한지에 달렸다. 국가는 미래 전쟁에서 대량의 탄약을 제조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갖추고 유사시 무기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산업 설비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서방은 둘 다 없다는 것이다.---「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경제전쟁으로서 대러 제재: EU의 자해인가, 러시아의 고립인가?“대러시아 경제 제재가 러시아를 굴복시킬 거라고 오판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사실은 그 반대다. 러시아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수입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면 러시아의 수출은 서방의 경제 후생에 결정적이다. 러시아가 밀, 탄산칼륨, 가스, 석유, 팔라듐, 제련 니켈, 그 밖의 핵심 광물을 서방에 공급하지 않는다면 유럽과 미국의 경제는 유린당할 것이다. 러시아를 제재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역할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amp;#038;nbsp;---「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프레스티튜트와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언론(정보)전쟁마이클 허드슨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인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반전을 말하며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보도하는 매체는 놀랍게도 공화당 우파인 폭스뉴스이다. 오직 이 채널만 러시아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제대로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사태를 우리의 관점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볼 것인지 정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미국에서 우크라이나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은 공화당과 우파이다. 좌파는 찬성 일색이다. 좌파가 집권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지만, 사태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 한 사람도 없다.” 지금 이 전쟁은 네오콘 전쟁이다. 아니 더 정확히 리버럴 혹은 진보네오콘의 대리전쟁이다.&amp;#038;nbsp;---「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미국의 대전략: 글로벌 나토와 동맹 궁핍화조약의 이름은 ‘북대서양’으로 한정되는데 신전략 개념은 슬그머니 ‘유럽과 대서양 지역’으로 확장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의 “체제 변경 도전systemic challenges” 위협을 강조한다. 더군다나 중러 양국의 전략적 협력 강화로 인해?입만 열면 등장하는?‘규칙 기반 국제 질서’가 위험에 처했다고 한다. 이제 이번 신전략을 나토판 ‘신냉전’ 선언이라 할 만하다. 나토는 좁은 유럽을 벗어나 글로벌 군사동맹을 선언한 셈이다. 인구로 보면 서구 대 비서구는 각각 12퍼센트와 88퍼센트를 차지한다. 서구와 브릭스의 인구는 각각 7억 8000만 명과 32억 명이다.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고, 경제력은 아직 전자가 크지만 10년 안에 뒤집힐 것이다. 브릭스의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가운데 이란과 아르헨티나에 이어 인도네시아와 이집트도 가입을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세계는 서방(한국 포함) 대 브릭스와 글로벌 사우스로 블록화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상당수의 국가는 둘 사이의 완충지대에 남으려 할 것이다. 양대 블록의 관계가 안정될 때까지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이것은 또한 리버럴과 콜로니얼 대 포스트리버럴과 포스트콜로니얼 블록 사이의 분계다.&amp;#038;nbsp;---「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중에서정의로운 신세계질서?정치군사적 차원에서는 미국과 나토 블록의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개입주의를 억지하는 모멘텀을 찾게 될 것이다. 시리아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이 일례가 될 수 있다. 중국 또한 핵심 이익 영역에 군사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양극 지경학은 미국의 군사비를 압박하고, 이로 인해 미국은 부단히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미국의 고삐 풀린 과잉 팽창을 냉각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을 머지않아 중국과 러시아가 군사력을 해외 투사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완전한 다극 체제가 완성될 것인지는 전망하기 어렵지만, 일단 그 경과단계로 양극과 다극이 혼성하는 체제는 충분히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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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이 책은 2022년 2월에 시작된 이상한 전쟁, ‘우크라이나전쟁’의 원인, 경과 그리고 해법을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는 “푸틴 치매설” “러시아군 키예프 대패설” 등 이 전쟁에 대해서는 한쪽(이른바 서방 1세계)으로 치우친 해석/보도에 관하여 “과연 사실이 그러한가?”라고 질문한다.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전쟁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브레히트의 연극처럼 이 전쟁을 바라보는 독자의 관점을 낯선 방향으로 뒤집고, 이 전쟁의 드러나지 않은 혹은 의도적으로 가려진 국면으로 독자를 잡아당긴다.<br /><br />지은이는 전쟁과 평화는 천당과 지옥처럼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절대로 이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의 해석이라고 말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니라 상호의 이익과 전략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들리지 않던 우크라이나전쟁의 다른 국면을 가리킨다. 전쟁이 정치라는 선으로 평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전쟁의 해석을 통해 해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바로 그 순간 평화를 상상하고 실행할 교두보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 지정학적 변화를 인식하고 미래로 나아갈 교두보를 찾고자 한다. 나아가 그로부터 이어질 미래 한국의 삶을 상상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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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81809_lywzkpbc.jpg" alt="이해영 - 우크라이나.jpg" style="width: 490px; height: 800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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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목차</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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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머리말<br /><br />1장. 들어가며<br /><br />정답 없는 전쟁을 바라보며<br />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1<br />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2<br />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3<br /><br />2장. 전쟁의 성격과 원인<br /><br />1 대리전쟁으로서의 우크라이나전쟁<br />─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실존 위협론’<br />─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대응<br />─우크라이나전쟁은 제2의 아프가니스탄전쟁인가?<br />2 ‘내전의 계속’으로서 우크라이나전쟁<br />─2014년 마이단: 존엄혁명 아니면 ‘뻔뻔한 쿠데타’<br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br />3 루소포비아의 정치학<br /><br />3장. 2022년 전쟁의 전개<br /><br />1 전쟁은 언제 시작되었나?<br />2 전쟁의 1단계: 러시아의 패배인가 거대한 기만인가?<br />3 전쟁 2단계의 전개와 특성<br />─전쟁의 전개 양상: 작전과 전투<br />─아조프연대와 마리우폴 전투<br />─탈산업화 시대의 물량전<br />4 하이브리드전쟁<br />─경제전쟁으로서 대러 제재: EU의 자해인가 러시아의 고립인가?<br />─프레스티튜트와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언론(정보)전쟁<br />5 전쟁의 3단계: 돈바스를 넘어 노보로시야?<br /><br />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br /><br />1 지정학적 대전환과 신냉전: 단극에서 다극으로<br />─다극 체제로의 평화적 이행은 가능한가?: 지정학의 귀환과 중러 전략협력 체제<br />─미국의 대전략: 글로벌 나토와 동맹 궁핍화<br />─다극 체제와 글로벌사우스<br />2 달러 헤게모니의 위기: 새로운 준비통화의 출현<br />3 산업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 글로벌 경제의 종말?<br />4 정의로운 신세계질서?<br /><br />5장. 한국의 ‘지정치경제적’ 대위기?<br /><br />1 한국의 지정학적 정체성과 오리엔탈리즘<br />2 한국의 대전략: 다극 체제와 포스트 한반도평화프로세스<br /><br />6장. 클라우제비츠와 함께 칸트로?<br /><br />주<br />참고문헌<br />찾아보기</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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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책 속으로</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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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대리전쟁으로서의 우크라이나전쟁</b><br />개전 초기부터 나는 이 전쟁은 고전적 전면전(적지, 적 영토의 점령을 동반한 적의 완전 섬멸과 무장 해제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한 제한전limited war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 정치적 목표에 과연 우크라이나 전역의 군사적 점령과 이후의 정권 교체까지 포함되는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푸틴은 개전과 동시에 이 전쟁의 정치적 목표로 ‘돈바스 해방’, ‘나치 제거’, ‘탈군사화’를 제시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펼치고 있는 특수 군사작전은 바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인 셈이다.&nbsp;---「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br /><b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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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81831_wlfpwwpp.jpg" alt="이해영02.JPG" style="width: 400px; height: 597px; float: left; margin-right: 1e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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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대응</b><br />나토 동진, 특히 그 순번이 우크라이나에 왔을 때 이 문제가 얼마나 휘발성이 강해질지 미국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8년 2월 1일자 모스크바발 비밀 전문을 살펴보자.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 국무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나토, 유럽연합 협의기구로 전달된 전문은 “러시아는 나토에 의한 포위와 역내 영향력 축소 시도를 인지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안보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할지도 모르는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되지 않은 결과를 우려하고 있다”고 전한다. (중략) 나토 가입 문제가 장기적으로 미러 관계의 최대 불안 요소이며, 양국을 전형적인 대결 태세로 몰고 갈 수 있다고 보고한다. 즉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초래할 위험에 내전과 영토 분할, 신냉전이 모두 포함되므로 이는 결국 러시아가 개입 여부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고 밝힌다. 즉 이 말을 뒤집으면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개입을 강요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nbsp;---「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br /><br /><b>2014년 마이단: 존엄혁명 아니면 ‘뻔뻔한 쿠데타’</b><br />저항운동의 첫날부터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마이단에 가담했다. 진보, 현대화, 인권 등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세력과 급진 민족주의파의 합류는 시민 저항이 반헌법적 정권 타도로 귀결된 무장 투쟁으로 바뀌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마이단 혁명에서 급진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쿠데타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마이단운동이 형성되었다. 이 근시안적이고 불행한 동맹의 비극적 결과를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다. 젤렌스키는 앞서 약속한 화해 정책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세력 쪽으로 유턴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체 국민 중 소수에 불과한 급진파 정치인, 법원, 경찰관, 미디어 종사자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프로파간디스트들은 “젤렌스키는 유대인이라서 나치가 될 수 없다”라고 되풀이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어젠다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우크라이나의 정치 과정을 통제하는 이들이 바로 급진 세력이라는 것이 진실이다.&nbsp;---「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br /><br /><b>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b><br />2014년 이른바 유로마이단 운동은 네오나치의 공간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미국이 있었다. 특히 나토 대사를 지냈고 현재 국무부 차관인 빅토리아 눌런드가 핵심 고리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 무장 나치들은 지리멸렬한 우크라이나 군경을 대신해 사실상 미국이 조직한 국립 경찰을 장악했고 국방군에도 정식 편입된 상태다. 조선의 해방 직후를 생각하면 된다. 미국은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이유로, 또한 우크라이나의 민주화를 지원한다는 구실로 인종주의,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나치 집단의 뒷배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어떻게 네오나치가 국회의장이 될 수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nbsp;---「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br /><br /><b>전쟁의 1단계: 러시아의 패배인가 대기만술인가?</b><br />젤렌스키는 한편으로 나토가 우크라이나 가입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해야 나토 가입이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전쟁을 일종의 나토 입장권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4월 러시아 국방부는 ‘전쟁 2단계’를 선언했다. 그러자 서방 언론은 러군이 키예프 점령에 실패해 패주했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가 승리했다는 말이다. 이 우크라이나 대승론은 장기 전쟁의 모멘텀이다. 이로써 전장의 실제 상황과 분리 자립된 상상 속의 내러티브 전쟁이 시작되었다. 관념 속, 머릿속 새로운 전장이 만들어진 것이다.&nbsp;---「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br /><br /><b>탈산업화 시대의 물량전</b><br />첫째, 미국의 연간 포탄 생산량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잘해야 10일에서 2주를 버틸 수 있다. 둘째, 러시아는 지금까지 1100발에서 2100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은 연간 110발의 프리즘PRISM, 500발의 재즘JASSM, 60발의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구매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러시아가 고작 3개월 만에 미국이 한 해에 생산하는 미사일의 네 배를 태워버렸다는 뜻이다. 버시닌 중령은 미국의 포탄 재고로는 우크라이나전쟁을 10~14일 정도만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이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군이 참여한 최근의 워게임에서 영국군은 확전 8일 만에 비축한 포탄을 다 써버렸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 버시닌은 서방은 대규모 전쟁을 치를 만한 산업 역량이 없다고 추론한다. 두 강대국의 장기전에서 승패는 어느 쪽의 제조업 기반이 더 튼튼한지에 달렸다. 국가는 미래 전쟁에서 대량의 탄약을 제조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갖추고 유사시 무기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산업 설비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서방은 둘 다 없다는 것이다.<br />---「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br /><br /><b>경제전쟁으로서 대러 제재: EU의 자해인가, 러시아의 고립인가?</b><br />“대러시아 경제 제재가 러시아를 굴복시킬 거라고 오판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사실은 그 반대다. 러시아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수입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면 러시아의 수출은 서방의 경제 후생에 결정적이다. 러시아가 밀, 탄산칼륨, 가스, 석유, 팔라듐, 제련 니켈, 그 밖의 핵심 광물을 서방에 공급하지 않는다면 유럽과 미국의 경제는 유린당할 것이다. 러시아를 제재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역할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nbsp;---「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br /><br /><b>프레스티튜트와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언론(정보)전쟁</b><br />마이클 허드슨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인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반전을 말하며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보도하는 매체는 놀랍게도 공화당 우파인 폭스뉴스이다. 오직 이 채널만 러시아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제대로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사태를 우리의 관점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볼 것인지 정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미국에서 우크라이나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은 공화당과 우파이다. 좌파는 찬성 일색이다. 좌파가 집권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지만, 사태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 한 사람도 없다.” 지금 이 전쟁은 네오콘 전쟁이다. 아니 더 정확히 리버럴 혹은 진보네오콘의 대리전쟁이다.&nbsp;---「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br /><br /><b>미국의 대전략: 글로벌 나토와 동맹 궁핍화</b><br />조약의 이름은 ‘북대서양’으로 한정되는데 신전략 개념은 슬그머니 ‘유럽과 대서양 지역’으로 확장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의 “체제 변경 도전systemic challenges” 위협을 강조한다. 더군다나 중러 양국의 전략적 협력 강화로 인해?입만 열면 등장하는?‘규칙 기반 국제 질서’가 위험에 처했다고 한다. 이제 이번 신전략을 나토판 ‘신냉전’ 선언이라 할 만하다. 나토는 좁은 유럽을 벗어나 글로벌 군사동맹을 선언한 셈이다. 인구로 보면 서구 대 비서구는 각각 12퍼센트와 88퍼센트를 차지한다. 서구와 브릭스의 인구는 각각 7억 8000만 명과 32억 명이다.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고, 경제력은 아직 전자가 크지만 10년 안에 뒤집힐 것이다. 브릭스의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가운데 이란과 아르헨티나에 이어 인도네시아와 이집트도 가입을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세계는 서방(한국 포함) 대 브릭스와 글로벌 사우스로 블록화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상당수의 국가는 둘 사이의 완충지대에 남으려 할 것이다. 양대 블록의 관계가 안정될 때까지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이것은 또한 리버럴과 콜로니얼 대 포스트리버럴과 포스트콜로니얼 블록 사이의 분계다.&nbsp;---「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중에서<br /><br /><b>정의로운 신세계질서?</b><br />정치군사적 차원에서는 미국과 나토 블록의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개입주의를 억지하는 모멘텀을 찾게 될 것이다. 시리아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이 일례가 될 수 있다. 중국 또한 핵심 이익 영역에 군사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양극 지경학은 미국의 군사비를 압박하고, 이로 인해 미국은 부단히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미국의 고삐 풀린 과잉 팽창을 냉각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을 머지않아 중국과 러시아가 군사력을 해외 투사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완전한 다극 체제가 완성될 것인지는 전망하기 어렵지만, 일단 그 경과단계로 양극과 다극이 혼성하는 체제는 충분히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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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20:16:10+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4-07-21T18:18:43+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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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북리뷰] 친일의 오늘 - 안익태애국가와 트로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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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안익태 〈애국가〉는 표절곡인가? 그리고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각은 역사적 사실인가? 이 책의 대답은 분명코 그렇다이다. 우리 민족의 국가적 정체성이 반일 독립투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생각할 때 친일 작곡가의 곡을 국가를 대표하는 의식에 사용하는 것은 분명 코미디다. 게다가 그 곡이 외국곡을 거의 그대로 표절한 곡이라니 이건 국가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안익태 〈애국가〉는 해방 직후부터 숱한 논란을 야기해왔으며 보수, 진보를 망라해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애국가〉가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표절곡이라는 데 대한 동의를 넘어 분개하는 마음이 저절로 솟구칠 것이다. 전체 16마디 중 무려 12마디의 선율이 거의 그대로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보다 음악적 분석을 통해 표절론에 종지부를 찍고 있는 점이다.한편 최근의 ‘트로트 열풍’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문화생활이야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트로트 바람을 타고 돌연 ‘한국 고유양식’론까지 대두하는 판이다. 하지만 트로트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일본 대중음악인 쇼와가요에 가닿게 된다. 쇼와가요, 곧 엔카와 트로트의 음악적 비교 분석을 통해 그 뿌리가 결국 하나이고, 트로트가 식민 지배라는 구조 속에서 이식 강제된 음악양식임을 실증적으로 밝혀내고 있는 점에 이 책의 또 다른 가치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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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는 말안익태 〈애국가〉와 국가상징 __이해영표절곡을 언제까지 ‘애국가’로 부를 것인가 __김정희음악문화의 가치 선택 __신현국트로트의 음악적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__박영금엔카와 트로트, 그 탄생과 음악적 연관성 __강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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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트로트 열풍’이 거세다. 돌연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등장하였다. 트로트 바람을 타고 ‘한국 고유양식’론까지 대두하는 판이다. 하지만 그것이 포스트 민주화 시대, 그리고 팬데믹 시대의 ‘퇴행적’ 감수성이라는 점에서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친일’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가닿기 때문이다.이 책은 친일의 오늘을 상징하는 문화사적 사건으로 에키타이 안(안익태)의 〈애국가〉와 트로트 두 가지를 소환한다. 앞의 것이 과거의 친일을 상징하는 그렇지만 우리의 음악적 공생활을 강제하는 이벤트라면, 뒤의 것은 현재의 은폐된 친일의 대표 일상이다.이해영은 국가상징으로서 안익태 〈애국가〉의 적격성을 역사정의의 관점에서 묻고 있다. ‘애국가’를 통해 ‘애국’이라는 기본가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정언명법이다. 하지만 안익태는 친일과 일제 동맹국 독일을 위한 친나치 부역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비애국적’ 애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용모순이다.작곡가이자 한국음악학자인 김정희는 음악 분석을 통해 안익태 〈애국가〉의 표절성을 고발하고 있다. 〈애국가〉가 표절곡이라니, 그것도 다른 나라의 곡을 표절한 노래라니,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안익태 〈애국가〉는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표절곡이다. 선율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총 16마디 중 12마디의 선율이 유사하고, 〈애국가〉의 출현음 총 57개 중 맥락과 음정이 일치하는 음은 모두 33개로, 일치도가 58%이다. 변주된 음까지 포함하면 그 개수는 41개, 유사도는 72%로 높아진다. 음악 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안익태 〈애국가〉 표절의 실상을 해부한 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박영금은 일본과 한국의 전통음악, 그리고 트로트의 음악 요소를 세밀히 비교함으로써 트로트의 음악적 뿌리가 일본 쇼와가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더 이상 트로트가 ‘한국 고유의 음악양식’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일본근대 음악사를 연구해온 강태구는 엔카로 통칭되는 일본 대중음악 탄생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엔카와 트로트가 어떻게 음악적 골격을 공유하게 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결국 ‘음악의 근대화’라는 문화사적 맥락과,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엔카, 즉 쇼와가요와 트로트는 필연적으로 그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물론 현재 음악적 장르로서의 엔카와 트로트는 한일 양국의 문화풍토 속에서 각자 독자적으로 변용 발전해왔기에 하나의 장르로 묶어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트로트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한국 대중음악의 한 갈래로 자리했다고 해서 그 음악적 뿌리가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올바른 일본문화 수용을 위해서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필요가 있다.결론적으로 이 책은 안익태 〈애국가〉와 트로트라는 두 개의 사건을 통해 친일의 오늘을 보고 있다. 이 두 가지가 오늘의 친일을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문화적 토대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론이 배제된 채 국가 의식과 학교행사 등에서 법정 국가(國歌)의 지위에 있지도 않거니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안익태 〈애국가〉 부르기가 강요되고 친일음악인의 노래가 울려 퍼지니 어찌 친일사상이 우리의 의식을 좀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래서 해방 직후부터 안익태 〈애국가〉를 폐기하고 법적 지위를 갖는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꾸준히 제기되었던 것이다. 더 이상 ‘친일’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살기 위해서도 제대로 된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 이 책은 그 같은 노력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國歌)만들기시민모임’이 일군 공동작업의 결실이다.
   
   ■저자소개 - 이해영
   1962년 마산에서 나고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당시로선 서독) 마부룩(Marburg) 대학교에서 철학박사(Dr.Phil.)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을 거쳐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지금에 이른다. 이 대학에서 국제평화인권대학원 원장을 맡은 적이 있고, 그 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투기자본감시센터, 참여연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KNCC, 국제통상연구소등 다수의 시민단체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해 왔다. 산업통상부, 몇 개의 국회상임위, 국회입법조사처 등에서도 오랫동안 자문을 한 바 있다. 21세기정치학회 이사를 했고, 한국안보통상학회, 국제지역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박사학위 논문으로 『그람시와 하버마스: 시민사회, 생활세계 그리고 정치』 (독문, 1994)를 상재했고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2000), 『낯선 식민지, 한미 FTA』(2006)를 저술했다. 이 밖의 공저로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2008), 편저로 『1980년대: 혁명의 시대』(1999), 『한미FTA 국민보고서』 (2006), 『한미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2007)가 있다. 논문으로 「칼 슈미트의 정치사상: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2004) (『21세기 정치학회보』 14(2)호), 「역사문제와 ‘동맹의 논리’: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중심으로」(2016) (『씨알의 소리』 2016년, 11·12호) 등 다수가 있다. 주된 연구 영역은 서양정치사상과 국제정치경제다. 대학에선 마키아벨리, 그람시, 슈미트, 하버마스 등을 강의한다. 국제관계에서는 국제통상을 주되게 하면서 한미관계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지정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자소개 - 김정희
   김정희는 음악학 박사이다. 작곡가, 한국음악학자. 부산예술대학 음악과,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전문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박사 졸업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를 지냈다.MBC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민요전문방송작가(2011년 5월~2013년 8월) 역임, 국악관현악 〈홍애기〉, 실내악 〈풍구타령〉, 서도피리산조 〈아용소리〉, 무반주남성중창곡 〈가거도 뱃노래〉, 무반주혼성중창곡 〈시선뱃노래〉 등을 작곡했다. 논문에 「평안도민요의 음조직 연구」, 「향토민요에 나타난 전조유형 연구」, 「민요의 시김새 유형에 관한 일고찰」, 「토속민요 음조직의 변이 양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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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안익태 〈애국가〉는 표절곡인가? 그리고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각은 역사적 사실인가? 이 책의 대답은 분명코 그렇다이다. 우리 민족의 국가적 정체성이 반일 독립투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생각할 때 친일 작곡가의 곡을 국가를 대표하는 의식에 사용하는 것은 분명 코미디다. 게다가 그 곡이 외국곡을 거의 그대로 표절한 곡이라니 이건 국가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안익태 〈애국가〉는 해방 직후부터 숱한 논란을 야기해왔으며 보수, 진보를 망라해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애국가〉가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표절곡이라는 데 대한 동의를 넘어 분개하는 마음이 저절로 솟구칠 것이다. 전체 16마디 중 무려 12마디의 선율이 거의 그대로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보다 음악적 분석을 통해 표절론에 종지부를 찍고 있는 점이다.<br /><br />한편 최근의 ‘트로트 열풍’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문화생활이야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트로트 바람을 타고 돌연 ‘한국 고유양식’론까지 대두하는 판이다. 하지만 트로트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일본 대중음악인 쇼와가요에 가닿게 된다. 쇼와가요, 곧 엔카와 트로트의 음악적 비교 분석을 통해 그 뿌리가 결국 하나이고, 트로트가 식민 지배라는 구조 속에서 이식 강제된 음악양식임을 실증적으로 밝혀내고 있는 점에 이 책의 또 다른 가치가 빛난다.</p>
<p>&nbsp;</p>
<p>■목차</p>
<p>들어가는 말<br />안익태 〈애국가〉와 국가상징 __이해영<br />표절곡을 언제까지 ‘애국가’로 부를 것인가 __김정희<br />음악문화의 가치 선택 __신현국<br />트로트의 음악적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__박영금<br />엔카와 트로트, 그 탄생과 음악적 연관성 __강태구</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201415_fxwqzepy.jpg" alt="친일의 오늘.jpg" style="width: 566px; height: 800px;" /></p>
<p>&nbsp;</p>
<div>■출판사 리뷰</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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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트로트 열풍’이 거세다. 돌연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등장하였다. 트로트 바람을 타고 ‘한국 고유양식’론까지 대두하는 판이다. 하지만 그것이 포스트 민주화 시대, 그리고 팬데믹 시대의 ‘퇴행적’ 감수성이라는 점에서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친일’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가닿기 때문이다.<br /><br />이 책은 친일의 오늘을 상징하는 문화사적 사건으로 에키타이 안(안익태)의 〈애국가〉와 트로트 두 가지를 소환한다. 앞의 것이 과거의 친일을 상징하는 그렇지만 우리의 음악적 공생활을 강제하는 이벤트라면, 뒤의 것은 현재의 은폐된 친일의 대표 일상이다.<br /><br />이해영은 국가상징으로서 안익태 〈애국가〉의 적격성을 역사정의의 관점에서 묻고 있다. ‘애국가’를 통해 ‘애국’이라는 기본가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정언명법이다. 하지만 안익태는 친일과 일제 동맹국 독일을 위한 친나치 부역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비애국적’ 애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용모순이다.<br /><br />작곡가이자 한국음악학자인 김정희는 음악 분석을 통해 안익태 〈애국가〉의 표절성을 고발하고 있다. 〈애국가〉가 표절곡이라니, 그것도 다른 나라의 곡을 표절한 노래라니,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안익태 〈애국가〉는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표절곡이다. 선율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총 16마디 중 12마디의 선율이 유사하고, 〈애국가〉의 출현음 총 57개 중 맥락과 음정이 일치하는 음은 모두 33개로, 일치도가 58%이다. 변주된 음까지 포함하면 그 개수는 41개, 유사도는 72%로 높아진다. 음악 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안익태 〈애국가〉 표절의 실상을 해부한 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br /><br />박영금은 일본과 한국의 전통음악, 그리고 트로트의 음악 요소를 세밀히 비교함으로써 트로트의 음악적 뿌리가 일본 쇼와가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더 이상 트로트가 ‘한국 고유의 음악양식’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br /><br />일본근대 음악사를 연구해온 강태구는 엔카로 통칭되는 일본 대중음악 탄생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엔카와 트로트가 어떻게 음악적 골격을 공유하게 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결국 ‘음악의 근대화’라는 문화사적 맥락과,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엔카, 즉 쇼와가요와 트로트는 필연적으로 그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br /><br />물론 현재 음악적 장르로서의 엔카와 트로트는 한일 양국의 문화풍토 속에서 각자 독자적으로 변용 발전해왔기에 하나의 장르로 묶어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트로트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한국 대중음악의 한 갈래로 자리했다고 해서 그 음악적 뿌리가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올바른 일본문화 수용을 위해서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필요가 있다.<br /><br />결론적으로 이 책은 안익태 〈애국가〉와 트로트라는 두 개의 사건을 통해 친일의 오늘을 보고 있다. 이 두 가지가 오늘의 친일을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문화적 토대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론이 배제된 채 국가 의식과 학교행사 등에서 법정 국가(國歌)의 지위에 있지도 않거니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안익태 〈애국가〉 부르기가 강요되고 친일음악인의 노래가 울려 퍼지니 어찌 친일사상이 우리의 의식을 좀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br /><br />그래서 해방 직후부터 안익태 〈애국가〉를 폐기하고 법적 지위를 갖는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꾸준히 제기되었던 것이다. 더 이상 ‘친일’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살기 위해서도 제대로 된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 이 책은 그 같은 노력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國歌)만들기시민모임’이 일군 공동작업의 결실이다.</div>
   <div><br /></div>
   <div>■저자소개 - 이해영</div>
   <div>1962년 마산에서 나고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당시로선 서독) 마부룩(Marburg) 대학교에서 철학박사(Dr.Phil.)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을 거쳐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지금에 이른다. 이 대학에서 국제평화인권대학원 원장을 맡은 적이 있고, 그 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투기자본감시센터, 참여연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KNCC, 국제통상연구소등 다수의 시민단체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해 왔다. 산업통상부, 몇 개의 국회상임위, 국회입법조사처 등에서도 오랫동안 자문을 한 바 있다. 21세기정치학회 이사를 했고, 한국안보통상학회, 국제지역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br /><br />박사학위 논문으로 『그람시와 하버마스: 시민사회, 생활세계 그리고 정치』 (독문, 1994)를 상재했고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2000), 『낯선 식민지, 한미 FTA』(2006)를 저술했다. 이 밖의 공저로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2008), 편저로 『1980년대: 혁명의 시대』(1999), 『한미FTA 국민보고서』 (2006), 『한미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2007)가 있다. 논문으로 「칼 슈미트의 정치사상: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2004) (『21세기 정치학회보』 14(2)호), 「역사문제와 ‘동맹의 논리’: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중심으로」(2016) (『씨알의 소리』 2016년, 11·12호) 등 다수가 있다. 주된 연구 영역은 서양정치사상과 국제정치경제다. 대학에선 마키아벨리, 그람시, 슈미트, 하버마스 등을 강의한다. 국제관계에서는 국제통상을 주되게 하면서 한미관계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지정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div>
   <div><br /></div>
   <div>■저자소개 - 김정희</div>
   <div>김정희는 음악학 박사이다. 작곡가, 한국음악학자. 부산예술대학 음악과,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전문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박사 졸업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를 지냈다.<br /><br />MBC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민요전문방송작가(2011년 5월~2013년 8월) 역임, 국악관현악 〈홍애기〉, 실내악 〈풍구타령〉, 서도피리산조 〈아용소리〉, 무반주남성중창곡 〈가거도 뱃노래〉, 무반주혼성중창곡 〈시선뱃노래〉 등을 작곡했다. 논문에 「평안도민요의 음조직 연구」, 「향토민요에 나타난 전조유형 연구」, 「민요의 시김새 유형에 관한 일고찰」, 「토속민요 음조직의 변이 양상」 등이 있다.</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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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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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에키타이안, 알프레드 코르토 그리고 프랑스 비시부역정부 일영사의 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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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summary>1944년 히틀러생일주간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페스티벌에 에키타이안이 알프레도 코르토와 협연했다. 공연뒤 프랑스 비시부역정부 일본 영사의 딸에게 코르토가 사인을 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 사진이 게재된 프랑스 일간지 사주는 파리수복후 즉각 체포되고, 신문은 폐간되었다.</atom:summary>
<description><![CDATA[
   &amp;#038;nbsp;1944년 히틀러생일주간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페스티벌에 에키타이안이 알프레도 코르토와 협연했다. 공연뒤 프랑스 비시부역정부 일본 영사의 딸에게 코르토가 사인을 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 사진이 게재된 프랑스 일간지 사주는 파리수복후 즉각 체포되고, 신문은 폐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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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01115942_bdqdhogo.jpg" alt="에키타이, 알프레드 코드토, 불 비시부역정부 일본영사의 딸.jpg" style="width: 316px; height: 503px; float: left; margin-right: 1em;" />
   <p style="text-align: left;">&nbsp;1944년 히틀러생일주간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페스티벌에 에키타이안이 알프레도 코르토와 협연했다. 공연뒤 프랑스 비시부역정부 일본 영사의 딸에게 코르토가 사인을 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 사진이 게재된 프랑스 일간지 사주는 파리수복후 즉각 체포되고, 신문은 폐간되었다.</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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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category label="안익태 애국가|왜 문제인가?|친일 친나치 밀착" term="20240721144936_0879|20240721145302_7788|20240721145407_5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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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스페인 사가로S'Agaro, 1944년 바르셀로나로 가던 에키타이는 여기서 한 달 정도 체류한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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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01115649_ivvmoluh.jpg" alt="스페인 사가로S'Agaro 2020년대(이해영 찰영).jpg" style="width: 875px; height: 493px;"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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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category label="안익태 애국가|왜 문제인가?|친일 친나치 밀착" term="20240721144936_0879|20240721145302_7788|20240721145407_5292"/>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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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에키타이안 과 스페인 바르셀로나 방송국 1944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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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01100154_wlwdvote.jpg" alt="라디오바르셀로나1.jpg" style="width: 595px; height: 842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01100220_acklfmky.jpg" alt="라디오바르셀로나2.jpg" style="width: 595px; height: 842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01100241_cmnotsfo.jpg" alt="라디오바르셀로나3.jpg" style="width: 799px; height: 657px;"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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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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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이해영의 구이 보노] "에하라와 에키타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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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amp;#038;nbsp;도쿄생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ㆍ1896~1969)와 평양생 에키타이 안(한국명 안익태ㆍ1906~1965).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근대 이후 한일 관계사의 가장 괴이하고, 희비극적인 한 대목일지 모른다.
         
      
         
            
               
            
            꽤 오랫동안 에키타이의 행적을 추적해 온 나는 최근 3건의 원본 문서들과 한 건의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미 CIA 문서고에서 기밀 해제된 것들이다. 문서 중 하나는 전쟁 중인 1944년 4월 18일자 ‘터키에서의 일본 첩보·선전활동’에 관한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1945년 1월 30일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일본 첩보활동’에 대한 보고서다. 전자는 미 전략첩보국(OSS) 이스탄불지부가, 후자는 영국 정보원이 생산한 것이다. 세 번째 문서는 종전 이후인 1949년 11월 18일자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이 미 합참 정보국장에게 보낸 ‘전시 독일의 외교·군사 정보활동’이라는 보고서다. 그리 보면 마지막 보고서가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셈이다. 전시 일본의 재유럽 첩보활동의 본부는 베를린에 있었다. 2차 대전 직후 일본은 처음에는 ‘간첩활동의 수도’라 불리던 포르투갈 리스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태평양전쟁이 확전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위협하게 되자 마찬가지 중립국인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한다. 하지만 터키마저 연합국으로 기울자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미·영 첩보전의 기지로 활용했다. 일본 첩보활동의 동선을 미국은 매우 촘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나라의 첩보 라인이 이렇게 ‘탈탈 털리는’ 경우는 드물다. 오직 패전이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에하라의 회고에 따르면 에키타이안은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까지 자신의 베를린 사저에 기거했다고 했다. 안익태가 나치 독일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에 기재한 주소지가 바로 이 사저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amp;#038;nbsp;
            
               
                  
                     
                        
                           &amp;#038;nbsp;
                           
                     
                  
               
            
            나와는 다른 시기에 또 다른 이유로 에하라 고이치를 추적한 학자가 있다. 북텍사스대학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학 교수 팀 잭슨이다. 잭슨 교수는 에하라가 하얼빈 소재 731부대의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와 연루돼 있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1938년 에하라가 독일로 건너간 뒤 731부대의 생체실험 정보를 독일과 공유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우슈비츠 등에서의 생체실험과 731부대의 그것은 에하라를 고리로 해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말이다. 잭슨 교수와 서로 자료를 공유해 온 내 쪽에서도 확인해 본 결과 에하라는 1935~1937년 하얼빈의 총무처장으로 있다가 1937년 7월 1일자로 하얼빈 부시장으로 승진한 뒤 1년 뒤 베를린 주재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파견됐다. 731부대가 일왕 히로히토의 칙령에 의해 본격적으로 하얼빈으로 확장 이전된 때가 1936년이다. 만주국의 직제는 이른바 일만정위(日滿定位) 원칙 곧 일계(日係)와 만계의 직위가 정해져 있었다. 일본의 괴뢰국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장, 시장이나 공사 등은 만계에 할당하고 그 아래에 일계를 배치했는데 실세는 당연히 일계였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총무청(처) 중심주의를 기본으로 해서 인사ㆍ재정, 특히 모든 기밀업무를 총무(청)처장이 관장했고, 그 배후에는 관동군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에하라가 하얼빈 시절 직간접적으로 731부대와 연관됐을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다.
            
               
            
            위에서 말한 1949년 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는 “재독 일본 첩보망의 총책”이었다. 이 진술은 페터 바이라우흐 나치 독일의 SS 해외첩보부(SD) 소련·일본국장에게서 나온 것이다. 독일과 소련은 군사동맹이었지만, 1943년 8월 이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상호 첩보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에하라는 1945년 1월의 영국 첩보부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당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핀란드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등록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1949년 보고서만큼 정확한 정보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 첩보원은 그가 일본과 러시아 간 협상을 담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OSS 이스탄불지부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베를린에서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약 300명의 정보망을 운용하고 있었다.
            
               
            
            에하라 고이치는 외교관이라는 합법적 신분으로 위장한 ‘화이트’였다. 그의 집에 주소지를 둔 에키타이 안은 추축국과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나치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음악으로 응원했다. 에키타이 안이 안익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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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div>
         <div class="cheditor-caption-wrapper" style="float: left; margin-right: 1em;">
            <figure class="cheditor-caption" style="border: 0px solid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fffff; margin: 0px; text-align: left; display: inline-block; width: 4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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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gcaption class="cheditor-caption-text" style="margin: 10px 0px 10px 0px;color:#999; text-align: left; line-height: 18px; font-size: 12px; letter-spacing: -0.04em; text-align:justify;">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figcaption>
            </figure>
         </div>
         <p>&nbsp;도쿄생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ㆍ1896~1969)와 평양생 에키타이 안(한국명 안익태ㆍ1906~1965).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근대 이후 한일 관계사의 가장 괴이하고, 희비극적인 한 대목일지 모른다.</p>
         </div>
      <div>
         <div>
            <p>
               <br />
            </p>
            <p>꽤 오랫동안 에키타이의 행적을 추적해 온 나는 최근 3건의 원본 문서들과 한 건의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미 CIA 문서고에서 기밀 해제된 것들이다. 문서 중 하나는 전쟁 중인 1944년 4월 18일자 ‘터키에서의 일본 첩보·선전활동’에 관한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1945년 1월 30일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일본 첩보활동’에 대한 보고서다. 전자는 미 전략첩보국(OSS) 이스탄불지부가, 후자는 영국 정보원이 생산한 것이다. 세 번째 문서는 종전 이후인 1949년 11월 18일자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이 미 합참 정보국장에게 보낸 ‘전시 독일의 외교·군사 정보활동’이라는 보고서다. 그리 보면 마지막 보고서가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셈이다. 전시 일본의 재유럽 첩보활동의 본부는 베를린에 있었다. 2차 대전 직후 일본은 처음에는 ‘간첩활동의 수도’라 불리던 포르투갈 리스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태평양전쟁이 확전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위협하게 되자 마찬가지 중립국인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한다. 하지만 터키마저 연합국으로 기울자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미·영 첩보전의 기지로 활용했다. 일본 첩보활동의 동선을 미국은 매우 촘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나라의 첩보 라인이 이렇게 ‘탈탈 털리는’ 경우는 드물다. 오직 패전이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p>
            <p>
               <br />
            </p>
            <p>에하라의 회고에 따르면 에키타이안은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까지 자신의 베를린 사저에 기거했다고 했다. 안익태가 나치 독일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에 기재한 주소지가 바로 이 사저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nbsp;</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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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p>나와는 다른 시기에 또 다른 이유로 에하라 고이치를 추적한 학자가 있다. 북텍사스대학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학 교수 팀 잭슨이다. 잭슨 교수는 에하라가 하얼빈 소재 731부대의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와 연루돼 있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1938년 에하라가 독일로 건너간 뒤 731부대의 생체실험 정보를 독일과 공유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우슈비츠 등에서의 생체실험과 731부대의 그것은 에하라를 고리로 해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말이다. 잭슨 교수와 서로 자료를 공유해 온 내 쪽에서도 확인해 본 결과 에하라는 1935~1937년 하얼빈의 총무처장으로 있다가 1937년 7월 1일자로 하얼빈 부시장으로 승진한 뒤 1년 뒤 베를린 주재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파견됐다. 731부대가 일왕 히로히토의 칙령에 의해 본격적으로 하얼빈으로 확장 이전된 때가 1936년이다. 만주국의 직제는 이른바 일만정위(日滿定位) 원칙 곧 일계(日係)와 만계의 직위가 정해져 있었다. 일본의 괴뢰국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장, 시장이나 공사 등은 만계에 할당하고 그 아래에 일계를 배치했는데 실세는 당연히 일계였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총무청(처) 중심주의를 기본으로 해서 인사ㆍ재정, 특히 모든 기밀업무를 총무(청)처장이 관장했고, 그 배후에는 관동군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에하라가 하얼빈 시절 직간접적으로 731부대와 연관됐을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다.</p>
            <p>
               <br />
            </p>
            <p>위에서 말한 1949년 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는 “재독 일본 첩보망의 총책”이었다. 이 진술은 페터 바이라우흐 나치 독일의 SS 해외첩보부(SD) 소련·일본국장에게서 나온 것이다. 독일과 소련은 군사동맹이었지만, 1943년 8월 이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상호 첩보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에하라는 1945년 1월의 영국 첩보부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당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핀란드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등록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1949년 보고서만큼 정확한 정보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 첩보원은 그가 일본과 러시아 간 협상을 담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OSS 이스탄불지부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베를린에서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약 300명의 정보망을 운용하고 있었다.</p>
            <p>
               <br />
            </p>
            <p>에하라 고이치는 외교관이라는 합법적 신분으로 위장한 ‘화이트’였다. 그의 집에 주소지를 둔 에키타이 안은 추축국과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나치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음악으로 응원했다. 에키타이 안이 안익태다.</p>
         </div>
      </div>
   </div>
</div>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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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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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보충-이해영, "안익태의 일제시기 행적 밝혀지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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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안익태의 일제시기 행적 밝혀지다 - 시사IN (sisain.co.kr)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75
&amp;#038;nbs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75" target="_blank">안익태의 일제시기 행적 밝혀지다 - 시사IN (sisain.co.kr)</a></p>
<p>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4575</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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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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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보충-KBS 뉴스-안익태의 ‘애국가’와 ‘만주국’ 그리고 1942년 9월 베를린의 저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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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522351
&amp;#038;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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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a href="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522351" target="_blank">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522351</a></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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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보충-에하라 고이치와 에키타이 안: 졸저 『안익태케이스』 보유(補遺)]]></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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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에하라 고이치와 에키타이 안: 졸저 『안익태케이스』 보유(補遺)
- 이해영 (한신대교수, 대학원장)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에하라 고이치와 에키타이 안: 졸저 『안익태케이스』 보유(補遺)</p>
<p>- 이해영 (한신대교수, 대학원장)</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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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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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고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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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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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406/20240628152750_ioyxxyne.jpg" alt="photo_2024-06-28_15-19-45.jpg" style="width: 799px; height: 657px;"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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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category label="자료실|연구자료" term="20240721145047_8219|20240721145732_1988"/>
<author>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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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보충-베토벤과 안익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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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올 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 해다. 전세계적으로 온갖 행사가 준비되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그의 사거일인 3월 26일에 조차도 아무 일도 없었다.&amp;#038;nbsp;

   

대개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이 그가 죽기 일 년 전인 1826년 작곡된 작품번호 135 곧 현악 4
중주 제16번으로 알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 베토벤 작품번호 136 &amp;#038;lt;영광의 순간&amp;#038;gt;이 있다. 유튜브등에서 정명훈의 좋은 지휘로 쉽게 찾아 들을 수 있다. 이 작품은 1814년 작곡되었다. 그의 교향곡 제8번이 발표된 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은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을까? 베토벤 
자신이 거절한 탓이다.&amp;#038;nbsp;

   

그렇다면 왜? 이 곡은 1814년에 초연되었다. 1814년! 전유럽을 혁명
의 소용돌이로 내 몬 나폴레옹전쟁이 종결되고 메테르니히 반동체제가 자리잡는 비엔나회의, &amp;#039;회의는 춤춘다&amp;#039;로 유명한 이 반나폴레옹 전후처리회의는 그 해 9월 개최되어 다음 해 6월까
지 지리하게 이어지는 데, 그 와중인 1814년 11월 이 곡은 첫무대에 오른다.&amp;#038;nbsp;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등 전승4국의 의도는 자명했다. 타도된 부르봉왕조를 복고
시켜 다시는 혁명운동이 부활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아울러 일체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경향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그래서 삼엄한 경찰국가체제제를 안착시키는 것이었다. 베토벤은 
바로 이 비엔나체제를 찬양하는 곡을 회의기간에 무대에 올린 것이다.&amp;#038;nbsp;

   

한 때 프랑스혁명을 동경, 파리로 이주할 생각조차 했었고 또 &amp;#039;황제&amp;#039; 나폴레옹에 대해 극단적 혐오감을 내비친 급진
공화주의자였던 그가, 제우스라는 기성의 절대권력에 맞선 프로메테우스라는 항의와 저항의 
아이돌을 형상화했던 그가 이제 보수반동체제의 나팔수로 변신한 셈이다.&amp;#038;nbsp;

   

그래서 황제와 합스
부르크왕가를 낯 뜨겁게 찬양하는 그리고 바로 그 &amp;#039;새로운 유럽&amp;#039;의 중심 비엔나의 희망찬 미래를 기리는 곡을 만든 것이다. 우리로 치면 전두환시절 타락한 종교인들의 &amp;#039;조찬기도회&amp;#039;를 연
상하면 이해가 쉽다. 변절도 이런 변절이 없다.&amp;#038;nbsp;

   

&amp;#038;nbsp;
1941년 2월 1일자 &amp;#038;lt;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69호&amp;#038;gt;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대한민국 22년(1940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서 그의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하다.” 
물론 정식 국가로 의결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안익태의 신곡조 애국가는 이렇게 임정의 사용
허가를 얻었다. 같은 해 12월 10일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임정은 &amp;#038;lt;대일선전성명서&amp;#038;gt;를 발표한다.&amp;#038;nbsp;

   

이 선전포고문에서 임정은 ‘축심국’ 곧 일본, 독일, 이태리등 추축국에 ‘전쟁을 선언’하고 
만주국과 남경정부를 절대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그래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할 것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임정이 대일본 선전포고를 발표했던 바로 그 시점전후, 안익태에서 에키타이안으
로 변신한 그는 베를린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집
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까지 약 2년 반을 기식했다.&amp;#038;nbsp;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록과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의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에하라 고이치는 일본 유럽첩보망의 독일 총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정보는 나치 제국안전본부 제6국 해외첩보부산하 극동국장의 재판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amp;#038;nbsp;

   

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 있으면서 에키타이안은 1942년 독일음악계의 거두 리하르트 슈트라
우스의 &amp;#038;lt;황기 2600년 기념 축전곡&amp;#038;gt;을 지휘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18일 중국에서 9.18사변이
라 불리는 즉 만주사변일에 맞추어 &amp;#038;lt;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축전곡&amp;#038;gt;을 작곡해서 지휘했다.&amp;#038;nbsp;

   

나치 선전성이 제작한 이 날의 실황 영상은 마지막 4악장이 독일연방기록원에 남아있는데, 그 중 마지막 40초가량이 편집되어 나치의 전쟁뉴스를 통해 전세계에 방송되었다.&amp;#038;nbsp;

   

에키타이안은 1943년 2월 11일 일본 건국기념일에 비엔나에서 만주국을 다시 지휘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amp;#038;lt;만주국&amp;#038;gt;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amp;#038;lt;합창&amp;#038;gt;을 같이 올리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하지만 
5.16이후인 1962년 자신이 주도한 제1회 국제음악제때 꿈을 이루었다. 물론 &amp;#038;lt;만주국&amp;#038;gt;이 아니
라 &amp;#038;lt;한국환상곡&amp;#038;gt;과 &amp;#038;lt;합창&amp;#038;gt;을 묶어서 말이다. 베토벤은 메테르니히 반동체제를 위해 자신의 공화주의 신념을 훼절했지만 그 작품은 버렸다. 에키타이안은 변절의 도구였던 그 작품을 울궈먹고 또 울궈 먹었다. 그러는 사이 좌건 우건 
우리 모두가 비루해졌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left;">올 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 해다. 전세계적으로 온갖 행사가 준비되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그의 사거일인 3월 26일에 조차도 아무 일도 없었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대개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이 그가 죽기 일 년 전인 1826년 작곡된 작품번호 135 곧 현악 4
중주 제16번으로 알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 베토벤 작품번호 136 &lt;영광의 순간&gt;이 있다. 유튜브등에서 정명훈의 좋은 지휘로 쉽게 찾아 들을 수 있다. 이 작품은 1814년 작곡되었다. 그의 교향곡 제8번이 발표된 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은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을까? 베토벤 
자신이 거절한 탓이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그렇다면 왜? 이 곡은 1814년에 초연되었다. 1814년! 전유럽을 혁명
의 소용돌이로 내 몬 나폴레옹전쟁이 종결되고 메테르니히 반동체제가 자리잡는 비엔나회의, '회의는 춤춘다'로 유명한 이 반나폴레옹 전후처리회의는 그 해 9월 개최되어 다음 해 6월까
지 지리하게 이어지는 데, 그 와중인 1814년 11월 이 곡은 첫무대에 오른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등 전승4국의 의도는 자명했다. 타도된 부르봉왕조를 복고
시켜 다시는 혁명운동이 부활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아울러 일체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경향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그래서 삼엄한 경찰국가체제제를 안착시키는 것이었다. 베토벤은 
바로 이 비엔나체제를 찬양하는 곡을 회의기간에 무대에 올린 것이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한 때 프랑스혁명을 동경, 파리로 이주할 생각조차 했었고 또 '황제' 나폴레옹에 대해 극단적 혐오감을 내비친 급진
공화주의자였던 그가, 제우스라는 기성의 절대권력에 맞선 프로메테우스라는 항의와 저항의 
아이돌을 형상화했던 그가 이제 보수반동체제의 나팔수로 변신한 셈이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그래서 황제와 합스
부르크왕가를 낯 뜨겁게 찬양하는 그리고 바로 그 '새로운 유럽'의 중심 비엔나의 희망찬 미래를 기리는 곡을 만든 것이다. 우리로 치면 전두환시절 타락한 종교인들의 '조찬기도회'를 연
상하면 이해가 쉽다. 변절도 이런 변절이 없다.&nbsp;</p>
<div style="text-align: left; ">
   <br />
</div>
<p style="text-align: left;">&nbsp;</p>
<p style="text-align: left;">1941년 2월 1일자 &lt;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69호&gt;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대한민국 22년(1940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서 그의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하다.” 
물론 정식 국가로 의결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안익태의 신곡조 애국가는 이렇게 임정의 사용
허가를 얻었다. 같은 해 12월 10일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임정은 &lt;대일선전성명서&gt;를 발표한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이 선전포고문에서 임정은 ‘축심국’ 곧 일본, 독일, 이태리등 추축국에 ‘전쟁을 선언’하고 
만주국과 남경정부를 절대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그래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할 것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임정이 대일본 선전포고를 발표했던 바로 그 시점전후, 안익태에서 에키타이안으
로 변신한 그는 베를린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집
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까지 약 2년 반을 기식했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록과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의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에하라 고이치는 일본 유럽첩보망의 독일 총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정보는 나치 제국안전본부 제6국 해외첩보부산하 극동국장의 재판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 있으면서 에키타이안은 1942년 독일음악계의 거두 리하르트 슈트라
우스의 &lt;황기 2600년 기념 축전곡&gt;을 지휘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18일 중국에서 9.18사변이
라 불리는 즉 만주사변일에 맞추어 &lt;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축전곡&gt;을 작곡해서 지휘했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 ">나치 선전성이 제작한 이 날의 실황 영상은 마지막 4악장이 독일연방기록원에 남아있는데, 그 중 마지막 40초가량이 편집되어 나치의 전쟁뉴스를 통해 전세계에 방송되었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에키타이안은 1943년 2월 11일 일본 건국기념일에 비엔나에서 만주국을 다시 지휘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lt;만주국&gt;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lt;합창&gt;을 같이 올리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하지만 
5.16이후인 1962년 자신이 주도한 제1회 국제음악제때 꿈을 이루었다. 물론 &lt;만주국&gt;이 아니
라 &lt;한국환상곡&gt;과 &lt;합창&gt;을 묶어서 말이다. 베토벤은 메테르니히 반동체제를 위해 자신의 공화주의 신념을 훼절했지만 그 작품은 버렸다. 에키타이안은 변절의 도구였던 그 작품을 울궈먹고 또 울궈 먹었다. 그러는 사이 좌건 우건 
우리 모두가 비루해졌다.</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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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5:51:57+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4-06-28T15:26:53+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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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Interview] The untold story behind South Korea’s national anthem]]></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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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Professor Lee Hae-young reveals national anthem composer Ahn Eak-tai’s pro-Japanese actions and possible Nazi ties
   
&amp;#038;nbsp;

   
      Professor Lee Hae-young of Hanshin University elaborates on the pro-Japanese activity and possible Nazi ties of South Korean composer and conductor Ahn Eak-tai
      
   Over the past decade, the pro-Japanese actions of Ahn Eak-tai (1906–65) – the composer of South Korea’s national anthem, called “Aegukga” – have continued to come to light. But what if Ahn wasn’t just pro-Japanese but also had close ties to the Nazis?
   &amp;#038;nbsp;
   Lee Hae-young, a political scientist and professor of international relations at Hanshin University, has previously waded into tendentious topics including the US-Korea Free Trade Agreement, imported American beef, and the domestic film quota. This time, he delves into the past of composer and conductor Ahn Eak-tai.
   &amp;#038;nbsp;
   Lee’s book “The Ahn Eak-tai Case: A Study of the Symbol of the Anthem,” which was recently published by Samin, is a controversial work in which Lee marshals the latest documents, which he unearthed himself during eight years of research, to outline not only the pro-Japanese activities of “Ekitai Ahn” (Ahn’s Japanese name), but also his pro-Nazi activities. Lee sat down for an interview at the Hankyoreh office in Seoul’s Gongdeok neighborhood on Jan. 11.
   &amp;#038;nbsp;
   A classical music aficionado and audiophile, Lee studied abroad in Germany, which was Ahn’s main area of activity. Perhaps unsurprisingly for a controversy-courting political scientist, Lee takes a sharper stance than musicologists’ previous academic treatments of the Ahn issue.
   &amp;#038;nbsp;
   Ahn wasn’t a collaborator from the very beginning. At the premiere of “Aegukga” in the US in 1935, Ahn said, “I hope that this will go a long way toward helping the Korean national movement and our spirit of patriotism.”
   
      who composed the song currently regarded as South Korea’s National Anthem. (Kim Jung-hyo
      
   &amp;#038;nbsp;
   Ahn’s pro-Japanese activity begins after outbreak of WWII
   &amp;#038;nbsp;
   It wasn’t until World War II broke out that Ahn’s pro-Japanese activity really began. When Germany went to war with the Soviet Union in 1941, the Japanese Empire ordered the evacuation of its citizens from the countries of Europe. But Ahn was afraid that if he went back just then, everything he’d accomplished in the US and Europe would have been for nothing. And so Ahn paid a visit to Koichi Ehara, who was ostensibly in Berlin as a diplomat for Manchukuo but was actually the head of Japan’s spy network in Europe, and asked for his advice.
   &amp;#038;nbsp;
   After this meeting, Ahn ended up staying at Ehara’s home in Berlin for two and a half years, from 1941 to 1944. During that time, Ahn conducted 30 concerts in Germany and its allies (Italy), conquered countries (France) and friendly countries (Spain), including at the Beethoven Festival, which was held in Paris in 1944 to celebrate Hitler’s birthday. The pieces performed in these concerts included pieces that Ahn had composed, such as “Etenraku” and “Manchukuo Fantasia,” and “Japanese Festival Music,” by Richard Strauss. Interestingly, Ahn was the only Korean to become a member of Nazi Germany’s Reichsmusikkammer (State Music Bureau). On Ahn’s membership card, he falsely listed his birthplace as being Tokyo, rather than Pyongyang.
   &amp;#038;nbsp;
   “After the outbreak of World War II, Ahn jettisoned his weak nationalist leanings and became actively pro-Japanese. He apparently always had strong ambitions for his career in music,” Lee said.
   &amp;#038;nbsp;
   Lee pays particular attention to the fact that several of the concerts in which Ahn was the conductor were organized and sponsored by the German-Japanese Society. A civilian friendship and academic exchange organization, the German-Japanese Society was affiliated with and funded by the Nazi Party and served as a foreign propaganda organ for those two countries.
   &amp;#038;nbsp;
   When these points are taken into account, Lee argues, it’s reasonable to regard Ahn as having been a “special agent” for Ehara. Shortly before the Allies’ landed at Normandy, Ahn “fled” to Spain (which was on friendly terms with Germany and under the Fascist rule of Franco), as if Japan had tipped him off about the planned landing. Afterward, Ahn, who had been designated as “persona non grata” in France, didn’t return to Germany or Austria. This is also evidence of his pro-Nazi activity.
   &amp;#038;nbsp;
   S. Korean government needs to take action to acquire documents from Germany
   &amp;#038;nbsp;
   
      staff photographer)
      
   Lee has been personally paying visits to German federal archives to make copies of documents related to Ahn, but he says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needs to take action to acquire records and documents. “So far, I think we’ve only learned about 70% of the facts about what Ahn did. The government needs to officially make copies of the Ahn Eak-tai files and video footage at the German federal archives. We also need the government’s help to ask these archives to see if there are any other documents we haven’t found yet,” Lee said.
   &amp;#038;nbsp;
   Ahn’s “Aegukga” is customarily referred to as Korea’s national anthem, but the Republic of Korea doesn’t currently have a legally designated anthem. This led to a movement to choose a new anthem in the 1960s and 1970s and prompted the creation of an “anthem designation committee” during the administration of Chun Doo-hwan. This committee took issue with “Aegukga” because of its sentimental tune and lyrics and tried to create a new national anthem. In short, both conservatives and progressives felt the need to create a new anthem.
   &amp;#038;nbsp;
   
      Ahn Eak-tai (right) and Germany composer Richard Strauss discuss Ahn’s conduction of the piece “Japanese Festival Music
      
   “Ahn’s actions in Europe were kept under wraps for more than 60 years, and his pro-Japanese activities have only surfaced over the past decade. Even now, bookstores carry a number of books portraying Ahn as a national hero. But his confirmed collaboration with the Nazis would be enough to earn a death sentence in France. It’s inconceivable that a song composed by a conniving collaborator would be sung as the national anthem in France, or even in the UK or the US,” Lee said.
   &amp;#038;nbsp;
   Lee plans to raise the issue of choosing a new national anthem at the National Assembly’s Public Administration and Security Committee. “The anthem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symbols of the nation; it represents a central ceremony through which that nation’s members confirm and share their group identity. How much longer can Korea society disregard the fact that its anthem is so unpatriotic? When we haven’t even dealt with the basic issue of ‘Aegukga,’ there’s no point in talking about the Mar. 1 Movement or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establishment of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It’s time for an answer to be given.”
   &amp;#038;nbsp;
   By Kim Ji-hoon, staff reporter
   &amp;#038;nbsp;
   Please direct comments or questions to [engli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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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div id="subtitleapp" class="sub-title fb"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0px; padding: 0px 0px 15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Arial, georgia, sans-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line-height: 1.6; font-weight: 700; color: #333333; background-color: #ffffff;">
   <div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line-height: 1.6;">Professor Lee Hae-young reveals national anthem composer Ahn Eak-tai’s pro-Japanese actions and possible Nazi ties</div>
   </div>
<div id="bodyapp"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Arial, georgia, sans-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line-height: 1.6; color: #333333; background-color: #ffffff;">&nbsp;</div>
<div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Arial, georgia, sans-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line-height: 1.6; color: #333333; background-color: #ffffff;">
   <div class="img-box-right"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0px 0px 0px 17px; padding: 0px; border: 0px;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line-height: 1.6; float: right; max-width: 320px;"><img src="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400/597/imgdb/resize/2019/0116/154754159393_20190116.JPG" alt="Professor Lee Hae-young of Hanshin University elaborates on the pro-Japanese activity and possible Nazi ties of South Korean composer and conductor Ahn Eak-tai"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max-width: 100%; line-height: 1.6; width: 320px;" />
      <div class="desc"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5px auto 20px; padding: 0px; border: 0px;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line-height: 16px; max-width: 655px; color: #777777; font-size: 12px; overflow-wrap: break-word;">Professor Lee Hae-young of Hanshin University elaborates on the pro-Japanese activity and possible Nazi ties of South Korean composer and conductor Ahn Eak-tai</div>
      </div>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Over the past decade, the pro-Japanese actions of Ahn Eak-tai (1906–65) – the composer of South Korea’s national anthem, called “Aegukga” – have continued to come to light. But what if Ahn wasn’t just pro-Japanese but also had close ties to the Nazis?</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Lee Hae-young, a political scientist and professor of international relations at Hanshin University, has previously waded into tendentious topics including the US-Korea Free Trade Agreement, imported American beef, and the domestic film quota. This time, he delves into the past of composer and conductor Ahn Eak-tai.</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Lee’s book “The Ahn Eak-tai Case: A Study of the Symbol of the Anthem,” which was recently published by Samin, is a controversial work in which Lee marshals the latest documents, which he unearthed himself during eight years of research, to outline not only the pro-Japanese activities of “Ekitai Ahn” (Ahn’s Japanese name), but also his pro-Nazi activities. Lee sat down for an interview at the Hankyoreh office in Seoul’s Gongdeok neighborhood on Jan. 11.</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A classical music aficionado and audiophile, Lee studied abroad in Germany, which was Ahn’s main area of activity. Perhaps unsurprisingly for a controversy-courting political scientist, Lee takes a sharper stance than musicologists’ previous academic treatments of the Ahn issue.</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Ahn wasn’t a collaborator from the very beginning. At the premiere of “Aegukga” in the US in 1935, Ahn said, “I hope that this will go a long way toward helping the Korean national movement and our spirit of patriotism.”</p>
   <div class="img-box-center"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line-height: 1.6;"><img src="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600/420/imgdb/resize/2019/0116/154754159411_20190116.JPG" alt=" who composed the song currently regarded as South Korea’s National Anthem. (Kim Jung-hyo"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max-width: 100%; line-height: 1.6; width: 660px;" />
      <div class="desc"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5px auto 20px; padding: 0px; border: 0px;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line-height: 16px; max-width: 1000px; color: #777777; font-size: 12px; overflow-wrap: break-word;">who composed the song currently regarded as South Korea’s National Anthem. (Kim Jung-hyo</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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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It wasn’t until World War II broke out that Ahn’s pro-Japanese activity really began. When Germany went to war with the Soviet Union in 1941, the Japanese Empire ordered the evacuation of its citizens from the countries of Europe. But Ahn was afraid that if he went back just then, everything he’d accomplished in the US and Europe would have been for nothing. And so Ahn paid a visit to Koichi Ehara, who was ostensibly in Berlin as a diplomat for Manchukuo but was actually the head of Japan’s spy network in Europe, and asked for his advice.</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After this meeting, Ahn ended up staying at Ehara’s home in Berlin for two and a half years, from 1941 to 1944. During that time, Ahn conducted 30 concerts in Germany and its allies (Italy), conquered countries (France) and friendly countries (Spain), including at the Beethoven Festival, which was held in Paris in 1944 to celebrate Hitler’s birthday. The pieces performed in these concerts included pieces that Ahn had composed, such as “Etenraku” and “Manchukuo Fantasia,” and “Japanese Festival Music,” by Richard Strauss. Interestingly, Ahn was the only Korean to become a member of Nazi Germany’s Reichsmusikkammer (State Music Bureau). On Ahn’s membership card, he falsely listed his birthplace as being Tokyo, rather than Pyongyang.</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After the outbreak of World War II, Ahn jettisoned his weak nationalist leanings and became actively pro-Japanese. He apparently always had strong ambitions for his career in music,” Lee said.</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Lee pays particular attention to the fact that several of the concerts in which Ahn was the conductor were organized and sponsored by the German-Japanese Society. A civilian friendship and academic exchange organization, the German-Japanese Society was affiliated with and funded by the Nazi Party and served as a foreign propaganda organ for those two countries.</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When these points are taken into account, Lee argues, it’s reasonable to regard Ahn as having been a “special agent” for Ehara. Shortly before the Allies’ landed at Normandy, Ahn “fled” to Spain (which was on friendly terms with Germany and under the Fascist rule of Franco), as if Japan had tipped him off about the planned landing. Afterward, Ahn, who had been designated as “persona non grata” in France, didn’t return to Germany or Austria. This is also evidence of his pro-Nazi activity.</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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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class="desc" style="box-sizing: content-box; margin: 5px auto 20px; padding: 0px; border: 0px;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4px; line-height: 16px; max-width: 655px; color: #777777; font-size: 12px; overflow-wrap: break-word;">staff photographer)</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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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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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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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Ahn’s actions in Europe were kept under wraps for more than 60 years, and his pro-Japanese activities have only surfaced over the past decade. Even now, bookstores carry a number of books portraying Ahn as a national hero. But his confirmed collaboration with the Nazis would be enough to earn a death sentence in France. It’s inconceivable that a song composed by a conniving collaborator would be sung as the national anthem in France, or even in the UK or the US,” Lee sai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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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By Kim Ji-hoon, staff reporter</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nbsp;</p>
   <p style="box-sizing: content-box; padding: 0px 0px 20px; border: 0px; font-family: Pretendard, serif; vertical-align: baseline; letter-spacing: 0px; line-height: 1.6; width: 660px; overflow-wrap: break-word;">Please direct comments or questions to [english@hani.co.kr]</p>
   </div>
]]></content:encoded>

<atom:category label="국시모|인터뷰" term="20240721144914_8576|20240721184751_9657"/>
<author>guksimo@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8:48:46+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4-06-28T13:17:07+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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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보도자료-에키타이 안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 공개 기자회견 관련 자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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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에키타이 안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 공개 기자회견 관련 자료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에키타이 안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 공개 기자회견 관련 자료</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307/20230721144016_xhfrcmgv.jpg" alt="에키타이 안 만주국 지휘 동영상 도입부 사진.JPG" style="width: 768px; height: 576px;"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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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5:58:41+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3-07-21T14:41:03+09:00</atom:published>
</item>
<item>
<guid>296</guid>
<title><![CDATA[안익태의 만주환상곡 영상자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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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폐친 조계문님이 홍영두교수의 중계로 안익태=에키타이 안(아래 사진)의 1942년 9월 &amp;#039;만주환상곡&amp;#039; 장면을 다시 편집해서 유튜브에 성공적으로 복원시켜 놓으셨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미 밝힌 대로 이 40초가량의 연주회 클라이막스 장면은 프랑스국립영상원INA 가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황뉴스의 마지막부분에 실려 있다. 연주장 맨 앞에 앉아 있는 자는 당시 주독 일본대사이고 그 옆은 만주국 영사가 아닌가 싶다. 이 시기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공습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인 시점이었다. 당시 상해 임정은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정식으로 한 바 있다. 아무튼 일본의 놀라운 전광에 당시 독일 전역은 일본붐이 불고 있었다. 안익태가 본격적인 친일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이시기이고,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 일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독-일협회가 독일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고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는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가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수상의 친동생이자 일본귀족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 다음이 에키타이였다.


   이 영상에서 연주되는 곡은 &amp;#039;만주환상곡&amp;#039;이다. 내가 누차 말한 바 있지만 에키타이는 30년대에 작곡했던 &amp;#039;코리아 환상곡&amp;#039;을 자기표절 바로 만주곡 건국 10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amp;#039;만주환상곡&amp;#039;을 지휘했고, 이후 동일한 곡을 &amp;#039;극동&amp;#039;, &amp;#039;동아&amp;#039;라는 이름으로도 지휘했다. 에키타이는 독일점령국이거나 추축국을 중심으로 유럽 곳곳에서 자신의 이 곡 만주환상곡을 지휘했다. 거의 1942년-43년이다. 그러다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당시 파리에 연주여행중이던 에키타이는 프랑코 파시스트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주한다.
   
   논란의 핵심은 지금 한 40초 정도 나오는 만주환상곡이 과연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환상곡이냐 아니냐다. 현재 에키타이 본인이 바로 만주환상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지금 독립기념관에 남아 있는 코리아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던중 가지고 있던 만주환상곡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한 바로 그 것이다 훗날 에키타이는 이 악보를 &amp;#039;민족의 영도자&amp;#039;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그리고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 하면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한 뒤에 바르셀로나 방송국 편성표에는 만주환상곡이 방송된 일자 시간등이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음반으로 방송한 사실도 기재되어 있다. 이 편성표는 내가 이미 포스팅한 바 있다. 바로 이 SP음반을 찾아 낸다면, 애국가 논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갈 것으로 본다. 그리된다면 정부도 지금처럼 소닭보듯 할 수는 없을 게다. 안익태의 친일부역 행위 여부는 전혀 논란거리가 아니라고 나는 본다. 그저 이 동영상을 딱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답변은 충분하다. 그리고 7분짜리 영상도 이미 존재한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이 SP음반을 찾으러 가야것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폐친 조계문님이 홍영두교수의 중계로 안익태=에키타이 안(아래 사진)의 1942년 9월 '만주환상곡' 장면을 다시 편집해서 유튜브에 성공적으로 복원시켜 놓으셨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p>
<p><br /></p>
<p>이미 밝힌 대로 이 40초가량의 연주회 클라이막스 장면은 프랑스국립영상원INA 가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황뉴스의 마지막부분에 실려 있다. 연주장 맨 앞에 앉아 있는 자는 당시 주독 일본대사이고 그 옆은 만주국 영사가 아닌가 싶다. 이 시기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공습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인 시점이었다. 당시 상해 임정은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정식으로 한 바 있다. 아무튼 일본의 놀라운 전광에 당시 독일 전역은 일본붐이 불고 있었다. 안익태가 본격적인 친일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이시기이고,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 일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독-일협회가 독일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고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는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가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수상의 친동생이자 일본귀족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 다음이 에키타이였다.</p>
<p><br /></p>
<div>
   <p>이 영상에서 연주되는 곡은 '만주환상곡'이다. 내가 누차 말한 바 있지만 에키타이는 30년대에 작곡했던 '코리아 환상곡'을 자기표절 바로 만주곡 건국 10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만주환상곡'을 지휘했고, 이후 동일한 곡을 '극동', '동아'라는 이름으로도 지휘했다. 에키타이는 독일점령국이거나 추축국을 중심으로 유럽 곳곳에서 자신의 이 곡 만주환상곡을 지휘했다. 거의 1942년-43년이다. 그러다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당시 파리에 연주여행중이던 에키타이는 프랑코 파시스트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주한다.</p>
   <p><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60559_yruqlfgs.jpg" alt="안익태-400.jpg" style="width: 303px; height: 400px; float: left; margin-right: 1em;" /></p>
   <p>논란의 핵심은 지금 한 40초 정도 나오는 만주환상곡이 과연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환상곡이냐 아니냐다. 현재 에키타이 본인이 바로 만주환상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지금 독립기념관에 남아 있는 코리아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던중 가지고 있던 만주환상곡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한 바로 그 것이다 훗날 에키타이는 이 악보를 '민족의 영도자' 이승만에게 헌정했다.</p>
   <p><br /></p>
   <p>그리고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 하면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한 뒤에 바르셀로나 방송국 편성표에는 만주환상곡이 방송된 일자 시간등이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음반으로 방송한 사실도 기재되어 있다. 이 편성표는 내가 이미 포스팅한 바 있다. 바로 이 SP음반을 찾아 낸다면, 애국가 논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갈 것으로 본다. 그리된다면 정부도 지금처럼 소닭보듯 할 수는 없을 게다. 안익태의 친일부역 행위 여부는 전혀 논란거리가 아니라고 나는 본다. 그저 이 동영상을 딱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답변은 충분하다. 그리고 7분짜리 영상도 이미 존재한다.</p>
   <p><br /></p>
   <p>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이 SP음반을 찾으러 가야것다.</p>
   </div>
]]></content:encoded>
<media url="http://guksimo.com/data/news/2407/840b768c5f89c777a0ce529e84a52182_losv2ypIlFlho.jpg" medium="video"><![CDATA[<iframe width="720" height="460" src="https://www.youtube.com/embed/YTS5lyKBfFc?si=1pyfxxPOz-jt34hY" title="YouTube video player"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referrerpolicy="strict-origin-when-cross-origin" allowfullscreen></iframe>]]></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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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9:28:43+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2-08-14T19:55:27+09:00</atom:published>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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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에키타이안, 스트라우스, 소토먀요(스페인화가) 1946년 4월 카탈라냐음악당(바르셀로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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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는 사진
            
            
               
            
            Títol&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Ekitai&amp;#038;nbsp;Ahn&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amp;#038;nbsp;
            
         
         
      
         Autor
         Presse-ILlustrationem Hoffman (Viena)
         
      
         Data del document original
         Abril&amp;#038;nbsp;1946
         
      
         Localització
         Palau de la Música Catalana
         
      
         Matèria
         Directors d&amp;#039;orquestraCompositors
         
      
         Onomàstics
         Ahn, EkitaiStrauss, Richard, 1864-1949
         
      
         Descripció
         Retrat&amp;#038;nbsp;d&amp;#039;Ekitai&amp;#038;nbsp;Ahn,&amp;#038;nbsp;Richard&amp;#038;nbsp;Strauss&amp;#038;nbsp;i&amp;#038;nbsp;el&amp;#038;nbsp;pintor&amp;#038;nbsp;Lluís&amp;#038;nbsp;Sotomayor
         
      
         Signatura
         2.4.2_0060.02
         
      
         Font
         2 fotografies;paper; positiu; b/n
         
      
         Editor
         Centre de Documentació de l&amp;#039;Orfeó Català
         
      
         Data de publicació
         2014
         
      
         Format
         Jpg
         
      
         Gestió dels drets
         Còpia permesa amb finalitat d&amp;#039;estudi o recerca, citant la font "Centre de Documentació de l&amp;#039;Orfeó Català". Per a qualsevol altre ús cal demanar autorització.
         
      
         Tipus de recurs (Europeana)
         Image
         
      
         Repositori
         Memòria Digital de Catalunya
         
      
         Gestió dels drets (Europeana)
         http://www.europeana.eu/rights/rr-f/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table style="margin: 0px; padding: 0px; color: #525252; font-stretch: normal; font-size: 11px; line-height: 14.3px; font-family: Verdana; text-indent: 0px; background-color: #ffffff;">
   <tbody>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title"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vertical-align: top;">
            <p style="padding: 0px;"><strong>*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는 사진</strong></p>
            <p style="padding: 0px;"><br /></p>
            <p style="padding: 0px;">
               <br />
            </p>
            <p style="padding: 0px;"><strong>Títol&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strong><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Ekitai"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Ekitai</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Ahn"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Ahn</a><strong>&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strong></p>
            </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title"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creato"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Autor</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creato"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Presse-ILlustrationem%20Hoffman%20(Viena)/mode/exact"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Presse-ILlustrationem Hoffman (Viena)</a></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covera"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Data del document original</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covera"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Abril"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Abril</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1946"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1946</a></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matria"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Localització</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matria"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Palau%20de%20la%20M%C3%BAsica%20Catalana/mode/exact"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Palau de la Música Catalana</a><br /></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subjec"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Matèria</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subjec"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Directors%20d'orquestra/mode/exact"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Directors d'orquestra</a><br /><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Compositors/mode/exact"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Compositors</a><br /></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person"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Onomàstics</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person"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Ahn,%20Ekitai/mode/exact"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Ahn, Ekitai</a><br /><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Strauss,%20Richard,%201864-1949/mode/exact"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Strauss, Richard, 1864-1949</a><br /></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descri"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Descripció</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descri"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Retrat"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Retrat</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d'Ekitai"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d'Ekitai</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Ahn"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Ahn</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Richard"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Richard</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Strauss"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Strauss</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i"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i</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el"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el</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pintor"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pintor</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Llu%C3%ADs"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Lluís</a><span class="Apple-converted-space">&nbsp;</span><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Sotomayor"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Sotomayor</a></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identi"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Signatura</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identi"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a class="body_link_11" href="http://mdc.cbuc.cat/cdm/search/searchterm/2.4.2_0060.02"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2.4.2_0060.02</a></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source"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Font</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source"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2 fotografies;paper; positiu; b/n</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publis"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Editor</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publis"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Centre de Documentació de l'Orfeó Català</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relati"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Data de publicació</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relati"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2014</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format"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Format</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format"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Jpg</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rights"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Gestió dels drets</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rights"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Còpia permesa amb finalitat d'estudi o recerca, citant la font "Centre de Documentació de l'Orfeó Català". Per a qualsevol altre ús cal demanar autorització.</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tipus"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Tipus de recurs (Europeana)</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tipus"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Image</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reposi"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Repositori</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reposi"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Memòria Digital de Catalunya</td>
         </tr>
      <tr>
         <td class="description_col1" id="metadata_nickname_gesti"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8px; font-size: 10px; width: 100px; font-weight: bold; vertical-align: top;">Gestió dels drets (Europeana)</td>
         <td class="description_col2" id="metadata_gesti" style="margin: 0px; padding: 3px 2px 10px; font-size: 15px;"><a class="body_link_11" href="http://www.europeana.eu/rights/rr-f/" target="_blank" style="text-decoration-line: none; color: #0066cc; font-size: 11px;">http://www.europeana.eu/rights/rr-f/<span class="icon_11 ui-icon-extlink" style="background-position: -35px -83px; margin: 2px; width: 12px; height: 11px; vertical-align: bottom; display: inline-block; background-image: url(" http:="" mdc.cbuc.cat="" ui="" cdm="" default="" collection="" css="" images="" smoothness-ui-icons_888888_256x240.png");"=""></span></a></td>
         </tr>
      </tbody>
   </table>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31191213_fepphwsz.jpg" alt="에키타이스트라우스1.jpg" style="width: 477px; height: 338px;"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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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category label="자료실|연구자료" term="20240721145047_8219|20240721145732_1988"/>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6:08:31+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1-12-31T19:12:21+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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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293</guid>
<title><![CDATA[만주환상곡 소개 영상, 2차대전 프랑스 방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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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에키타이안=안익태, 필요가 있어 유튜브에 일전에 내가 찾은 안익태 만주환상곡 동영상을 검색하니 이렇다. "안익태, 만주국...이 동영상과 연결된 Youtube 계정이 여러 건의 제 3자 저작권 침해 신고로 인해 해지 되었습니다 " 한마디로 삭제되었다. 원래 내가 올린 1942년 10월 2일 나치 점령하 프랑스 방송국에서 제작한 전쟁뉴스 9분3초 - 9분 40초 사이가 안익태=에키타이 안의 베를린 공연 즉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공연중 클라이막스 장면이다. 흔히 이를 두고 안익태가 유럽에서 &amp;#038;lt;코리아환상곡&amp;#038;gt;을 연주했다고 거짓되게 알려진 그 장면이다. 안익태는 2차대전이 종전되기 까지 바로 이 &amp;#038;lt;만주환상곡&amp;#038;gt;을 레퍼토리로 순회공연을 했다. 당연 일본괴뢰국 만주영사관의 전폭적 지원하에서다.
         
         
         파리계시는 Young-Lee Rim-Fuster 선생께서 영상에 나오는 아나운서 멘트를 통역해 주셨다. A Berlin, le célèbre chef d&amp;#039;orch...estre japonais Ekitai Ahn dirige lui - même l&amp;#039;exécution d&amp;#039;une de ses oeuvres qui révèle l&amp;#039;influence occidentale sur la musique nippone d&amp;#039;aujourd&amp;#039;hui. (베를린에서는 유명한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이 그의 작품 중 한 곡을 직접 지휘 연주하는데, 이곡은 오늘날 일본 음악에 미친 서양의 영향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베토벤9번을 흉내낸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합창편성, 후기낭만파취향의 테마, 애국가와 흡사한 선율등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곡에 대한 당시 나치독일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이곡이 현대 &amp;#039;일본&amp;#039;음악이고, 서양음악의 압도적 영향하에서 만들어졌다는 데있다. &amp;#038;lt;만주&amp;#038;gt;, &amp;#038;lt;극동&amp;#038;gt;등으로 자기표절되던 이 곡의 악보는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이후 에키타이 안의 스페인 도주과정에서 폐기되고, 새로이 이보되어 &amp;#038;lt;코리아환상곡&amp;#038;gt;의 1차 악보로 남게된다.
         &amp;#038;nbsp;
         ■관련자료 링크 :&amp;#038;nbsp;
         
            https://www.ina.fr/ina-eclaire-actu/video/afe86004295/journal-france-actualites-emission-du-2-octobre-1942
         
         &amp;#038;nbsp;
         
            나의 페친 홍영두교수가 편집해 준 해당 장면이 유튜브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9분까지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다. 그러나 어쩌겠나, 가짜 애국자, 안익태의 친일부역의 현장을 목격하는 셈치고 봐줬으면 좋겠다. 참 무대중간에 걸린 일장기도 감상하면서 말이다. 아울러 지금 애국가에서 &amp;#039;대한사람 대한으로 -&amp;#039; 이하 부분의 선율하고 비교해 봐도 좋겠다.
            
            그런데 과연 누가 "여러 건의 제3자 저작권 침해 신고"를 했을까. 분명 이 영상의 저작권은 프랑스국립영상원에 있다. 프랑스 영상원INA이 "여러건의 저작권 침해 신고"를 했을까? 과연 그럴까? 차제에 작년 베를린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복사해 온 안익태=에키타이 안 자료를 전 국민이 공유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겠다.
            
         
      
   

   
      &amp;#038;nbs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div>
   <div>
      <div>
         <p>에키타이안=안익태, 필요가 있어 유튜브에 일전에 내가 찾은 안익태 만주환상곡 동영상을 검색하니 이렇다. "안익태, 만주국...이 동영상과 연결된 Youtube 계정이 여러 건의 제 3자 저작권 침해 신고로 인해 해지 되었습니다 " 한마디로 삭제되었다. 원래 내가 올린 1942년 10월 2일 나치 점령하 프랑스 방송국에서 제작한 전쟁뉴스 9분3초 - 9분 40초 사이가 안익태=에키타이 안의 베를린 공연 즉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공연중 클라이막스 장면이다. 흔히 이를 두고 안익태가 유럽에서 &lt;코리아환상곡&gt;을 연주했다고 거짓되게 알려진 그 장면이다. 안익태는 2차대전이 종전되기 까지 바로 이 &lt;만주환상곡&gt;을 레퍼토리로 순회공연을 했다. 당연 일본괴뢰국 만주영사관의 전폭적 지원하에서다.</p>
         <p><br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61431_pchqmcyg.jpg" alt="2차 세계대전 프랑스 방송01.jpg" style="width: 700px; height: 522px;" /></p>
         <p>파리계시는 Young-Lee Rim-Fuster 선생께서 영상에 나오는 아나운서 멘트를 통역해 주셨다. A Berlin, le célèbre chef d'orch...estre japonais Ekitai Ahn dirige lui - même l'exécution d'une de ses oeuvres qui révèle l'influence occidentale sur la musique nippone d'aujourd'hui. (베를린에서는 유명한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이 그의 작품 중 한 곡을 직접 지휘 연주하는데, 이곡은 오늘날 일본 음악에 미친 서양의 영향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베토벤9번을 흉내낸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합창편성, 후기낭만파취향의 테마, 애국가와 흡사한 선율등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곡에 대한 당시 나치독일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이곡이 현대 '일본'음악이고, 서양음악의 압도적 영향하에서 만들어졌다는 데있다. &lt;만주&gt;, &lt;극동&gt;등으로 자기표절되던 이 곡의 악보는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이후 에키타이 안의 스페인 도주과정에서 폐기되고, 새로이 이보되어 &lt;코리아환상곡&gt;의 1차 악보로 남게된다.</p>
         <p>&nbsp;</p>
         <p>■관련자료 링크 :&nbsp;</p>
         <p>
            <a href="http://https://www.ina.fr/ina-eclaire-actu/video/afe86004295/journal-france-actualites-emission-du-2-octobre-1942" target="_blank">https://www.ina.fr/ina-eclaire-actu/video/afe86004295/journal-france-actualites-emission-du-2-octobre-1942</a>
         </p>
         <p>&nbsp;</p>
         <div>
            <p>나의 페친 홍영두교수가 편집해 준 해당 장면이 유튜브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9분까지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다. 그러나 어쩌겠나, 가짜 애국자, 안익태의 친일부역의 현장을 목격하는 셈치고 봐줬으면 좋겠다. 참 무대중간에 걸린 일장기도 감상하면서 말이다. 아울러 지금 애국가에서 '대한사람 대한으로 -' 이하 부분의 선율하고 비교해 봐도 좋겠다.</p>
            <p><br /></p>
            <p>그런데 과연 누가 "여러 건의 제3자 저작권 침해 신고"를 했을까. 분명 이 영상의 저작권은 프랑스국립영상원에 있다. 프랑스 영상원INA이 "여러건의 저작권 침해 신고"를 했을까? 과연 그럴까? 차제에 작년 베를린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복사해 온 안익태=에키타이 안 자료를 전 국민이 공유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겠다.</p>
            </div>
         </div>
      </div>
   </div>
<div>
   <div>
      <div>&nbsp;</div>
      </div>
   </div>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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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6:15:45+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1-12-31T19:08:30+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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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에텐라쿠 강천성악 in 1941 헝가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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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안익태 즉 자막에 나오는 대로 &amp;#039;일본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에키타이안&amp;#039;이다. 1941년 11월 헝가리 월드뉴스의 장면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에키타이안의 1940년대 초반의 영상은 모두 3가지다. 여기의 1941년 헝가리 영상이 있고, 1942년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만주환타지가 있다. 만주환타지 영상은 오래전 2000년대 중반 국내에 소개되어 충격을 준 바 있는데, 현재 베를린 필름아카이브에 소재한다. 그 일부가 편집되어 나치점령하 파리의 전쟁뉴스에 삽입되었는데, 이 것을 편집해서 이미 올린바 있다. 이 영상도 페친 Moon Ma님이 수고해 주셨다.
&amp;#038;nbsp;
에키타이안은 대략 1940년 - 1944년 사이 유럽에서 주로 추축국을 중심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사실상 같은 곡인 &amp;#038;lt;교쿠토(극동)&amp;#038;gt;,&amp;#038;lt;만주환상곡&amp;#038;gt; 그리고 바로 이 일본 궁중음악을 모태로 작곡한 &amp;#038;lt;에텐라쿠&amp;#038;gt;를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편곡한 바흐의 &amp;#038;lt;토카타와 푸가 C장조&amp;#038;gt;도 에키타이가 즐겨...&amp;#038;nbsp;연주한 레퍼토리였다.
&amp;#038;nbsp;

   당시 독일에서는 2가지의 &amp;#038;lt;에텐라쿠&amp;#038;gt;가 연주되었다. 하나는 고노에 히데마로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키타이안의 것이었다. 고노에는 전시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자 귀족집안의 자제로서 당시 재독 일본음악인의 중심이었다고 할만하다. 고노에의 &amp;#038;lt;에텐라쿠&amp;#038;gt;가 듣기에 일본 가가쿠(아악)의 전통에 충실한 것이었다면, 에키타이안의 그것은 보다 발랄하고 화려해서 대중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후 에키타이안은 이 &amp;#038;lt;에텐라쿠&amp;#038;gt;를 어이없게도 &amp;#038;lt;강천성악&amp;#038;gt;으로 &amp;#039;우라까이&amp;#039; 내지 자기표절해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amp;#038;nbsp;
   영상에 나오는 연주회는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깊은 페스티 비가도홀에서 열렸다. 화면에서 보듯 왼쪽에는 일장기가 오른쪽에는 헝가리왕국의 국기가 걸려있다. 헝가리는 1940년 11월 20일 추축국에 가입했다. 이후 나치독일의 편에서 소련침공을 감행한다. 그래서 이 날의 연주회는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 1주년을 축하하고 대소전을 독려, 선전할 목적으로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날의 연주회는 에키타이안의 &amp;#038;lt;에텐라쿠&amp;#038;gt;뿐만 아니라, 독일, 이태리의 음악 그리고 특히 헝가리 작곡가 산도르 베레슈(Sandor Veress)가 일본 황기 2,600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amp;#038;lt;일본에서&amp;#038;gt;도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안익태 즉 자막에 나오는 대로 '일본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에키타이안'이다. 1941년 11월 헝가리 월드뉴스의 장면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에키타이안의 1940년대 초반의 영상은 모두 3가지다. 여기의 1941년 헝가리 영상이 있고, 1942년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만주환타지가 있다. 만주환타지 영상은 오래전 2000년대 중반 국내에 소개되어 충격을 준 바 있는데, 현재 베를린 필름아카이브에 소재한다. 그 일부가 편집되어 나치점령하 파리의 전쟁뉴스에 삽입되었는데, 이 것을 편집해서 이미 올린바 있다. 이 영상도 페친 Moon Ma님이 수고해 주셨다.</p>
<p>&nbsp;</p>
<p>에키타이안은 대략 1940년 - 1944년 사이 유럽에서 주로 추축국을 중심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사실상 같은 곡인 &lt;교쿠토(극동)&gt;,&lt;만주환상곡&gt; 그리고 바로 이 일본 궁중음악을 모태로 작곡한 &lt;에텐라쿠&gt;를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편곡한 바흐의 &lt;토카타와 푸가 C장조&gt;도 에키타이가 즐겨...&nbsp;연주한 레퍼토리였다.</p>
<p>&nbsp;</p>
<div>
   <p>당시 독일에서는 2가지의 &lt;에텐라쿠&gt;가 연주되었다. 하나는 고노에 히데마로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키타이안의 것이었다. 고노에는 전시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자 귀족집안의 자제로서 당시 재독 일본음악인의 중심이었다고 할만하다. 고노에의 &lt;에텐라쿠&gt;가 듣기에 일본 가가쿠(아악)의 전통에 충실한 것이었다면, 에키타이안의 그것은 보다 발랄하고 화려해서 대중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후 에키타이안은 이 &lt;에텐라쿠&gt;를 어이없게도 &lt;강천성악&gt;으로 '우라까이' 내지 자기표절해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p>
   <p>&nbsp;</p>
   <p>영상에 나오는 연주회는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깊은 페스티 비가도홀에서 열렸다. 화면에서 보듯 왼쪽에는 일장기가 오른쪽에는 헝가리왕국의 국기가 걸려있다. 헝가리는 1940년 11월 20일 추축국에 가입했다. 이후 나치독일의 편에서 소련침공을 감행한다. 그래서 이 날의 연주회는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 1주년을 축하하고 대소전을 독려, 선전할 목적으로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날의 연주회는 에키타이안의 &lt;에텐라쿠&gt;뿐만 아니라, 독일, 이태리의 음악 그리고 특히 헝가리 작곡가 산도르 베레슈(Sandor Veress)가 일본 황기 2,600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lt;일본에서&gt;도 연주되었기 때문이다.</p>
   </div>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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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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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안익태의 '만주환상곡'은 대한민국 애국가인 '한국환상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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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오랜 만에 에키타이 안=안익태] 제자 이유철이 현지에서 어렵게 구해 준 귄터 하쉬가 편집한 &amp;#038;lt;독-일협회 Deutsche-Japanische Gesellschaften von 1888 bis 1996&amp;#038;gt;란 책에 에키타이 안이 등장하니 여기에 번역해 두고자 한다.(277-278쪽)에키타이 안은 1941-42년 [나치시기] 비엔나 총독Reichsstatthalter 발두어 폰 쉬락Baldur von Schirach이 관장했던 그리고 독-일협회 비엔나지부가 주최하는, &amp;#038;lt;전시동계지원사업&amp;#038;gt;을 위한 독-일협회주최 연주회시리즈를 통해 데뷔하였다. 원래 1942년 2월 3일로 예정된 연주회는 [전시] 석탄부족으로 3월 12일로 연기되었다.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베에토벤의 에그몬트서곡, 에키타이 안이 오케스트라버전으로 편곡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C장조,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A장조, 일본 황기 2,600년 기념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amp;#038;lt;일본 축전곡&amp;#038;gt;이 들어가 있었다. 또 한 번의 그런 연주회가 1943년 2월 11일에도 열렸다. 독일협회의 비엔나지부 사무총장은 그 연주회의 전사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amp;#038;nbsp;

   


   에키타이 안씨는 일본대사관 참사관 M. 이마이를 통해 자신의 희망을 표현한 편지를 보내게 함으로써 비엔나에서 자신의 &amp;#039;만주환상곡&amp;#039;을 공연할 수 있었다. 이 연주회는 5월 초에 그것도 만주환상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함께 올리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비엔나에선 그런 식의 연주편성은 완전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비엔나총독 발두어 폰 쉬락에게도 문의한 뒤 독일제국 건국기념일인 1943년 2월 11일에 계획된 연주회때 오직 일본 작곡가의 일본 음악만으로 무대에 올리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자고 결정했다.
   &amp;#038;nbsp;
   그렇지만 베에토벤 교향곡 7번과 레오노레서곡등 베에토벤의 작품과 에키타이안의 작품을 묶었던 그 날 밤 연주회는 독일의 스탈린그라드전투 패전이라는 암울한 분위기속에서 개최되었다. 비엔나 지부 사무총장은 말하길 "지금 이 불쾌하게 억눌린 분위기가 다수 청중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나는 모르긴 해도 상당량의 표를 공짜로 나눠 져야 할 것 같다."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서 작곡된 이 작품은 "(일본어로 부른) 소박한 그렇지만 힘있게 종종 제창unisono으로 이어지는 마지막합창속에서, 희망에 찬 평화의 사절처럼" 울려 퍼졌다.
   
      어쩌나, 바로 이 &amp;#038;lt;만주환상곡&amp;#038;gt;이 &amp;#038;lt;한국환상곡&amp;#038;gt;이고, 스탈린그라드전투 패배이후 더 한층 짙어진 패전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는 이들을 위로 하기 위해 &amp;#039;일본어로&amp;#039; 된 저 감동적인 &amp;#038;lt;애국가&amp;#038;gt;의 마지막 합창부분을 지휘하고 있었다. 물론 그 때는 &amp;#038;lt;만주환상곡&amp;#038;gt;의 클라이맥스이지만 말이다. 1996년 출판된 이 아주 객관적인 책의 저자 조차 바로 이 만주환상곡이 한국환상곡인 줄 꿈에라도 알까. 에키타이가 바랬던 것처럼, 진짜 이 한국 아니 만주환상곡과 베에토벤 9번 합창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면 어찌 되었을까.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amp;#038;nbsp;
   전쟁의 한 복판 하루 하루 고단한 삶을 견뎌야 했던 혹한속의 비엔나 시민들이 에키타이 안의 일본어로 된 오족협화의 선율에 위로를 받았을까. 그렇다면 안익태는 참으로 위대한 코스모폴리탄 박애주의자였음에 분명하다. 허나 그 선율에 - 황교안의 애국 기준에 따라 - 심지어 4절까지 따라 불러야 하는 우리는 어쩌나, 흔히 말하는 &amp;#039;비동시성의 동시성&amp;#039; 치곤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그래 &amp;#039;역사가 미쳤다!&amp;#039;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오랜 만에 에키타이 안=안익태] 제자 이유철이 현지에서 어렵게 구해 준 귄터 하쉬가 편집한 &lt;독-일협회 Deutsche-Japanische Gesellschaften von 1888 bis 1996&gt;란 책에 에키타이 안이 등장하니 여기에 번역해 두고자 한다.(277-278쪽)<br /><br />에키타이 안은 1941-42년 [나치시기] 비엔나 총독Reichsstatthalter 발두어 폰 쉬락Baldur von Schirach이 관장했던 그리고 독-일협회 비엔나지부가 주최하는, &lt;전시동계지원사업&gt;을 위한 독-일협회주최 연주회시리즈를 통해 데뷔하였다. 원래 1942년 2월 3일로 예정된 연주회는 [전시] 석탄부족으로 3월 12일로 연기되었다.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베에토벤의 에그몬트서곡, 에키타이 안이 오케스트라버전으로 편곡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C장조,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A장조, 일본 황기 2,600년 기념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lt;일본 축전곡&gt;이 들어가 있었다. 또 한 번의 그런 연주회가 1943년 2월 11일에도 열렸다. 독일협회의 비엔나지부 사무총장은 그 연주회의 전사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63725_fsbnghrf.jpg" alt="오랜만에 안익태01.jpg" style="width: 740px; height: 416px;" />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63726_fssmvcwo.jpg" alt="오랜만에 안익태02.jpg" style="width: 740px; height: 416px;" />
</p>
<div>
   <p>에키타이 안씨는 일본대사관 참사관 M. 이마이를 통해 자신의 희망을 표현한 편지를 보내게 함으로써 비엔나에서 자신의 '만주환상곡'을 공연할 수 있었다. 이 연주회는 5월 초에 그것도 만주환상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함께 올리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비엔나에선 그런 식의 연주편성은 완전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비엔나총독 발두어 폰 쉬락에게도 문의한 뒤 독일제국 건국기념일인 1943년 2월 11일에 계획된 연주회때 오직 일본 작곡가의 일본 음악만으로 무대에 올리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자고 결정했다.</p>
   <p>&nbsp;</p>
   <p>그렇지만 베에토벤 교향곡 7번과 레오노레서곡등 베에토벤의 작품과 에키타이안의 작품을 묶었던 그 날 밤 연주회는 독일의 스탈린그라드전투 패전이라는 암울한 분위기속에서 개최되었다. 비엔나 지부 사무총장은 말하길 "지금 이 불쾌하게 억눌린 분위기가 다수 청중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나는 모르긴 해도 상당량의 표를 공짜로 나눠 져야 할 것 같다."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서 작곡된 이 작품은 "(일본어로 부른) 소박한 그렇지만 힘있게 종종 제창unisono으로 이어지는 마지막합창속에서, 희망에 찬 평화의 사절처럼" 울려 퍼졌다.</p>
   <p>
      <br />어쩌나, 바로 이 &lt;만주환상곡&gt;이 &lt;한국환상곡&gt;이고, 스탈린그라드전투 패배이후 더 한층 짙어진 패전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는 이들을 위로 하기 위해 '일본어로' 된 저 감동적인 &lt;애국가&gt;의 마지막 합창부분을 지휘하고 있었다. 물론 그 때는 &lt;만주환상곡&gt;의 클라이맥스이지만 말이다. 1996년 출판된 이 아주 객관적인 책의 저자 조차 바로 이 만주환상곡이 한국환상곡인 줄 꿈에라도 알까. 에키타이가 바랬던 것처럼, 진짜 이 한국 아니 만주환상곡과 베에토벤 9번 합창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면 어찌 되었을까.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p>
   <p>&nbsp;</p>
   <p>전쟁의 한 복판 하루 하루 고단한 삶을 견뎌야 했던 혹한속의 비엔나 시민들이 에키타이 안의 일본어로 된 오족협화의 선율에 위로를 받았을까. 그렇다면 안익태는 참으로 위대한 코스모폴리탄 박애주의자였음에 분명하다. 허나 그 선율에 - 황교안의 애국 기준에 따라 - 심지어 4절까지 따라 불러야 하는 우리는 어쩌나, 흔히 말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치곤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그래 '역사가 미쳤다!'</p>
   </div>
]]></content:encoded>

<atom:category label="안익태 애국가|왜 문제인가?|친일 친나치 밀착" term="20240721144936_0879|20240721145302_7788|20240721145407_5292"/>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6:41:15+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1-12-31T17:37:17+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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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루이웬과 에하라 고이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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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amp;#038;lt;오마이뉴스&amp;#038;gt; 기사다. 그런데 군데군데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 우선 기사를 보자.
"당시를 녹화한 영상에는 &amp;#039;만주국 창립 10주년 축하 음악회&amp;#039;라는 독일어 자막이 찍혀 있고, 콘서트홀 중앙엔 대형 일장기가 걸려 있다. 일본과 만주국의 영광을 기리고, (나치) 독일 및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건승을 비는 내용의 가사는 당시 주독 일본 공사였던 에하라 고이치가 썼다. 당시 &amp;#039;에키타이 안&amp;#039;으로 활동한 안익태의 주소지는 에하라 고이치의 집이었다."오마이뉴스 관련 링크 :&amp;#038;nbsp;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964
&amp;#038;nbsp;

   이미 오래전 어렵게 찾아, 어렵게 편집해 올린 유튜브 에키타이안 ( = 안익태)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튜브 조회수는 처참한 지경이다. 뭐 이래서 친일청산 안될 거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확신하고 있다.
   &amp;#038;nbsp;
   기사에서 언급한 에하라 고이치는 당시 주독 일본 공사가 아니다. 뭐 어쩌 겠는가 기자가 읽은 책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에하라는 공사가 아니라 참사관councilor&amp;#038;nbsp;이다. (이는 전후 독일의 미군정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만주국은 로마에 대사관을 두고 독일 베를린과 함부룩에 공사관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국의 주베를린 공사는 에하라가 아니라 루 이웬 Lu I-Wen이란 인물이다. 북만주 길림성 퉁화현 현장, 만주국의 외무부 고위직을 지내다 만주국 총리 최측근으로 주독 베를린 공사로 39년에 임명되었다.
   &amp;#038;nbsp;
   &amp;#038;lt;코리아환상곡&amp;#038;gt;을 자기표절한 &amp;#038;lt;만주환상곡&amp;#038;gt;을 에키타이안이 베를린에서 연주할 당시 그 가사를 쓴 사람이 에하라다. 오족협화가 주된 내용이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는 베를린 반호수Wannsee 주변 고급 주택가에 있던 에하라의 관저에 주소를 두고 있었고 양인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amp;#038;nbsp;
   그런데 아래 사진을 보자. 한국에선 처음 공개되는 거다. 첫번째는 위 내가 올린 안익태 &amp;#038;lt;만주환상곡&amp;#038;gt; 지휘장면중 정체불명의 인물이 비중있게 등장하는 것을 내가 캡쳐한 거다. 주독대사 오시마중장 바로 다음에 등장한다. 이 자가 일본인 에하라인지 만주국의 주독 공사인 루 이웬인지 한 번 비교해 보자. 바로 그 다음 사진이 우리는 도대체 알 리 없는 당시 주독 만주국공사 루 이웬이다. 비슷한 듯 아닌 듯 자신이 없다. 루 이웬은 만주국 공사지만 한족출신이다. 에하라는 비록 직급상 공사는 아니지만 실세였다. 당연하다. 만주국은 푸이가 황제고 한족이 총리였지만, 실세는 일본의 관동군이었다. 이런 권력구도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는 바로 이 만주국 공사관의 실세 에하라의 관저에 기식했던 것이다.
   &amp;#038;nbsp;
   
      아무튼 나는 잘 모르겠다, 아래 사진 두 인물이 같은지 다른지 ... 비슷하기도 하고.
   
   &amp;#038;nbsp;
   
      
   
   &amp;#038;nbsp;
   
      
   
   &amp;#038;nbs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lt;오마이뉴스&gt; 기사다. 그런데 군데군데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 우선 기사를 보자.</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당시를 녹화한 영상에는 '만주국 창립 10주년 축하 음악회'라는 독일어 자막이 찍혀 있고, 콘서트홀 중앙엔 대형 일장기가 걸려 있다. 일본과 만주국의 영광을 기리고, (나치) 독일 및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건승을 비는 내용의 가사는 당시 주독 일본 공사였던 에하라 고이치가 썼다. 당시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한 안익태의 주소지는 에하라 고이치의 집이었다."<br />오마이뉴스 관련 링크 :&nbsp;<a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964" target="_blank">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964</a></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nbsp;</p>
<div class="text_exposed_show" style="font-size: 15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background-color:="" #ffffff;"="">
   <p style="padding: 0px;">이미 오래전 어렵게 찾아, 어렵게 편집해 올린 유튜브 에키타이안 ( = 안익태)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튜브 조회수는 처참한 지경이다. 뭐 이래서 친일청산 안될 거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확신하고 있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기사에서 언급한 에하라 고이치는 당시 주독 일본 공사가 아니다. 뭐 어쩌 겠는가 기자가 읽은 책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에하라는 공사가 아니라 참사관councilor&nbsp;이다. (이는 전후 독일의 미군정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만주국은 로마에 대사관을 두고 독일 베를린과 함부룩에 공사관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국의 주베를린 공사는 에하라가 아니라 루 이웬 Lu I-Wen이란 인물이다. 북만주 길림성 퉁화현 현장, 만주국의 외무부 고위직을 지내다 만주국 총리 최측근으로 주독 베를린 공사로 39년에 임명되었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lt;코리아환상곡&gt;을 자기표절한 &lt;만주환상곡&gt;을 에키타이안이 베를린에서 연주할 당시 그 가사를 쓴 사람이 에하라다. 오족협화가 주된 내용이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는 베를린 반호수Wannsee 주변 고급 주택가에 있던 에하라의 관저에 주소를 두고 있었고 양인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그런데 아래 사진을 보자. 한국에선 처음 공개되는 거다. 첫번째는 위 내가 올린 안익태 &lt;만주환상곡&gt; 지휘장면중 정체불명의 인물이 비중있게 등장하는 것을 내가 캡쳐한 거다. 주독대사 오시마중장 바로 다음에 등장한다. 이 자가 일본인 에하라인지 만주국의 주독 공사인 루 이웬인지 한 번 비교해 보자. 바로 그 다음 사진이 우리는 도대체 알 리 없는 당시 주독 만주국공사 루 이웬이다. 비슷한 듯 아닌 듯 자신이 없다. 루 이웬은 만주국 공사지만 한족출신이다. 에하라는 비록 직급상 공사는 아니지만 실세였다. 당연하다. 만주국은 푸이가 황제고 한족이 총리였지만, 실세는 일본의 관동군이었다. 이런 권력구도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는 바로 이 만주국 공사관의 실세 에하라의 관저에 기식했던 것이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
      <b>아무튼 나는 잘 모르겠다, 아래 사진 두 인물이 같은지 다른지 ... 비슷하기도 하고.</b>
   </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31173436_zewegzrl.jpg" alt="에하라루이웬1.jpg" style="width: 740px; height: 416px;" />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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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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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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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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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published>2021-12-31T17:35:13+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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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에하라 고이치의 생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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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우연히 찾은 사진 한 장에 담긴 사연이 끝이 없다. 첫번째 사진의 왼쪽은 나치시대 만주국의 베를린공사 여의문(뤼이웬)이다. 오른 쪽은 강원강일 (에하라고이치) 베를린공사관 참사관이다. 그 가운데 인물은 - 내가 파악한 바로 - 나치 외무상 요아힘 폰 립펜트롭일게다. 모르긴 해도 히틀러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찍은 기념사진으로 보인다.
&amp;#038;nbsp;
립펜트롭은 나치패망후 A급 전범으로 처형된다. 사진의 두 아시아인, 뤼이웬은 45년 5월 나치와 만주국이 망한 뒤 어째 어째 중경으로 귀국했다. 메이지대 (일설에 따르면 와세다 대)를 졸업한 그는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에서 퉁화성 성장을 지냈음이 37.6.12자 오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기사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같은 날 인사이동에서보듯이 에하라 고이치는 하얼빈시 차장(일종의 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두사람은 바로 다음해인 1938년 베를린 만주국 공사 및 참사관으로 임명된다. 에하라가 공사관의 2인자인 참사관이라&amp;#038;nbsp;...해서 이상할 일이 아니다. 위 성장급 인사이동에서 보듯 성장급 아니 그 위인 대신급은 거의 한족이지만 차관이나 차장은 일본인이다. 즉 완전식민지인 조선과는 달리 만주는 형식상 오족 특히 한족을 내세웠고 실권은 차장, 차관인 일인이 쥐고 있었다. 이는 해외공관도 마찬가지 였다.

   &amp;#038;nbsp;


   여의문 공사는 귀국후 체포되어 1946.5.11 쿤밍성 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른바 찬일부역자, &amp;#039;한간&amp;#039;이었다. 사진에 보듯이 사형판결문 주문은 "적국과 통모하여 본국에 반역을 도모햐였기에 사형에 처한다. 죽을 때까지 공민권을 박탈하며, 유가족의 필수생활비를 제외한 전재산을 몰수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처형당한 것은 1950년 10월 인민해방군의 운남성 소탕작전때였다. 성장급 이상은 사형에 처했던 &amp;#039;한간&amp;#039; 즉 친일파 처리 법규정에 따른 것이었지만, 다수 만주국 고위 관료가 국공내전때 살아 남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좀 불운(?)했던 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중국엔 친일파 문제는 없다.)
   &amp;#038;nbsp;
   사진의 두사람과 에하라 고이치의 운명은 판이했다. 참사관으로서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놀라운 교분을 쌓았고 심지어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사적인 티파티에도 참석할 정도 였다. 에하라의 베를린 반호수(Wannsee)가 사저엔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하기 전까지 사실상 기식을 했고 베를린을 방문한 슈트라우스도 그 집에서 묶었을 정도다. 에하라가 없이 안익태, 에키타이가 과연 슈트라우스와 연결되었을 지는 전혀 의문이다.
   &amp;#038;nbsp;
   아무튼 사진 속 두사람이 전범 또는 부역자로 처단된 데 반해 에하라 고이치는 나치패망후 만주국의 나머지 공사관 인원을 인솔 소련의 보호를 거쳐 일본에 무사 안착했다. 동경대 법학부를 나온 탓에 이후 그는 1969년 사망할 때까지 유력한 변호사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그 과정에 슈트라우스와 안익태에 관한 수필을 남겼는데 곧 입수되는 대로 번역, 공개할 예정이다. 이 역시 최초 공개 아닌가 한다.
   &amp;#038;nbsp;
   독일, 일본, 만주 3국 모두 패전국이었다. 사진에는 있을 이유가 없지만 살아 남은 자는 에키타이, 그리고 그의 스폰서 에하라였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가 나이가 훨씬 많았던 에하라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1세기가 될 때까지 &amp;#039;애국자&amp;#039;로 칭송받았다.
   &amp;#038;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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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우연히 찾은 사진 한 장에 담긴 사연이 끝이 없다. 첫번째 사진의 왼쪽은 나치시대 만주국의 베를린공사 여의문(뤼이웬)이다. 오른 쪽은 강원강일 (에하라고이치) 베를린공사관 참사관이다. 그 가운데 인물은 - 내가 파악한 바로 - 나치 외무상 요아힘 폰 립펜트롭일게다. 모르긴 해도 히틀러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찍은 기념사진으로 보인다.</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nbsp;</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립펜트롭은 나치패망후 A급 전범으로 처형된다. 사진의 두 아시아인, 뤼이웬은 45년 5월 나치와 만주국이 망한 뒤 어째 어째 중경으로 귀국했다. 메이지대 (일설에 따르면 와세다 대)를 졸업한 그는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에서 퉁화성 성장을 지냈음이 37.6.12자 오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기사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같은 날 인사이동에서보듯이 에하라 고이치는 하얼빈시 차장(일종의 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두사람은 바로 다음해인 1938년 베를린 만주국 공사 및 참사관으로 임명된다. 에하라가 공사관의 2인자인 참사관이라&nbsp;<span class="text_exposed_hide">...</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해서 이상할 일이 아니다. 위 성장급 인사이동에서 보듯 성장급 아니 그 위인 대신급은 거의 한족이지만 차관이나 차장은 일본인이다. 즉 완전식민지인 조선과는 달리 만주는 형식상 오족 특히 한족을 내세웠고 실권은 차장, 차관인 일인이 쥐고 있었다. 이는 해외공관도 마찬가지 였다.</span></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
   <span class="text_exposed_show">&nbsp;</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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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text_exposed_show" style="font-size: 15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background-color:="" #ffffff;"="">
   <p style="padding: 0px;">여의문 공사는 귀국후 체포되어 1946.5.11 쿤밍성 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른바 찬일부역자, '한간'이었다. 사진에 보듯이 사형판결문 주문은 "적국과 통모하여 본국에 반역을 도모햐였기에 사형에 처한다. 죽을 때까지 공민권을 박탈하며, 유가족의 필수생활비를 제외한 전재산을 몰수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처형당한 것은 1950년 10월 인민해방군의 운남성 소탕작전때였다. 성장급 이상은 사형에 처했던 '한간' 즉 친일파 처리 법규정에 따른 것이었지만, 다수 만주국 고위 관료가 국공내전때 살아 남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좀 불운(?)했던 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중국엔 친일파 문제는 없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사진의 두사람과 에하라 고이치의 운명은 판이했다. 참사관으로서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놀라운 교분을 쌓았고 심지어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사적인 티파티에도 참석할 정도 였다. 에하라의 베를린 반호수(Wannsee)가 사저엔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하기 전까지 사실상 기식을 했고 베를린을 방문한 슈트라우스도 그 집에서 묶었을 정도다. 에하라가 없이 안익태, 에키타이가 과연 슈트라우스와 연결되었을 지는 전혀 의문이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아무튼 사진 속 두사람이 전범 또는 부역자로 처단된 데 반해 에하라 고이치는 나치패망후 만주국의 나머지 공사관 인원을 인솔 소련의 보호를 거쳐 일본에 무사 안착했다. 동경대 법학부를 나온 탓에 이후 그는 1969년 사망할 때까지 유력한 변호사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그 과정에 슈트라우스와 안익태에 관한 수필을 남겼는데 곧 입수되는 대로 번역, 공개할 예정이다. 이 역시 최초 공개 아닌가 한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독일, 일본, 만주 3국 모두 패전국이었다. 사진에는 있을 이유가 없지만 살아 남은 자는 에키타이, 그리고 그의 스폰서 에하라였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가 나이가 훨씬 많았던 에하라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1세기가 될 때까지 '애국자'로 칭송받았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31173034_wcwaabdy.jpg" alt="에하라_고이치1.jpg" style="width: 446px; height: 643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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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category label="자료실|연구자료" term="20240721145047_8219|20240721145732_1988"/>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6:48:52+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1-12-31T17:30:57+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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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에하라 고이치와 안익태] 드디어, 에하라가 입을 열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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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amp;#038;nbsp;
[에하라 고이치와 안익태] 드디어, 에하라가 입을 열었다. 아니 벌써 1950년에 입을 열었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허기사 안익태가 만주환상곡을 지휘한 걸 안 것도 고작 10년밖에 안되니 뭐 놀랄 일도 아니다. 아무튼 전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패전후 일본에서 이제는 어였한 중견변호사로 안익태&amp;#039;군&amp;#039;에 대해 있었던 일을 &amp;#038;lt;레코드예술&amp;#038;gt;이란 잡지에 기고했다. 물론 뿌듯한 표정이 곳곳에 묻어 있다. 정확한 전문 번역은 나오는 대로 읽기로 하고, 우선 내가 초벌번역한 몇 장면만 보자. 아 참, 한국 최초 개봉이다!
&amp;#038;nbsp;
1) 언제 처음 만났을까?"1942년 가을, 나는 공무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 있었다. 명치절 아침 일본공사관 의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기미가요제창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청년이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보기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상이었다. 식후에 T공사로부터 그가 당시 유럽유학중인 지휘자겸 작곡가인 안익태군이라는 소개를&amp;#038;nbsp;...받았다. 안군은 당일 오후 연주회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다 하면서 나를 연주회에 초대하였다."

   (내가 보기에 에하라의 연도표기는 착오이다. 다른 여러 자료를 대조해 보건대 1942년이 아니라 그 이전이다. 아무튼 이 시점에 이미 안익태는 일본외교공관에 출입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amp;#038;nbsp;


   2) 그렇다면 안익태는 왜 베를린으로 가서 일인 외교관의 집에 기식하게 되었는가?"유럽에서 안은 빈에서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에게서 지휘를 지도받고, 부다페스트에서 코다이Zoltan Kodaly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유학기간이 지나간 뒤에도 미국의 어떤 노은행가로부터 송금을 받아 그럭저럭 연구를 이어나가다가, 전쟁으로 인해 송금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유럽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나에게 상담받기 위해 찾아 왔다. 안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대성시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우리의 작은 힘이라도 보탤 그런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다. &amp;#039;어찌되든 내 집으로 와라 ....&amp;#039;는 것으로 되어,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되었다."
   
      (독소전이 1941년 6월 개전되는 데, 위 안을 처음 본 때가 1942년이라는 것은 에하라의 착오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안을 처음 본 시점은 1940년일 수도 있다)
   
   &amp;#038;nbsp;
   3) 그러면 &amp;#038;lt;만주환상곡&amp;#038;gt;은 어찌 된 걸까?"안군은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보통은 접근이 힘든 노대가의 환심을 산다는 의미에서 그런 수완이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완이라기 보다 그의 천성이라 말하는 것이 낫겠다. 그 당시 안익태는 중국의 멜로디를 따고, 나의 작사부분을 곡의 말미 합창부분에 넣어 한 시간 정도의 연주가 요구되는 그런 축전곡을 만들었다. 빈에서 발표할 때에 슈트라우스 자신이 연주회장에 나와 곡의 영광된 출발을 기뻐해 주었다."
   
      ("중국의 멜로디"는 또 뭔가?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그것은 한나라때 소무의 영웅담을 찬양한 중국의 유명한 민요 &amp;#039;소무목양 (蘇武牧羊)&amp;#039;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 하면 만주국의 두번째 국가가 바로 이 소무목양의 멜로디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하라가 작사한 것이 만주축전곡의 제4악장 오족협화를 찬양한 바로 그 부분이다. 지금 우리 애국가 가사가 놓여 있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에하라는 보기 드문 음악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시인 모리케를 일어로 번역출판한 사람이다)
   
   &amp;#038;nbsp;
   에하라는 자신의 동생이 안이 나온 동경국립음악원의 동문임을 들어 안&amp;#039;군&amp;#039;을 친동생으로 여겼다고 다른 글에서 밝히고 있다. 아무튼 이로써 도대체 언제 어떤 이유에서 안&amp;#039;군&amp;#039;이 에하라 고이치를 만나 그의 사택에서 기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슈트라우스와 어떻게 교분을 쌓게 되었는 지 적어도 한 쪽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다. 에하라 자신이 만주국 참사관이었음에도 이 글에서는 "변호사, 전 주독 외교관"이라 약력을 밝혀 &amp;#039;만주&amp;#039;를 의식적으로 삭제하고, 안이 작곡한 곡도 만주국이었음을 말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안이 작곡한 &amp;#038;lt;만주국&amp;#038;gt;에 실제 만주국의 국가에 사용된 중국민요가 포함되어 있었고, 에하라가 작사자 임을 스스로 밝혔음은 분명 새로운 사실이다.
   &amp;#038;nbsp;
   에하라의 기억속에 안&amp;#039;군&amp;#039;은 술도 담배도 여자도 모르는 오직 하나 아는 것은 음악뿐인 그런 열심히 공부하는 &amp;#039;동생&amp;#039;으로 재현된다. 즉 식민지 지배/피지배관계는 사람좋은 에하라의 기억속에 형/동생의 관계 즉 그런 무의식으로 치환되어 있다. 하지만 피색깔까지 모든 것이 정치적인 당대 파시즘의 세계관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을 터, 오갈 데 없는 안&amp;#039;군&amp;#039;을 거저 먹여주지는 않았을 것이고 안&amp;#039;군&amp;#039; 역시 여기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일종의 거래 즉 등가교환의 법칙이 작용했을 거라는 말이다.
   &amp;#038;nbsp;
   여전히 안&amp;#039;군&amp;#039; 구하기에 미련을 둔 &amp;#038;lt;조선&amp;#038;gt;은 최근 한예종의 안익태연구가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있다. “친일 여부에 대해 짧게 답해야 한다면 그[안익태]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답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amp;#038;nbsp;
   도대체 무슨 말일까? "해방될 줄 내가 알았나" 바로 그런 말과 질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얼마전에는 음악학자 진환주가 안을 &amp;#039;문화예술주의자&amp;#039;로 보자고 한다. 예술가는 &amp;#039;투사&amp;#039;가 아니며, 안은 우리 민요의 선율을 세계에 알렸지 않냐는 말이다. 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예술가이기 때문에 무방하다는 말일까? 아니면 유명하면 용서된다는 말일까?
   &amp;#038;nbsp;
   최근의 친일담론은 갈수록 &amp;#039;뻔뻔해&amp;#039;지는 게 특징이다. 이런 궤변과 요설이 백주에 인쇄되어 나돌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까. 꼴보수 드골도 나치부역자들에 대해서는 기관총을 난사했고, 장개석도 &amp;#039;한간&amp;#039;에 대해서 할 만큼은 했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amp;#039;민족&amp;#039;을 갖고 오지 못한 한국의 보수와 특히 그 기독교 변종에게 안익태는 그야말로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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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31171833_xfsukbfk.jpg" alt="레코드_예술2.jpg" style="width: 740px; height: 350px;" /></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nbsp;</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에하라 고이치와 안익태] 드디어, 에하라가 입을 열었다. 아니 벌써 1950년에 입을 열었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허기사 안익태가 만주환상곡을 지휘한 걸 안 것도 고작 10년밖에 안되니 뭐 놀랄 일도 아니다. 아무튼 전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패전후 일본에서 이제는 어였한 중견변호사로 안익태'군'에 대해 있었던 일을 &lt;레코드예술&gt;이란 잡지에 기고했다. 물론 뿌듯한 표정이 곳곳에 묻어 있다. 정확한 전문 번역은 나오는 대로 읽기로 하고, 우선 내가 초벌번역한 몇 장면만 보자. 아 참, 한국 최초 개봉이다!</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nbsp;</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1) 언제 처음 만났을까?<br />"1942년 가을, 나는 공무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 있었다. 명치절 아침 일본공사관 의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기미가요제창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청년이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보기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상이었다. 식후에 T공사로부터 그가 당시 유럽유학중인 지휘자겸 작곡가인 안익태군이라는 소개를&nbsp;<span class="text_exposed_hide">...</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받았다. 안군은 당일 오후 연주회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다 하면서 나를 연주회에 초대하였다."</span></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
   <span class="text_exposed_show"><br />(내가 보기에 에하라의 연도표기는 착오이다. 다른 여러 자료를 대조해 보건대 1942년이 아니라 그 이전이다. 아무튼 이 시점에 이미 안익태는 일본외교공관에 출입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span>
</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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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style="padding: 0px;">2) 그렇다면 안익태는 왜 베를린으로 가서 일인 외교관의 집에 기식하게 되었는가?<br />"유럽에서 안은 빈에서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에게서 지휘를 지도받고, 부다페스트에서 코다이Zoltan Kodaly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유학기간이 지나간 뒤에도 미국의 어떤 노은행가로부터 송금을 받아 그럭저럭 연구를 이어나가다가, 전쟁으로 인해 송금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유럽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나에게 상담받기 위해 찾아 왔다. 안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대성시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우리의 작은 힘이라도 보탤 그런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되든 내 집으로 와라 ....'는 것으로 되어,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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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독소전이 1941년 6월 개전되는 데, 위 안을 처음 본 때가 1942년이라는 것은 에하라의 착오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안을 처음 본 시점은 1940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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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3) 그러면 &lt;만주환상곡&gt;은 어찌 된 걸까?<br />"안군은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보통은 접근이 힘든 노대가의 환심을 산다는 의미에서 그런 수완이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완이라기 보다 그의 천성이라 말하는 것이 낫겠다. 그 당시 안익태는 중국의 멜로디를 따고, 나의 작사부분을 곡의 말미 합창부분에 넣어 한 시간 정도의 연주가 요구되는 그런 축전곡을 만들었다. 빈에서 발표할 때에 슈트라우스 자신이 연주회장에 나와 곡의 영광된 출발을 기뻐해 주었다."</p>
   <p style="padding: 0px;">
      <br />("중국의 멜로디"는 또 뭔가?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그것은 한나라때 소무의 영웅담을 찬양한 중국의 유명한 민요 '소무목양 (蘇武牧羊)'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 하면 만주국의 두번째 국가가 바로 이 소무목양의 멜로디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하라가 작사한 것이 만주축전곡의 제4악장 오족협화를 찬양한 바로 그 부분이다. 지금 우리 애국가 가사가 놓여 있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에하라는 보기 드문 음악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시인 모리케를 일어로 번역출판한 사람이다)
   </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에하라는 자신의 동생이 안이 나온 동경국립음악원의 동문임을 들어 안'군'을 친동생으로 여겼다고 다른 글에서 밝히고 있다. 아무튼 이로써 도대체 언제 어떤 이유에서 안'군'이 에하라 고이치를 만나 그의 사택에서 기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슈트라우스와 어떻게 교분을 쌓게 되었는 지 적어도 한 쪽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다. 에하라 자신이 만주국 참사관이었음에도 이 글에서는 "변호사, 전 주독 외교관"이라 약력을 밝혀 '만주'를 의식적으로 삭제하고, 안이 작곡한 곡도 만주국이었음을 말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안이 작곡한 &lt;만주국&gt;에 실제 만주국의 국가에 사용된 중국민요가 포함되어 있었고, 에하라가 작사자 임을 스스로 밝혔음은 분명 새로운 사실이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에하라의 기억속에 안'군'은 술도 담배도 여자도 모르는 오직 하나 아는 것은 음악뿐인 그런 열심히 공부하는 '동생'으로 재현된다. 즉 식민지 지배/피지배관계는 사람좋은 에하라의 기억속에 형/동생의 관계 즉 그런 무의식으로 치환되어 있다. 하지만 피색깔까지 모든 것이 정치적인 당대 파시즘의 세계관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을 터, 오갈 데 없는 안'군'을 거저 먹여주지는 않았을 것이고 안'군' 역시 여기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일종의 거래 즉 등가교환의 법칙이 작용했을 거라는 말이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여전히 안'군' 구하기에 미련을 둔 &lt;조선&gt;은 최근 한예종의 안익태연구가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있다. “친일 여부에 대해 짧게 답해야 한다면 그[안익태]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답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도대체 무슨 말일까? "해방될 줄 내가 알았나" 바로 그런 말과 질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얼마전에는 음악학자 진환주가 안을 '문화예술주의자'로 보자고 한다. 예술가는 '투사'가 아니며, 안은 우리 민요의 선율을 세계에 알렸지 않냐는 말이다. 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예술가이기 때문에 무방하다는 말일까? 아니면 유명하면 용서된다는 말일까?</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최근의 친일담론은 갈수록 '뻔뻔해'지는 게 특징이다. 이런 궤변과 요설이 백주에 인쇄되어 나돌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까. 꼴보수 드골도 나치부역자들에 대해서는 기관총을 난사했고, 장개석도 '한간'에 대해서 할 만큼은 했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민족'을 갖고 오지 못한 한국의 보수와 특히 그 기독교 변종에게 안익태는 그야말로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p>
   </div>
]]></content:encoded>

<atom:category label="자료실|칼럼.기고" term="20240721145047_8219|20240721145741_6388"/>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6:51:45+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1-12-31T17:18:41+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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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286</guid>
<title><![CDATA[[단독]안익태, 일본 명절에 기미가요 연주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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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일단 기사화했다. 전에 소개한 베를린주재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1952년 한국전쟁중에 기고한 글 말이다. 이 최초로 공개된 에하라의 글이 갖는 의미는 크게 네가지다.
&amp;#038;nbsp;
1. 에하라의 기억에 의하면, 1941년 일본 4대명절인 명치절 11월 3일 아침 루마니아 일본공사관, 식순에 따른 기미가요 제창때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던 안익태 아니 에키타이를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하필이면 기미가요 반주를 하고 있었다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amp;#038;nbsp;
2. 41년 6월 당시 독소전이 개전되고 일본은 다음 달 12월 진주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헝가리 일본공사관은 현지 일인들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었다. 에키타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키타이로서는 이대로 귀국을 할 경우 자신의 미래에 보탬이 될 게 없었고, 해서 심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습직후 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런 사정을 알리...&amp;#038;nbsp;없는 에키타이로서 내집에 와서 있어라는 에하라참사관의 제안은 한줄이 구원의 빛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안익태 연구에서 바로 이 대목이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이제 한 쪽 진술이 나온 것이다. 즉 에키타이가 나에게 상담을 요청해 그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를 내 집에 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에키타이 쪽의 진술은 현재 없다. 이후 42년, 43년 에키타이는 커리어에 정점을 찍는다. 나치가 망할 때까지도 에키타이의 집주소는 에하라의 집 바로 거기였다. 구스타프 프라이탁가 15번지, 베를린 반호숫가 지금도 쾌적한 고급 주택가다.

   &amp;#038;nbsp;


   3. 11월 3일 저녁 부카레스트, 자신의 음악회에 에하라 참사관을 초대한 에키타이는 &amp;#038;lt;코리아환상곡&amp;#038;gt;을 &amp;#039;우라카이&amp;#039;, 자기 표절한 &amp;#038;lt;교쿠토(극동)&amp;#038;gt;를 일본 궁중아악을 변주한 &amp;#038;lt;에텐라쿠&amp;#038;gt;와 함께 연주해 호평을 받았다. 이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루마니아공사는 본국 즉 외무성과 아울러 조선총독부에도 보고했다. 에하라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는 1942년 9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회를 지휘했고 그 동영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오래전에 그 동영상의 일부를 유튜브에 올려 놓았다) . 이 곡은 기본적으로 &amp;#038;lt;교쿠토&amp;#038;gt;에 마지막 4악장 합창부를 더해 총 4악장으로 된 것이었다. 에하라는 이 곡의 마지막 4악장의 가사를 자신이 썼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가사 내용은 이미 밝혀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 중국민요의 멜로디를 따왔다고 말한다. 이 민요가 바로 만주국 국가에도 사용된 &amp;#039;소무목양&amp;#039;이다.
   &amp;#038;nbsp;
   4. 에하라는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처럼 말한다.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에하라는 1942년 3월 14일 저녁 지금도 영업중인 비엔나의 유명한 레스토랑 &amp;#038;lt;드라이 후사렌(Drei Husaren: 3인의 기사들)&amp;#038;gt; 별실에서 슈트라우스 부부와 에키타이 이렇게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42년 6월 슈트라우스의 첫 오페라 &amp;#038;lt;군트람&amp;#038;gt;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베를린 방문시 자신의 집에 머물것을 제안했고 슈트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열흘 가까이 에하라의 집에 머무는 동안 슈트라우스는 생일을 맞았다. 그런데 극소수의 사람이 에하라의 집 생일축하파티에 초대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치 선전성 음악담당 국장(에라하는 부장이라고 했다) 하인츠 티에첸Heinz Tietjen이었다. 티에첸은 나치독일의 음악정책을 총괄하는 실세중 실세였다. 아무튼 에하라참사관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아니라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를 연결해 준 &amp;#039;수완&amp;#039;을 발휘했다고 했지만, 에하라집에 기식하는 동안 슈트라우와 더욱 가까웠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만주환상곡을 연주하고 있는 에키타이 안
      
   
   &amp;#038;nbsp;
   에하라의 글로 인해 가리워져 있던 에키타이에 관련된 디테일이 보다 또렸해졌다. 하얼빈 세관장과 부시장을 지낸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의 그가 그저 에키타이가 &amp;#039;동생&amp;#039;같고 그의 &amp;#039;대성&amp;#039;을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 집에 머물게 했다고 믿는 다면 글쎄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 전쟁중이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에하라는 대단한 음악애호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본 아니 만주국의 고위외교관이었다. 아무런 정치적 목적없이 에키타이의 뒤를 바줄 수는 없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반면 에키타이로서는 본국송환을 모면케 해주고, 밥도 주고, 살 집도 주고, 돈도 벌게 해주고, 유명하게 해주고, 또 슈트라우스와 친하게 만들어 주고 혜택으로 보자면 이만 저만 남는 장사가 아니다. 그런 에하라에게 &amp;#038;lt;코리아판타지&amp;#038;gt;를 우라카이한 &amp;#038;lt;만주국&amp;#038;gt; 하나 만들어 주는 거야 인간의 정리상 마땅한 도리라 하겠다. 흔히 안익태의 애국가를 임시정부가 그 사용을 허가해 줬다고 애써 그 정통성을 찾는다. 그런데 바로 그 임시정부가 에키타이가 에하라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한 바로 그 즈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임시정부로 보자면 안익태는 도무지 어쩔 수 없을 정도의 반역행위를 한 셈이다.
   &amp;#038;nbsp;
   관련기사 링크&amp;#038;nbsp;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310600015&amp;#038;amp;code=960201&amp;#038;amp;nv=stand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일단 기사화했다. 전에 소개한 베를린주재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1952년 한국전쟁중에 기고한 글 말이다. 이 최초로 공개된 에하라의 글이 갖는 의미는 크게 네가지다.</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nbsp;</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1. 에하라의 기억에 의하면, 1941년 일본 4대명절인 명치절 11월 3일 아침 루마니아 일본공사관, 식순에 따른 기미가요 제창때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던 안익태 아니 에키타이를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하필이면 기미가요 반주를 하고 있었다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nbsp;</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2. 41년 6월 당시 독소전이 개전되고 일본은 다음 달 12월 진주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헝가리 일본공사관은 현지 일인들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었다. 에키타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키타이로서는 이대로 귀국을 할 경우 자신의 미래에 보탬이 될 게 없었고, 해서 심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습직후 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런 사정을 알리<span class="text_exposed_hide">...</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nbsp;없는 에키타이로서 내집에 와서 있어라는 에하라참사관의 제안은 한줄이 구원의 빛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안익태 연구에서 바로 이 대목이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이제 한 쪽 진술이 나온 것이다. 즉 에키타이가 나에게 상담을 요청해 그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를 내 집에 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에키타이 쪽의 진술은 현재 없다. 이후 42년, 43년 에키타이는 커리어에 정점을 찍는다. 나치가 망할 때까지도 에키타이의 집주소는 에하라의 집 바로 거기였다. 구스타프 프라이탁가 15번지, 베를린 반호숫가 지금도 쾌적한 고급 주택가다.</span></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
   <span class="text_exposed_show">&nbsp;</span>
</p>
<div class="text_exposed_show" style="font-size: 15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background-color:="" #ffffff;"="">
   <p style="padding: 0px;">3. 11월 3일 저녁 부카레스트, 자신의 음악회에 에하라 참사관을 초대한 에키타이는 &lt;코리아환상곡&gt;을 '우라카이', 자기 표절한 &lt;교쿠토(극동)&gt;를 일본 궁중아악을 변주한 &lt;에텐라쿠&gt;와 함께 연주해 호평을 받았다. 이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루마니아공사는 본국 즉 외무성과 아울러 조선총독부에도 보고했다. 에하라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는 1942년 9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회를 지휘했고 그 동영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오래전에 그 동영상의 일부를 유튜브에 올려 놓았다) . 이 곡은 기본적으로 &lt;교쿠토&gt;에 마지막 4악장 합창부를 더해 총 4악장으로 된 것이었다. 에하라는 이 곡의 마지막 4악장의 가사를 자신이 썼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가사 내용은 이미 밝혀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 중국민요의 멜로디를 따왔다고 말한다. 이 민요가 바로 만주국 국가에도 사용된 '소무목양'이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4. 에하라는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처럼 말한다.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에하라는 1942년 3월 14일 저녁 지금도 영업중인 비엔나의 유명한 레스토랑 &lt;드라이 후사렌(Drei Husaren: 3인의 기사들)&gt; 별실에서 슈트라우스 부부와 에키타이 이렇게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42년 6월 슈트라우스의 첫 오페라 &lt;군트람&gt;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베를린 방문시 자신의 집에 머물것을 제안했고 슈트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열흘 가까이 에하라의 집에 머무는 동안 슈트라우스는 생일을 맞았다. 그런데 극소수의 사람이 에하라의 집 생일축하파티에 초대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치 선전성 음악담당 국장(에라하는 부장이라고 했다) 하인츠 티에첸Heinz Tietjen이었다. 티에첸은 나치독일의 음악정책을 총괄하는 실세중 실세였다. 아무튼 에하라참사관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아니라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를 연결해 준 '수완'을 발휘했다고 했지만, 에하라집에 기식하는 동안 슈트라우와 더욱 가까웠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p>
   <div class="cheditor-caption-wrapper">
      <figure class="cheditor-caption" style="border: 0px solid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fffff; margin: 0px; text-align: left; display: inline-block; width: 700px;">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65349_kxxaymqk.jpg" alt="안익태 - 프랑스.jpg" style="width: 700px; height: 452px;" />
         <figcaption class="cheditor-caption-text" style="margin: 10px 0px 10px 0px;color:#999; text-align: left; line-height: 18px; font-size: 12px; letter-spacing: -0.04em; text-align:justify;">만주환상곡을 연주하고 있는 에키타이 안</fig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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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p>&nbsp;</p>
   <p style="padding: 0px;">에하라의 글로 인해 가리워져 있던 에키타이에 관련된 디테일이 보다 또렸해졌다. 하얼빈 세관장과 부시장을 지낸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의 그가 그저 에키타이가 '동생'같고 그의 '대성'을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 집에 머물게 했다고 믿는 다면 글쎄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 전쟁중이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에하라는 대단한 음악애호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본 아니 만주국의 고위외교관이었다. 아무런 정치적 목적없이 에키타이의 뒤를 바줄 수는 없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반면 에키타이로서는 본국송환을 모면케 해주고, 밥도 주고, 살 집도 주고, 돈도 벌게 해주고, 유명하게 해주고, 또 슈트라우스와 친하게 만들어 주고 혜택으로 보자면 이만 저만 남는 장사가 아니다. 그런 에하라에게 &lt;코리아판타지&gt;를 우라카이한 &lt;만주국&gt; 하나 만들어 주는 거야 인간의 정리상 마땅한 도리라 하겠다. 흔히 안익태의 애국가를 임시정부가 그 사용을 허가해 줬다고 애써 그 정통성을 찾는다. 그런데 바로 그 임시정부가 에키타이가 에하라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한 바로 그 즈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임시정부로 보자면 안익태는 도무지 어쩔 수 없을 정도의 반역행위를 한 셈이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관련기사 링크&nbsp;<a href="http://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310600015&amp;code=960201&amp;nv=stand" target="_blank">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310600015&amp;code=960201&amp;nv=stand</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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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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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안익태군의 편모(片貌) by 에하라 고이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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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 아래글은 일본 잡지 &amp;#038;lt;레코드예술&amp;#038;gt; 1952년에 실린 에하라 고이치의 글이다. 이미 TV, 라디오를 비롯 대부분의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따로 소개는 하지 않겠다. 원래는 나의 상세각주가 붙어 있었는데 편집과정에서 다 빠졌다. 여기에 원래 언론사에 보냈던 데로 각주를 되살려 다시 싣는다. 그리고 페북이 각주를 지원하지 않아, 혹은 내가 그 기능을 몰라 (* .... )식으로 내주 방식으로 달았다. 양도 많고 좀 보기에 불편이 있겠지만 양해를 바란다. 그리고 에하라가 기고한 &amp;#038;lt;슈트라우스의 추억&amp;#038;gt;이라는 또 한편의 글도 번역해 올 릴 예정이다.

안익태군의 편모(片貌) - 에하라 고이치
"1942년 가을 (*1942년이라는 연도는 에하라의 착오다. 이 글의 뒷 부분에서도 나오듯 “독소전이 개시되는 해”부터 베를린에서 같이 살았다고 되어 있듯이, 독소전은 1941년 6월이다. 더욱이 허영한이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안익태가 부카레스트에서 두 번째 연주회를 가진 날은 1941년 11월 2일이다. 명치절이 11월 3일이지만 시차를 감안하면 하루 당겨 11월 2일이 현지 시간으로 명치절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에라하는 이 날 안익태가 에텐라쿠(월천악)과 베토벤 교약곡 6번을 연주했다고 하나,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로시니 &amp;#038;lt;세미라미데서곡&amp;#038;gt;, 바흐 &amp;#038;lt;토카타와 푸가 C 장조&amp;#038;gt;, &amp;#038;lt;에텐라쿠&amp;#038;gt; 그리고 후반부에는 안익태 작곡의 &amp;#038;lt;먼 동양에서&amp;#038;gt;를 연주했다고 되어 있다. 바로 이 &amp;#038;lt;먼 동양에서&amp;#038;gt;가 &amp;#038;lt;코리아환상곡&amp;#038;gt;의 또 하나의 이름 &amp;#038;lt;교쿠토(極東)&amp;#038;gt;이다. 그런데 왜 에하라가 그 날 안익태가 베토벤 6번 전원교향곡을 지휘한 걸로 기억했는 지 알 수 없으나, 추측건대 그날 곡 해설에 ‘전주곡’, ’‘전원’, ’춤’ 이렇게 3악장으로 되어 있어 이런 착오가 발생했지 않을 까 한다.), 나는 공무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 있었다. 명치절 (*일본의 이른바 4대명절중 하나. 1월 1일, 기원절, 천장절, 명치절로서 11월 3일이다.) 아침 일본공사관 의식에 참석했다, 그곳에 기미가요 제창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흰 넥타이를 맨 청년이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보기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상이었다. 식후에 T공사 (* 당시 루마니아(羅國)주재 쓰쓰이 키요시(筒井潔) 공사를 말한다. 쓰쓰이는 이 날 연주회 후 본국과 조선총독부에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알리는 보고서를 보낸다. 이 문서는 지금도 남아 있다)

   로부터 그가 당시 유럽 유학중인 지휘자 겸 작곡가 안익태군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안군은 당일 오후 연주회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다 하면서 나를 연주회에 초대하였다. 다행히 휴일이었고 (*1941년 11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특별히 예정된 것도 없었으며 연주회장도 내 숙소에서 코에 닿을 거리인 왕립음악당이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음악당은 만원이었다. 곡목은 자작곡인 월천악 (*에켄라쿠(월천악)는 일본의 대표적인 궁중아악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전시 일본수상의 동생이자 일본귀족이었던 고노에 히데마루와 에키타이 안의 에텐라쿠 두가지 버전이 연주되었다. 두 버전을 비교해 들어 보면 전자가 좀 더 정적이고 원래 테마에 충실하다면, 에키타이의 그것은 좀 더 동적이고 화려해 대중들에게 좀 더 어필할 수 있었다. 에키타이가 당시 이 에텐라쿠를 지휘하는 장면은 유튜브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과 베토벤 교향곡 6번이었다. (* 위 각주 1)을 참조)

   조선에서 태어난 안군이 월천악을 교향곡화한 것에 대해 약간 기이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조선의 궁정에 다수의 아악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들보다 아악에 대해 친밀하고 깊이 있게 알고 있지 않을 까하는 등의 소박한 상상을 했지만, 특히 나로선 극동의 한 음악생도가 얼마나 큰 성공을 했는지를 지켜 보는 것도 흥미로웠기에, 나는 정해진 시각에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amp;#038;nbsp;
첫번째 아악의 테마가 반복되는 사이 기대치 못했던 배리에이션이 나타났고, 기교 넘치는 타악기 구사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흠…’하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교향시는 우아한 월천악의 멜로디에 조선의 궁정악을 더하여 극적인 효과를 내며 내 가슴을 울렸다.
&amp;#038;nbsp;
연주가 끝나고 내가 물품보관소 옷장에서 외투를 받아 들려 하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루마니아인 부인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 음악은 어떻던가요? 저 동양의 멜로디! 그 동양의 테크닉!..” 감탄하더니, 이내 스스로 놀라며, “죄송해요. 제가 감격해서 그만… 무의식 중에 지휘자와 같은 나라 사람인줄 알았어요. 근데, 정말 근사한 공연이었어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저도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만, 실로 유쾌했습니다” 라고 맞장구 쳤다. 그러자 부인은 “그래요. 베토벤 연주도 물론 꽤나 대단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베토벤 곡은 많이 들어봤기에, 아무래도 둔감해진 측면이 적지 않아요…. 그러나 극동의 음악은… 어떻게 이렇게나 근사할 수 있죠! 맞아요. 이렇게나 감격한 사람은 저뿐만이 아닐 거에요. 오늘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이 그럴 거에요. 정말 좋은 음악회였어요!”
&amp;#038;nbsp;
문밖으로 나서자, 광장 멀리 왕궁의 지붕 끝에 남국의 석양이 남아 있었다. 넓은 포장도로를 걸으며, 마음속으로 나도 모르게 “오늘은 정말이지 경축일일세”를 연신 반복하고 있었다.
&amp;#038;nbsp;
안군은 국립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고학하는 사이, (*필라델피아 콩쿨에 입선하여 안익태가 필라델피아 필하모니 콩쿨에 입선해서 유럽 유학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인이 필요하다) 유럽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유럽에서 안군은 빈에서 바인가르트너 Felix Weingartner에게서 지휘를 지도받고, 부다페스트에서 코다이Zoltan Kodaly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유학기간이 지나간 뒤에도 미국의 어떤 노은행가로부터 송금을 받아 (*이 또한 확인이 안되는 말이다. 왜냐 하면 온갖 허구와 미사여구로 가득한 김경래의 안익태 전기에도 이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럭저럭 연구를 이어나가다가, 전쟁으로 인해 송금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유럽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안군은 나에게 상담을 받고자 찾아 왔다. 안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대성시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우리의 작은 힘이라도 보탤 그런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되든 내 집에 오면 ....’, 하는 것으로 되어,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
&amp;#038;nbsp;
안군은 참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음악회와 오페라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는 담배도, 술도 하지 않았으며, 여성과의 교제도 삼가고, 먹고 자는 것 빼고는 오로지 음악에 빠져 생활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작곡을 시도했다. 당시, 내가 뫼리케 (*Eduard Friedrich Mörike(1804.9.8 -1875. 6.4) 독일 서정시인. 그의 시를 최초로 일어로 번역한 사람이 에하라 고이치다.)의 시를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는 여기에 음을 붙여 작곡하였다.- ‘풍주금’과 ‘4월의 노란나비’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완성하자, 우에노 (일본 동경의 지명)에 살던 마리아 토르씨에게 노래를 부탁했다.
&amp;#038;nbsp;
우하라 재유再遊’를 교향시로 만들고 싶다고도 말했지만, 이는 나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본래 첼리스트였기에 첼로 독주곡 ‘흰백합화’ 등을 자작, 자연하기도 했다.
&amp;#038;nbsp;
안군은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범접하기 어려운 노대가의 환심을 산 그의 수완에 우리들도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수완이라기 보다 그의 천성이자 타고난 능력이라 말하는 것이 낫겠다. 그 당시 그는 중국의 멜로디를 따,(* "중국의 멜로디"는 또 뭔가?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그것은 한나라때 소무의 영웅담을 찬양한 중국의 유명한 민요 &amp;#039;소무목양 (蘇武牧羊)&amp;#039;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 하면 만주국의 두번째 국가가 바로 이 ‘소무목양’의 멜로디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하라가 작사한 것이 만주축전곡의 제4악장 오족협화를 찬양한 바로 그 부분이다. 지금 우리 애국가 가사가 놓여 있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에하라는 보기 드문 음악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시인 뫼리케를 일어로 번역출판한 사람이다) 나의 작사부분을 곡 말미 합창부분에 넣어 한 시간 정도의 연주가 요구되는 그런 축전곡을 만들었다. 빈에서 이를 발표할 때를 (*슈트라우스는 자신이 작곡한 황기 2,600년을 봉축하기 위한 &amp;#038;lt;일본축전곡&amp;#038;gt;을 안익태가 지휘한 42년 3월 12일자 빈의 연주회와 1년 뒤인 43년 2월 11일 연주회에 참석했다) 비롯해, 그 밖의 안군의 연주회장에도 슈트라우스 자신이 직접 그의 연주회장에 참석해 곡의 영광된 출발을 기뻐해 주었다.
&amp;#038;nbsp;
어느 날, 갑자기 근무처로 전화 벨이 울렸다. 베를린 필하모니의 매니저였다. (*실제 1943년 5월 3일자 베를린 필하모니 총감독 게르하르트 폰 베스터만Gerhart von Westerman은 베를린 일독협회에 보낸 편지에서 고노에백작보다 에키타이 안을 여름시즌에 출연시킬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다. 에키타이안은 1943년 8월 18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비정규 시즌 지휘를 맡았다)

   “신인 소개 차원에서 안군에게 지휘를 맡기고 싶은데요, 안군은 어떻게 생각할까요?”라는 이야기였다. 안군의 소원이 실현될 때가 도래한 셈이었다. 몇 일 전 한 모임 자리에서 이 사람이 “과거에는 돈을 내면 (*실제 고노에 히데마로는 1920년대 자신이 비용을 내고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한 적이 있다) 필하모니에서 지휘도 할 수 있었지만 현재로선 그것도 힘들어졌어요. 회(會) (*여기서 ‘회’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건대 독일협회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일 가능성이 높다)쪽에서 바로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에게 의뢰하는 길만이 유일하니 더욱 어려워졌죠.”라는 이야기를 한 직후였기에 다소 의외였다. 안군이 때마침 부다페스트로 연주여행을 떠나 있었던 터라 내가 있는 이 곳에 연락이 온 것이기에 조속히 연락을 취해 이야기를 정리했다.

&amp;#038;nbsp;
그는 베를린 외에도 함부르크, 빈, 로마, 파리, 부다페스트, 부카레스트와 같은 유럽 각지에서 지휘봉을 흔들었다. 1944년에는 파리의 팔레 샤이요에서 3일간 베에토벤축제를 시도했다. 첫째 날은 티보Jacques Thibaud와 바이올린협주곡을, 둘째 날은 코르토(Alfred Cortot)와 황제 협주곡을, 그리고 셋째 날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하여 이를 성황리에 마쳤다. (*파리의 에펠탑앞에 위치한 Palais de Chaillot은 나치 점령기 베토벤축제의 무대였다. 나치 점령하 파리에서는 독일의 ‘문화적’ 우월을 과시하기 위해 나치선전성이 주도하는 수많은 연주회가 개최되었다. 피아니스 빌헬름 켐프, 발터 기제킹이 단골로 출연했고, 자크 티보나 알프레도 코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키타이 안은 티보와 1944년 4월 14일에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을, 4월 18일에는 코르토와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를 협연했다. 그리고 4월 21일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지휘했다)

   그 후, 그는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가서 베를린 이 함락되는 날까지 나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하라는 베를린 함락이후 만주국 공사관의 인원을 인솔 모스크바를 거쳐 일본으로 귀국, 변호사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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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와 같은 순진함,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그 희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멈추지 않은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는 그가 가는 앞에는 어떠한 장애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그는 지금도 여전히 유럽천지를 종횡으로 활보하고 있다.

   (변호사 전 주독외교관) (*에하라는 만주국의 주독 베를린 공사관 참사관이었다. 당시 공사는 여의문(뤼이웬)이었고, 그는 참사관이었지만 사실상의 실세였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b>* 아래글은 일본 잡지 &lt;레코드예술&gt; 1952년에 실린 에하라 고이치의 글이다. 이미 TV, 라디오를 비롯 대부분의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따로 소개는 하지 않겠다. 원래는 나의 상세각주가 붙어 있었는데 편집과정에서 다 빠졌다. 여기에 원래 언론사에 보냈던 데로 각주를 되살려 다시 싣는다. 그리고 페북이 각주를 지원하지 않아, 혹은 내가 그 기능을 몰라 (* .... )식으로 내주 방식으로 달았다. 양도 많고 좀 보기에 불편이 있겠지만 양해를 바란다. 그리고 에하라가 기고한 &lt;슈트라우스의 추억&gt;이라는 또 한편의 글도 번역해 올 릴 예정이다.</b>
</p>
<p><br />안익태군의 편모(片貌) - 에하라 고이치</p>
<p>"1942년 가을 (*1942년이라는 연도는 에하라의 착오다. 이 글의 뒷 부분에서도 나오듯 “독소전이 개시되는 해”부터 베를린에서 같이 살았다고 되어 있듯이, 독소전은 1941년 6월이다. 더욱이 허영한이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안익태가 부카레스트에서 두 번째 연주회를 가진 날은 1941년 11월 2일이다. 명치절이 11월 3일이지만 시차를 감안하면 하루 당겨 11월 2일이 현지 시간으로 명치절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에라하는 이 날 안익태가 에텐라쿠(월천악)과 베토벤 교약곡 6번을 연주했다고 하나,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로시니 &lt;세미라미데서곡&gt;, 바흐 &lt;토카타와 푸가 C 장조&gt;, &lt;에텐라쿠&gt; 그리고 후반부에는 안익태 작곡의 &lt;먼 동양에서&gt;를 연주했다고 되어 있다. 바로 이 &lt;먼 동양에서&gt;가 &lt;코리아환상곡&gt;의 또 하나의 이름 &lt;교쿠토(極東)&gt;이다. 그런데 왜 에하라가 그 날 안익태가 베토벤 6번 전원교향곡을 지휘한 걸로 기억했는 지 알 수 없으나, 추측건대 그날 곡 해설에 ‘전주곡’, ’‘전원’, ’춤’ 이렇게 3악장으로 되어 있어 이런 착오가 발생했지 않을 까 한다.), 나는 공무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 있었다. 명치절 (*일본의 이른바 4대명절중 하나. 1월 1일, 기원절, 천장절, 명치절로서 11월 3일이다.) 아침 일본공사관 의식에 참석했다, 그곳에 기미가요 제창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흰 넥타이를 맨 청년이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보기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상이었다. 식후에 T공사 (* 당시 루마니아(羅國)주재 쓰쓰이 키요시(筒井潔) 공사를 말한다. 쓰쓰이는 이 날 연주회 후 본국과 조선총독부에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알리는 보고서를 보낸다. 이 문서는 지금도 남아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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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로부터 그가 당시 유럽 유학중인 지휘자 겸 작곡가 안익태군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안군은 당일 오후 연주회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다 하면서 나를 연주회에 초대하였다. 다행히 휴일이었고 (*1941년 11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특별히 예정된 것도 없었으며 연주회장도 내 숙소에서 코에 닿을 거리인 왕립음악당이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p>
<p>음악당은 만원이었다. 곡목은 자작곡인 월천악 (*에켄라쿠(월천악)는 일본의 대표적인 궁중아악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전시 일본수상의 동생이자 일본귀족이었던 고노에 히데마루와 에키타이 안의 에텐라쿠 두가지 버전이 연주되었다. 두 버전을 비교해 들어 보면 전자가 좀 더 정적이고 원래 테마에 충실하다면, 에키타이의 그것은 좀 더 동적이고 화려해 대중들에게 좀 더 어필할 수 있었다. 에키타이가 당시 이 에텐라쿠를 지휘하는 장면은 유튜브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과 베토벤 교향곡 6번이었다. (* 위 각주 1)을 참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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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조선에서 태어난 안군이 월천악을 교향곡화한 것에 대해 약간 기이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조선의 궁정에 다수의 아악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들보다 아악에 대해 친밀하고 깊이 있게 알고 있지 않을 까하는 등의 소박한 상상을 했지만, 특히 나로선 극동의 한 음악생도가 얼마나 큰 성공을 했는지를 지켜 보는 것도 흥미로웠기에, 나는 정해진 시각에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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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첫번째 아악의 테마가 반복되는 사이 기대치 못했던 배리에이션이 나타났고, 기교 넘치는 타악기 구사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흠…’하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교향시는 우아한 월천악의 멜로디에 조선의 궁정악을 더하여 극적인 효과를 내며 내 가슴을 울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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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연주가 끝나고 내가 물품보관소 옷장에서 외투를 받아 들려 하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루마니아인 부인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 음악은 어떻던가요? 저 동양의 멜로디! 그 동양의 테크닉!..” 감탄하더니, 이내 스스로 놀라며, “죄송해요. 제가 감격해서 그만… 무의식 중에 지휘자와 같은 나라 사람인줄 알았어요. 근데, 정말 근사한 공연이었어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저도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만, 실로 유쾌했습니다” 라고 맞장구 쳤다. 그러자 부인은 “그래요. 베토벤 연주도 물론 꽤나 대단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베토벤 곡은 많이 들어봤기에, 아무래도 둔감해진 측면이 적지 않아요…. 그러나 극동의 음악은… 어떻게 이렇게나 근사할 수 있죠! 맞아요. 이렇게나 감격한 사람은 저뿐만이 아닐 거에요. 오늘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이 그럴 거에요. 정말 좋은 음악회였어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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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문밖으로 나서자, 광장 멀리 왕궁의 지붕 끝에 남국의 석양이 남아 있었다. 넓은 포장도로를 걸으며, 마음속으로 나도 모르게 “오늘은 정말이지 경축일일세”를 연신 반복하고 있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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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안군은 국립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고학하는 사이, (*필라델피아 콩쿨에 입선하여 안익태가 필라델피아 필하모니 콩쿨에 입선해서 유럽 유학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인이 필요하다) 유럽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유럽에서 안군은 빈에서 바인가르트너 Felix Weingartner에게서 지휘를 지도받고, 부다페스트에서 코다이Zoltan Kodaly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유학기간이 지나간 뒤에도 미국의 어떤 노은행가로부터 송금을 받아 (*이 또한 확인이 안되는 말이다. 왜냐 하면 온갖 허구와 미사여구로 가득한 김경래의 안익태 전기에도 이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럭저럭 연구를 이어나가다가, 전쟁으로 인해 송금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유럽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안군은 나에게 상담을 받고자 찾아 왔다. 안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대성시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우리의 작은 힘이라도 보탤 그런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되든 내 집에 오면 ....’, 하는 것으로 되어,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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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안군은 참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음악회와 오페라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는 담배도, 술도 하지 않았으며, 여성과의 교제도 삼가고, 먹고 자는 것 빼고는 오로지 음악에 빠져 생활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작곡을 시도했다. 당시, 내가 뫼리케 (*Eduard Friedrich Mörike(1804.9.8 -1875. 6.4) 독일 서정시인. 그의 시를 최초로 일어로 번역한 사람이 에하라 고이치다.)의 시를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는 여기에 음을 붙여 작곡하였다.- ‘풍주금’과 ‘4월의 노란나비’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완성하자, 우에노 (일본 동경의 지명)에 살던 마리아 토르씨에게 노래를 부탁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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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우하라 재유再遊’를 교향시로 만들고 싶다고도 말했지만, 이는 나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본래 첼리스트였기에 첼로 독주곡 ‘흰백합화’ 등을 자작, 자연하기도 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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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안군은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범접하기 어려운 노대가의 환심을 산 그의 수완에 우리들도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수완이라기 보다 그의 천성이자 타고난 능력이라 말하는 것이 낫겠다. 그 당시 그는 중국의 멜로디를 따,(* "중국의 멜로디"는 또 뭔가?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그것은 한나라때 소무의 영웅담을 찬양한 중국의 유명한 민요 '소무목양 (蘇武牧羊)'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 하면 만주국의 두번째 국가가 바로 이 ‘소무목양’의 멜로디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하라가 작사한 것이 만주축전곡의 제4악장 오족협화를 찬양한 바로 그 부분이다. 지금 우리 애국가 가사가 놓여 있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에하라는 보기 드문 음악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시인 뫼리케를 일어로 번역출판한 사람이다) 나의 작사부분을 곡 말미 합창부분에 넣어 한 시간 정도의 연주가 요구되는 그런 축전곡을 만들었다. 빈에서 이를 발표할 때를 (*슈트라우스는 자신이 작곡한 황기 2,600년을 봉축하기 위한 &lt;일본축전곡&gt;을 안익태가 지휘한 42년 3월 12일자 빈의 연주회와 1년 뒤인 43년 2월 11일 연주회에 참석했다) 비롯해, 그 밖의 안군의 연주회장에도 슈트라우스 자신이 직접 그의 연주회장에 참석해 곡의 영광된 출발을 기뻐해 주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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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어느 날, 갑자기 근무처로 전화 벨이 울렸다. 베를린 필하모니의 매니저였다. (*실제 1943년 5월 3일자 베를린 필하모니 총감독 게르하르트 폰 베스터만Gerhart von Westerman은 베를린 일독협회에 보낸 편지에서 고노에백작보다 에키타이 안을 여름시즌에 출연시킬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다. 에키타이안은 1943년 8월 18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비정규 시즌 지휘를 맡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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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 />“신인 소개 차원에서 안군에게 지휘를 맡기고 싶은데요, 안군은 어떻게 생각할까요?”라는 이야기였다. 안군의 소원이 실현될 때가 도래한 셈이었다. 몇 일 전 한 모임 자리에서 이 사람이 “과거에는 돈을 내면 (*실제 고노에 히데마로는 1920년대 자신이 비용을 내고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한 적이 있다) 필하모니에서 지휘도 할 수 있었지만 현재로선 그것도 힘들어졌어요. 회(會) (*여기서 ‘회’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건대 독일협회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일 가능성이 높다)쪽에서 바로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에게 의뢰하는 길만이 유일하니 더욱 어려워졌죠.”라는 이야기를 한 직후였기에 다소 의외였다. 안군이 때마침 부다페스트로 연주여행을 떠나 있었던 터라 내가 있는 이 곳에 연락이 온 것이기에 조속히 연락을 취해 이야기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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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는 베를린 외에도 함부르크, 빈, 로마, 파리, 부다페스트, 부카레스트와 같은 유럽 각지에서 지휘봉을 흔들었다. 1944년에는 파리의 팔레 샤이요에서 3일간 베에토벤축제를 시도했다. 첫째 날은 티보Jacques Thibaud와 바이올린협주곡을, 둘째 날은 코르토(Alfred Cortot)와 황제 협주곡을, 그리고 셋째 날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하여 이를 성황리에 마쳤다. (*파리의 에펠탑앞에 위치한 Palais de Chaillot은 나치 점령기 베토벤축제의 무대였다. 나치 점령하 파리에서는 독일의 ‘문화적’ 우월을 과시하기 위해 나치선전성이 주도하는 수많은 연주회가 개최되었다. 피아니스 빌헬름 켐프, 발터 기제킹이 단골로 출연했고, 자크 티보나 알프레도 코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키타이 안은 티보와 1944년 4월 14일에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을, 4월 18일에는 코르토와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를 협연했다. 그리고 4월 21일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지휘했다)</p>
<p>
   <br />그 후, 그는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가서 베를린 이 함락되는 날까지 나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하라는 베를린 함락이후 만주국 공사관의 인원을 인솔 모스크바를 거쳐 일본으로 귀국, 변호사로 활동했다)
</p>
<p>&nbsp;</p>
<p>학도와 같은 순진함,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그 희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멈추지 않은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는 그가 가는 앞에는 어떠한 장애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그는 지금도 여전히 유럽천지를 종횡으로 활보하고 있다.</p>
<p>
   <br />(변호사 전 주독외교관) (*에하라는 만주국의 주독 베를린 공사관 참사관이었다. 당시 공사는 여의문(뤼이웬)이었고, 그는 참사관이었지만 사실상의 실세였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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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7:00:11+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1-12-31T17:12:22+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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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에키타이 안과 에하라 고이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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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지난 언론에 공개된 에하라 고이치의 다른 글이다.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기에 제자 이유철의 도움을 받아 전문번역했다. 안익태에 대한 글보다 좀 빠른 1950년 쓴 글이다. 서양고전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아주 아주 재미난 글인데, 대개는 그렇지 않을 거다.
      &amp;#038;nbsp;
      양이 꽤 되고, 아주 오래된 글인데다, 당시의 가타가나로 표기된 인명과 지명을 일일이 찾아서 복원시켰다. 거의 암호해독 수준이어서 시간도 많이 걸렸고 품도 꽤 많이 들였다.
      &amp;#038;nbsp;
      안익태는 1941년 11월 이후 에하라와 동거하면서 본격적인 친일이력의 정점을 찍는다. 에키타이는 1942년 3월 12일 빈에서 슈트라우스의 &amp;#038;lt;일본축전곡&amp;#038;gt;을 지휘했고, 슈트라우스는 호평을 해 주었다. 그 이틀 뒤 3월 14일 저녁 &amp;#038;lt;드라이후사렌&amp;#038;gt; (세명의 기사)라는 빈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슈트라우스 부부와 저녁을 먹는다. 물론 에하라가 밥값은 지불했을 거다. 그리고 흔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에하라가 슈트라우스와 에키타이를 중개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에하라의 말은 아주 재밋다.
      &amp;#038;nbsp;
      슈트라우스의 생일을 영광스럽게도 자신의 집에서 모신 에하라와 에키타이 안의 기쁨이야 말할 수 없을 게다. 이런 저런 정황에서 보건대 에키타이는 이 기회를 최대 활용했다. 특히 그 날 파티석상에는 하인츠 드레베스라는 나치 음악정책의 총책이 왔다. 그리고 에키타이는 다른 때 에하라와 함께 슈트라우스의 사저에서 전설의 피아니스트 에밀 폰 자우어도 만난다. 놀라운일이다.
      참 슈트라우스한테 에키타이는 공짜로 배웠다고 이 글에서는 말한다. 대략 1942-43년간 에키타이 안의 유럽내 활동에 있어, 이미 알려진 나치 선전기구의 일종인 &amp;#038;lt;일독협회&amp;#038;gt;는 말할 것도 없고, 슈트라우스를 필두로, 괴벨스, 드레베스 선전성 음악국장, 티에첸 베를린 국립오페라 총감독등 나치 수뇌부와 그 총애를 받았던 인물들도 중요한 배경을 이룬다.)
      * 는 내가 추가한 주석이다.&amp;#038;nbsp;
      &amp;#038;nbsp;
      
         &amp;#038;lt;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옹(翁)과의 추억&amp;#038;gt;
      
      6척이 넘는 키, 살집이 좋은 거구에, 백발이 무성한 동안에다, 전체적인 선은 두껍지만 부드럽고, 장년기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움은 보이지 않으며, 조용해 보이는 움직임과 낮은 목소리는 온화하다. 이것이 만년의 옹의 풍모였다.
      &amp;#038;nbsp;
      내가 처음 옹의 작품을 접한 것은 다이쇼 (1912-1926) 7, 8년경으로, ‘살로메 댄스’, ‘죽음과 정화’, ‘틸 오이겐슈피겔’ 등을 듣고 – 물론 레코드음반을 통해서 였지만 - 그 참신하고, 종횡으로 누비는 작풍과 화려한 음색에 반하고 말았다. 당시 독일에서 미국을 돌아 귀국한 야마다 코우사쿠 씨로부터 옹의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옹의 예술에 대해 깊은 경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에 관해서는 단순한 애호가에 불과해, 소위 문외한인 내가, 뒷날 옹의 인정을 받은 것이 나의 7년간의 유럽생활 중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하나가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amp;#038;nbsp;
      친아들보다 나이차가 많은 아득한 타향의 나그네, 게다가 직접적으로 음악과는 관계가 없는 나와 이 거장을 맺어 준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른다. 아마 옹의 동심과 여기에 감응한 나의 영혼이 부지불식간에 서로를 끌어당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옹과 만나게 된 그 인연은 친구 안익태군이 만들어 낸 것이다. 안군은 국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필라델피아 필하모니의 콩쿠르에 입선 유럽 유학의 기회를 얻어, 당시 아직 빈에 살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F. Weingartner)와 부다페스트의 졸탄 코다이에게 지휘와 작곡을 배웠지만, 내가 그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옹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있었다. 안군은 또한 나의 동생과 같은 시기 국립 음악원을 졸업한 사람이라, 나는 그를 동생처럼 생각하며 가깝게 지냈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빈을 여행할 기회를 이용해 옹을 식사에 초대했다. 옹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고, 부인을 동반하고 시내 일류 레스토랑 &amp;#038;lt;드라이 후사렌 (Drei Husaren)*&amp;#038;gt; (*30년 개업한 빈의 고급레스토랑으로 현재도 영업중이다)의 별실에서 그를 만났다. 변변찮은 모임이었지만 오히려 분위기는 격의가 없었다. 부인은 스위스 태생으로 그녀의 부친은 군인이었다. 상당한 수완가로 생각한 건 서슴지 않고 말하고 해치워 버리는 성격이었다.
      &amp;#038;nbsp;
      “베를린은 최근 간간이 공습이 있는데, 어떻게 그 곳에 살고 있는지요” 부인은 나를 향해 이런 분위기로 말을 걸었다. 그녀의 말투는 아름답고, 예의 바랐다. “베를린도 상당히 좋은 곳입니다. 공습은 이렇다 할 정도로 특별한 정도는 아닙니다.”고 답하자, “저는 영국인은 신사적이어서 매우 좋아합니다. 프랑스인은 세련되어 가깝게 지내기 좋죠.”라며 내 얼굴을 보고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맞아요, 일본인은 예의 바르고”라고 덧붙이며, “그러나, 독일인은 매우 싫어합니다. 특히, 베를린 사람이라면….” 그녀의 말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amp;#038;nbsp;
      그녀의 베를린 기피는 꽤 유명하다. 옹이 베를린에 여행한다고 하면, 부인은 결코 함께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공습에서 전쟁 이야기로 이어지자, 옹은 “전쟁은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만 합니다. 아시아에서도 전쟁을 하고 있는 듯한데, 전쟁은 백해하고, 어떠한 이익도 없을뿐더러 인간의 부끄러움이며, 타락이고 파괴일 뿐입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인간이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모르겠소. 전쟁만은 즉각 멈추게 해야만 합니다!”라며 꽤나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에는 일반적인 예술가를 뛰어 넘는 그런 열정이 담겨 있었다.
      &amp;#038;nbsp;
      물론 이전에도 다른 곳에서 옹의 모습을 본적이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그가 선전성 장관 괴벨스가 주최한 차 마시는 자리에 부인과 동반한 자리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괴벨스와 이태리 대사가 유태인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둘의 논전이 흥미로워 나는 이들 사이에 끼어 엿듣고 있었는데, 그 사이 옹은 아무도 모르게 황급히 떠났다. 옆 자리의 자이델 박사와 함께 나는 옹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amp;#038;nbsp;
      옹의 지휘를 처음 들은 건 1939년 4월 베를린의 국립가극장에서였다. 파리 오페라좌의 유명가수 제르멘 뤼벵 (Germaine Lubin, 1890 – 1979)이 ‘아드리아네’를 비롯하여 ‘아라벨라’의 주역을 맡게 되어 수 년 만에 옹 자신이 지휘대에 섰다. 이틀 밤 모두 대성공이었던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에 옹과 뤼벵을 비롯해 총감독 티에첸 (*Heinz Tietjen 1881 – 1967 나치시절 베를린국립오페라 총감독 히틀러를 비롯 괴링과도 친분이 있었다)은 몇 번이고 다시 무대위로 올라가야 했다.
      &amp;#038;nbsp;
      베를린의 국립가극장에서는 그 후 매 시즌 마지막에는 항상 슈트라우스 주간을 개최했다. 덕분에 나는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베를린에서 옹이 만든 가극의 대부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빈, 뮌헨, 잘츠부르크 등에서 들었던 것을 합치면 옹 작품의 거의 전부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amp;#038;nbsp;
      1943년 6월에는 베를린에서 옹의 초기 작품 ‘군트람’을 상연하게 되었다. 이 가극은 어떠한 사정 때문인지, 초연 이후 무대에 올리는 것을 옹이 원치 않았는데, 가르미슈의 옹 별장에는 ‘군트람’의 묘비가 있는 인연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따라서 이번 공연이 초연이래 몇 십 년 만의 무대이기에, 가극동호인들 사이에는 즉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옹도 특별히 본인자신이 연습과 예행연습까지 참가했다. 그 때 나는 이미 옹과 가까워져 있었던 터라, 사전에 베를린 나의 집에 머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옹은 수행원을 데리고 그루네발트(*베를린의 행정구역, 반 호숫가에 있다)의 나의 집에 약 열흘간 유숙했다. 이러한 연유에서 나는 옹에게 초대받아 함께 예행연습을 비롯해 공연에 참석하였다.
      &amp;#038;nbsp;
      당시 주연은 테너의 프란츠 휄커 (Franz Voelker)와 소프라노의 힐데 쉐판 (Hilde Scheppan 1907– 1970)이었다. 쉐판은 당시 궁정가수작위(Kammersaengerin)를 아직 받지 못했지만, 특별히 발탁되어 주연을 맡게 되었다. 그 데뷔는 매우 훌륭했기에 옹도 만족하고, 그녀를 발탁한 티에첸 총감독도 득의만면했다.
      &amp;#038;nbsp;
      그 체류 기간중, 옹은 79세 생일 (6월 11일)을 맞았다. 옹이 나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밖에 모르고 있었지만, 그 날은 아침부터 많은 꽃들이 배달되어 나의 집은 현관부터 거실, 식당, 침실까지 온통 화려한 꽃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평소에는 옹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방문객을 돌려보내곤 했었지만, 이 날은 특별한 기회라 베를린에 있는 음악관계자 십 여명을 초대하여 작은 파티를 열었다. 참석자 중에는 티에첸 총감독, 선전성의 드레베스 음악부장 (*Heinz Drewes 1903-1980 선전성 10국 음악국 국장, 나치시대 음악에 관한 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실세) 등도 있었다.
      &amp;#038;nbsp;
      그 직전에는 이태리 ‘스칼라좌’ 여가수의 초청공연이 국립가극장에서 열려 ‘살로메’가 상연되었다. 국립가극장의 건물은 당시 공습 때문에 타버려 수리 중이었기에, ‘군트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티어가르텐의 크롤오퍼 (Krolloper)로 임시 이전하여 상연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빈 또는 다른 곳에서 여러 차례 ‘살로메’를 들었지만, 사전평가도 대단했고 처음에 이 이태리 여배우의 연기가 살로메의 이국적인 기분에 딱 들어 맞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공연 중 3번이나 이것을 들으러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회를 거듭할수록 내 감흥은 희미해져만 갔다. 생일파티 석상에서 내가 그런 말을 내뱉자, 옹은 “이태리사람에게 내 가극을 부르게 하는 건 무립니다. 독일사람만큼 음역이 넓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역대에 있어서 만큼은 러시아사람입니다. 러시아사람에게는 독일사람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추운 나라의 음역대는 광대합니다. 그러나 노래는 결국은 마음 (Herz)입니다”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 후, 자리에 있던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 교수를 뒤돌아보며 “이것이 나의 예언자 (Prophet)입니다”라며, 다시 그 옆에 앉아 있던 크라우스의 부인이자 명배우 비오리카 우르술레악(Violica Ursuleac)를 가르키며 “마음! 마음!”이라며 반복했다.
      &amp;#038;nbsp;
      옹은 이태리인에게는 별로 감복하지 않아 보였다. 또 다른 경우였지만, 나는 뮌헨 국립가극장의 총감독 하르트만 교수와 ‘나비부인’ 연출에 있어, 일본인이 보았을 때 드는 부자연스러운 점을 지적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르트만 교수는 “그 점에 대해서는 그라프 고노에 (고노에 히데마로백작 近衛伯, 독일에서는 고노에씨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로부터도 주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고노에씨에게 부탁해서 일본에서 의상 등을 가져오고자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등등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자, 옹은 옆에서 “이태리인은 일본에 대해 알 수 없지”라며 일축했다. 천하의 푸치니도 옹을 만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 독일에서 가장 많이 상영되는 가극은 ‘나비부인’과 ‘라 보엠’이기 때문에 그 인기는 대단했으며, 푸치니 때문에 죽고 사는 이들도 있었다.
      &amp;#038;nbsp;
      언젠가 한 번은 내가 빈에 머물고 있을 때, 옹으로부터 차나 한 잔 하러 오라는 전갈이 왔다. 옹의 저택은 일본총영사관 근처에 있었으며, 넓은 정원을 갖춘 굉장한 저택이었다. 대문에서 시작하는 완만한 경사를 오르면 현관에 다다르는 구조였다. 응접실은 조도가 모두 어두운 것들로 되어 있어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는 동서의 수많은 골동품이 진열되어 있어 옹의 취미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합석한 손님은 리스트의 수제자로 당시 살아있던 유일한 한 사람인 에밀 폰 자우어 (Emil von Sauer)교수였다. 일찍이 쿠노 히사코 여사가 가르침을 받고 싶었지만, 이를 허락 받지 못해 비관끝에 하숙집 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애화를 남긴 당사자다. 앞서 말했다시피 슈트라우스는 당당한 체구인데 반해, 자우어 교수는 왜소했다. 연령은 자우어교수 쪽이 두세살 위였다. 그러나 여전히 기력이 정정해서, 최근 젊은 여제자와 결혼하여 아기가 태어난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결코 인기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그의 말년은 오히려 불우했다. 그 밖에 역사를 전공한 모 교수와 안익태 군이 있었다. 그 날은 집사가 모습을 비추지 않고, 가정부가 대신 나오고 슈트라우스 부인이 전담하여 우리를 접대했다.
      &amp;#038;nbsp;
      노인이 모이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회고적이 된다. 슈트라우스는 그의 초기 작품을 바그너에게 보여줬던 때를 회상하며, 바그너가 그의 작품을 쳐다보지도 않고 책상 서랍에 쳐넣어 버린 것에 대해 분통해하며 이야기를 하자, 자우어는 다시 리스트 문하에 있었던 당시의 이야기 회상하며 손짓 몸짓으로 이를 열심히 설명했다. 볼을 부풀리며 새빨간 얼굴을 하고는 끝내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는 결말. 내게 더 음악의 소양이 있고, 장래에 추억을 쓰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다면 모든 모임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이끌어 내었을 터인데 지금에서야 아쉬운 생각이 든다.
      &amp;#038;nbsp;
      자우어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 중 젊은 부인과 아기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으며, 슈트라우스도 작년 가르미슈의 별장에서 영면해 이러한 기회를 다시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영원히 잃고 말았다.
      &amp;#038;nbsp;
      1944년 7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는 옹의 80세 축하의 의미에서 그 신작가극, ‘다나에’가 초연되었다. 때가 때이니 만큼, 북부 프랑스에서는 영미의 상륙작전이 결행되었고, 국내에서는 히틀러 암살 음모가 폭발한다. 전쟁도 정치도 모두 쉽지 않은 형세를 취하고 있었기에 음악제는 중지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모처럼의 기획이었기에, 초연은 총 예행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특별히 안내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만 상영되었다. 나는 독일에 체류 중 매년 바이로이트와 잘츠부르크의 음악제에는 참석해왔으나, 이 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럽의 형세가 몹시 긴박했기에 출석을 단념하고 있을 때, 옹으로부터 자축하는 의미에서 초대를 받아, 이후 작정하고 옹이 있는 잘츠부르크에서 몇 일을 머물렀다. 나는 옹과 함께 무대 가까운 정면에 위치한 특별석에서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할 수 있었다. 지휘는 클레멘스 크라우스, 주연은 그 부인 우르술레악이었고, 그리스신화에서 가져온 3막으로 구성된, 옹의 작품으로는 대작에 속한다. 그 전년도에 초연된 ‘카프리치오’ 보다 전에 작곡되었지만 초연이 늦어진 이유이다.
      &amp;#038;nbsp;
      ‘카프리치오’는 현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한 1막으로 구성된 가극으로 초연은 뮌헨 국립가극장에서 이루어졌다. 음악은 현악6중주가 끌어가는 것인데, 옹 만년의 고담한 맛을 보여주는 특이한 작품이다. 연출은 ‘다나에’’와 마찬가지로 하르트만 교수였다. 이것들에 더해 교향악시 ‘도메스티카’의 신작 발표가 있다는 등, 옹은 나이가 들어 창작욕이 더욱 왕성해지고 그 예술은 경지에 달한 감이 있다.
      &amp;#038;nbsp;
      슈트라우스가 돈에 물들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벌써 30년도 전에 일로, 당시 한번 지휘수당으로 천 마르크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옹 자신은 돈에 대해서는 화끈했다. 지금 안군 같은 경우에도 한 푼의 사례도 하지 않고 있다. 황기 2600년 일본축전악 작곡에 대해서도 돈을 거절하고 문화훈장과 같은 것을 갖고 싶어했다. 훈장 수여가 허락되지 않았기에 이에 대해 약간은 서운해 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옹의 입에서 이 일에 관한 단 한마디 불만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amp;#038;nbsp;
      옹은 허식을 싫어했다. 많은 음악가가 교수라 불리고 싶어했지만, 옹은 일생을 박사로 일관했다. 일본에서 특히 박사는 유난히 그렇지만, 베를린에서는 이는 흘려 듣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는 박사라고 부르는 것보다 마이스터로 부르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이는 옹의 마음에 맞는 것은 아닌 듯해 보였다.
      &amp;#038;nbsp;
      옹은 과도하게 예의 바른 사람으로, 편지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썼다. 그 글씨 또한 아름다웠다. 따라서 옹이 손수 그린 악보 자체가 훌륭한 예술품이다. 나는 옹으로부터 ‘황기 2600년 봉축 일본축전곡’과 앞서 말한 ‘카프리치오’의 스케치북을 받았는데, 그 때 마다 ‘보잘것없습니다만, 기념으로 받아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으며, 나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을 기다리고 증정의 시를 써넣는 등, 겸양을 지니고 있었다.
      &amp;#038;nbsp;
      옹의 취미는 스커트라는 트럼프 놀이었다. 옹이 음악을 하지 않을 때는 스커트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3명이서 하는 카드놀이이기 때문에 상대가 중요하다. 여기에는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듯 옹이 가는 곳에서는 그곳이 어디든 반드시 쫓아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두명 모두 60을 넘은 노인이지만 처음부터 옹의 숭배자이다. 옹이 나의 집에 머물자, 2명이 함께 나의 집에 나타난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면 놀이를 중단하고 각자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좋아하는 놀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밤을 새는 일은 없었다.
      &amp;#038;nbsp;
      옹은 식사 등도 매우 양이 적어 아침은 커피 한 잔에 빵 한 조각.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다. 그 고령에 명민한 두뇌, 넘치는 정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러한 절제된 생활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amp;#038;nbsp;
      옹의 집에서는 3대를 연속해서 리하르트로 부르고 있다. 영식도 리하르트, 영손도 리하르트. 가내에서 리하르트로 불리는 것은 손자로 옹은 모두로부터 파파, 파파로 불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단순히 가정 내에서 그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일뿐만 아니라 실로 근대 음악계의 위대한 파파였다. (&amp;#038;lt;레코드예술&amp;#038;gt; 1950년)
      
   
&amp;#038;nbsp;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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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p>(*지난 언론에 공개된 에하라 고이치의 다른 글이다.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기에 제자 이유철의 도움을 받아 전문번역했다. 안익태에 대한 글보다 좀 빠른 1950년 쓴 글이다. 서양고전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아주 아주 재미난 글인데, 대개는 그렇지 않을 거다.</p>
      <p>&nbsp;</p>
      <p>양이 꽤 되고, 아주 오래된 글인데다, 당시의 가타가나로 표기된 인명과 지명을 일일이 찾아서 복원시켰다. 거의 암호해독 수준이어서 시간도 많이 걸렸고 품도 꽤 많이 들였다.</p>
      <p>&nbsp;</p>
      <p>안익태는 1941년 11월 이후 에하라와 동거하면서 본격적인 친일이력의 정점을 찍는다. 에키타이는 1942년 3월 12일 빈에서 슈트라우스의 &lt;일본축전곡&gt;을 지휘했고, 슈트라우스는 호평을 해 주었다. 그 이틀 뒤 3월 14일 저녁 &lt;드라이후사렌&gt; (세명의 기사)라는 빈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슈트라우스 부부와 저녁을 먹는다. 물론 에하라가 밥값은 지불했을 거다. 그리고 흔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에하라가 슈트라우스와 에키타이를 중개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에하라의 말은 아주 재밋다.</p>
      <p>&nbsp;</p>
      <p>슈트라우스의 생일을 영광스럽게도 자신의 집에서 모신 에하라와 에키타이 안의 기쁨이야 말할 수 없을 게다. 이런 저런 정황에서 보건대 에키타이는 이 기회를 최대 활용했다. 특히 그 날 파티석상에는 하인츠 드레베스라는 나치 음악정책의 총책이 왔다. 그리고 에키타이는 다른 때 에하라와 함께 슈트라우스의 사저에서 전설의 피아니스트 에밀 폰 자우어도 만난다. 놀라운일이다.</p>
      <p>참 슈트라우스한테 에키타이는 공짜로 배웠다고 이 글에서는 말한다. 대략 1942-43년간 에키타이 안의 유럽내 활동에 있어, 이미 알려진 나치 선전기구의 일종인 &lt;일독협회&gt;는 말할 것도 없고, 슈트라우스를 필두로, 괴벨스, 드레베스 선전성 음악국장, 티에첸 베를린 국립오페라 총감독등 나치 수뇌부와 그 총애를 받았던 인물들도 중요한 배경을 이룬다.)</p>
      <p>* 는 내가 추가한 주석이다.&nbsp;</p>
      <p>&nbsp;</p>
      <p>
         <b>&lt;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옹(翁)과의 추억&gt;</b>
      </p>
      <p>6척이 넘는 키, 살집이 좋은 거구에, 백발이 무성한 동안에다, 전체적인 선은 두껍지만 부드럽고, 장년기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움은 보이지 않으며, 조용해 보이는 움직임과 낮은 목소리는 온화하다. 이것이 만년의 옹의 풍모였다.</p>
      <p>&nbsp;</p>
      <p>내가 처음 옹의 작품을 접한 것은 다이쇼 (1912-1926) 7, 8년경으로, ‘살로메 댄스’, ‘죽음과 정화’, ‘틸 오이겐슈피겔’ 등을 듣고 – 물론 레코드음반을 통해서 였지만 - 그 참신하고, 종횡으로 누비는 작풍과 화려한 음색에 반하고 말았다. 당시 독일에서 미국을 돌아 귀국한 야마다 코우사쿠 씨로부터 옹의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옹의 예술에 대해 깊은 경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에 관해서는 단순한 애호가에 불과해, 소위 문외한인 내가, 뒷날 옹의 인정을 받은 것이 나의 7년간의 유럽생활 중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하나가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p>
      <p>&nbsp;</p>
      <p>친아들보다 나이차가 많은 아득한 타향의 나그네, 게다가 직접적으로 음악과는 관계가 없는 나와 이 거장을 맺어 준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른다. 아마 옹의 동심과 여기에 감응한 나의 영혼이 부지불식간에 서로를 끌어당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옹과 만나게 된 그 인연은 친구 안익태군이 만들어 낸 것이다. 안군은 국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필라델피아 필하모니의 콩쿠르에 입선 유럽 유학의 기회를 얻어, 당시 아직 빈에 살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F. Weingartner)와 부다페스트의 졸탄 코다이에게 지휘와 작곡을 배웠지만, 내가 그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옹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있었다. 안군은 또한 나의 동생과 같은 시기 국립 음악원을 졸업한 사람이라, 나는 그를 동생처럼 생각하며 가깝게 지냈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빈을 여행할 기회를 이용해 옹을 식사에 초대했다. 옹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고, 부인을 동반하고 시내 일류 레스토랑 &lt;드라이 후사렌 (Drei Husaren)*&gt; (*30년 개업한 빈의 고급레스토랑으로 현재도 영업중이다)의 별실에서 그를 만났다. 변변찮은 모임이었지만 오히려 분위기는 격의가 없었다. 부인은 스위스 태생으로 그녀의 부친은 군인이었다. 상당한 수완가로 생각한 건 서슴지 않고 말하고 해치워 버리는 성격이었다.</p>
      <p>&nbsp;</p>
      <p>“베를린은 최근 간간이 공습이 있는데, 어떻게 그 곳에 살고 있는지요” 부인은 나를 향해 이런 분위기로 말을 걸었다. 그녀의 말투는 아름답고, 예의 바랐다. “베를린도 상당히 좋은 곳입니다. 공습은 이렇다 할 정도로 특별한 정도는 아닙니다.”고 답하자, “저는 영국인은 신사적이어서 매우 좋아합니다. 프랑스인은 세련되어 가깝게 지내기 좋죠.”라며 내 얼굴을 보고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맞아요, 일본인은 예의 바르고”라고 덧붙이며, “그러나, 독일인은 매우 싫어합니다. 특히, 베를린 사람이라면….” 그녀의 말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p>
      <p>&nbsp;</p>
      <p>그녀의 베를린 기피는 꽤 유명하다. 옹이 베를린에 여행한다고 하면, 부인은 결코 함께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공습에서 전쟁 이야기로 이어지자, 옹은 “전쟁은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만 합니다. 아시아에서도 전쟁을 하고 있는 듯한데, 전쟁은 백해하고, 어떠한 이익도 없을뿐더러 인간의 부끄러움이며, 타락이고 파괴일 뿐입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인간이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모르겠소. 전쟁만은 즉각 멈추게 해야만 합니다!”라며 꽤나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에는 일반적인 예술가를 뛰어 넘는 그런 열정이 담겨 있었다.</p>
      <p>&nbsp;</p>
      <p>물론 이전에도 다른 곳에서 옹의 모습을 본적이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그가 선전성 장관 괴벨스가 주최한 차 마시는 자리에 부인과 동반한 자리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괴벨스와 이태리 대사가 유태인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둘의 논전이 흥미로워 나는 이들 사이에 끼어 엿듣고 있었는데, 그 사이 옹은 아무도 모르게 황급히 떠났다. 옆 자리의 자이델 박사와 함께 나는 옹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p>
      <p>&nbsp;</p>
      <p>옹의 지휘를 처음 들은 건 1939년 4월 베를린의 국립가극장에서였다. 파리 오페라좌의 유명가수 제르멘 뤼벵 (Germaine Lubin, 1890 – 1979)이 ‘아드리아네’를 비롯하여 ‘아라벨라’의 주역을 맡게 되어 수 년 만에 옹 자신이 지휘대에 섰다. 이틀 밤 모두 대성공이었던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에 옹과 뤼벵을 비롯해 총감독 티에첸 (*Heinz Tietjen 1881 – 1967 나치시절 베를린국립오페라 총감독 히틀러를 비롯 괴링과도 친분이 있었다)은 몇 번이고 다시 무대위로 올라가야 했다.</p>
      <p>&nbsp;</p>
      <p>베를린의 국립가극장에서는 그 후 매 시즌 마지막에는 항상 슈트라우스 주간을 개최했다. 덕분에 나는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베를린에서 옹이 만든 가극의 대부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빈, 뮌헨, 잘츠부르크 등에서 들었던 것을 합치면 옹 작품의 거의 전부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p>
      <p>&nbsp;</p>
      <p>1943년 6월에는 베를린에서 옹의 초기 작품 ‘군트람’을 상연하게 되었다. 이 가극은 어떠한 사정 때문인지, 초연 이후 무대에 올리는 것을 옹이 원치 않았는데, 가르미슈의 옹 별장에는 ‘군트람’의 묘비가 있는 인연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따라서 이번 공연이 초연이래 몇 십 년 만의 무대이기에, 가극동호인들 사이에는 즉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옹도 특별히 본인자신이 연습과 예행연습까지 참가했다. 그 때 나는 이미 옹과 가까워져 있었던 터라, 사전에 베를린 나의 집에 머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옹은 수행원을 데리고 그루네발트(*베를린의 행정구역, 반 호숫가에 있다)의 나의 집에 약 열흘간 유숙했다. 이러한 연유에서 나는 옹에게 초대받아 함께 예행연습을 비롯해 공연에 참석하였다.</p>
      <p>&nbsp;</p>
      <p>당시 주연은 테너의 프란츠 휄커 (Franz Voelker)와 소프라노의 힐데 쉐판 (Hilde Scheppan 1907– 1970)이었다. 쉐판은 당시 궁정가수작위(Kammersaengerin)를 아직 받지 못했지만, 특별히 발탁되어 주연을 맡게 되었다. 그 데뷔는 매우 훌륭했기에 옹도 만족하고, 그녀를 발탁한 티에첸 총감독도 득의만면했다.</p>
      <p>&nbsp;</p>
      <p>그 체류 기간중, 옹은 79세 생일 (6월 11일)을 맞았다. 옹이 나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밖에 모르고 있었지만, 그 날은 아침부터 많은 꽃들이 배달되어 나의 집은 현관부터 거실, 식당, 침실까지 온통 화려한 꽃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평소에는 옹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방문객을 돌려보내곤 했었지만, 이 날은 특별한 기회라 베를린에 있는 음악관계자 십 여명을 초대하여 작은 파티를 열었다. 참석자 중에는 티에첸 총감독, 선전성의 드레베스 음악부장 (*Heinz Drewes 1903-1980 선전성 10국 음악국 국장, 나치시대 음악에 관한 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실세) 등도 있었다.</p>
      <p>&nbsp;</p>
      <p>그 직전에는 이태리 ‘스칼라좌’ 여가수의 초청공연이 국립가극장에서 열려 ‘살로메’가 상연되었다. 국립가극장의 건물은 당시 공습 때문에 타버려 수리 중이었기에, ‘군트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티어가르텐의 크롤오퍼 (Krolloper)로 임시 이전하여 상연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빈 또는 다른 곳에서 여러 차례 ‘살로메’를 들었지만, 사전평가도 대단했고 처음에 이 이태리 여배우의 연기가 살로메의 이국적인 기분에 딱 들어 맞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공연 중 3번이나 이것을 들으러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회를 거듭할수록 내 감흥은 희미해져만 갔다. 생일파티 석상에서 내가 그런 말을 내뱉자, 옹은 “이태리사람에게 내 가극을 부르게 하는 건 무립니다. 독일사람만큼 음역이 넓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역대에 있어서 만큼은 러시아사람입니다. 러시아사람에게는 독일사람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추운 나라의 음역대는 광대합니다. 그러나 노래는 결국은 마음 (Herz)입니다”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 후, 자리에 있던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 교수를 뒤돌아보며 “이것이 나의 예언자 (Prophet)입니다”라며, 다시 그 옆에 앉아 있던 크라우스의 부인이자 명배우 비오리카 우르술레악(Violica Ursuleac)를 가르키며 “마음! 마음!”이라며 반복했다.</p>
      <p>&nbsp;</p>
      <p>옹은 이태리인에게는 별로 감복하지 않아 보였다. 또 다른 경우였지만, 나는 뮌헨 국립가극장의 총감독 하르트만 교수와 ‘나비부인’ 연출에 있어, 일본인이 보았을 때 드는 부자연스러운 점을 지적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르트만 교수는 “그 점에 대해서는 그라프 고노에 (고노에 히데마로백작 近衛伯, 독일에서는 고노에씨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로부터도 주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고노에씨에게 부탁해서 일본에서 의상 등을 가져오고자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등등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자, 옹은 옆에서 “이태리인은 일본에 대해 알 수 없지”라며 일축했다. 천하의 푸치니도 옹을 만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 독일에서 가장 많이 상영되는 가극은 ‘나비부인’과 ‘라 보엠’이기 때문에 그 인기는 대단했으며, 푸치니 때문에 죽고 사는 이들도 있었다.</p>
      <p>&nbsp;</p>
      <p>언젠가 한 번은 내가 빈에 머물고 있을 때, 옹으로부터 차나 한 잔 하러 오라는 전갈이 왔다. 옹의 저택은 일본총영사관 근처에 있었으며, 넓은 정원을 갖춘 굉장한 저택이었다. 대문에서 시작하는 완만한 경사를 오르면 현관에 다다르는 구조였다. 응접실은 조도가 모두 어두운 것들로 되어 있어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는 동서의 수많은 골동품이 진열되어 있어 옹의 취미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합석한 손님은 리스트의 수제자로 당시 살아있던 유일한 한 사람인 에밀 폰 자우어 (Emil von Sauer)교수였다. 일찍이 쿠노 히사코 여사가 가르침을 받고 싶었지만, 이를 허락 받지 못해 비관끝에 하숙집 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애화를 남긴 당사자다. 앞서 말했다시피 슈트라우스는 당당한 체구인데 반해, 자우어 교수는 왜소했다. 연령은 자우어교수 쪽이 두세살 위였다. 그러나 여전히 기력이 정정해서, 최근 젊은 여제자와 결혼하여 아기가 태어난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결코 인기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그의 말년은 오히려 불우했다. 그 밖에 역사를 전공한 모 교수와 안익태 군이 있었다. 그 날은 집사가 모습을 비추지 않고, 가정부가 대신 나오고 슈트라우스 부인이 전담하여 우리를 접대했다.</p>
      <p>&nbsp;</p>
      <p>노인이 모이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회고적이 된다. 슈트라우스는 그의 초기 작품을 바그너에게 보여줬던 때를 회상하며, 바그너가 그의 작품을 쳐다보지도 않고 책상 서랍에 쳐넣어 버린 것에 대해 분통해하며 이야기를 하자, 자우어는 다시 리스트 문하에 있었던 당시의 이야기 회상하며 손짓 몸짓으로 이를 열심히 설명했다. 볼을 부풀리며 새빨간 얼굴을 하고는 끝내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는 결말. 내게 더 음악의 소양이 있고, 장래에 추억을 쓰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다면 모든 모임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이끌어 내었을 터인데 지금에서야 아쉬운 생각이 든다.</p>
      <p>&nbsp;</p>
      <p>자우어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 중 젊은 부인과 아기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으며, 슈트라우스도 작년 가르미슈의 별장에서 영면해 이러한 기회를 다시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영원히 잃고 말았다.</p>
      <p>&nbsp;</p>
      <p>1944년 7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는 옹의 80세 축하의 의미에서 그 신작가극, ‘다나에’가 초연되었다. 때가 때이니 만큼, 북부 프랑스에서는 영미의 상륙작전이 결행되었고, 국내에서는 히틀러 암살 음모가 폭발한다. 전쟁도 정치도 모두 쉽지 않은 형세를 취하고 있었기에 음악제는 중지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모처럼의 기획이었기에, 초연은 총 예행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특별히 안내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만 상영되었다. 나는 독일에 체류 중 매년 바이로이트와 잘츠부르크의 음악제에는 참석해왔으나, 이 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럽의 형세가 몹시 긴박했기에 출석을 단념하고 있을 때, 옹으로부터 자축하는 의미에서 초대를 받아, 이후 작정하고 옹이 있는 잘츠부르크에서 몇 일을 머물렀다. 나는 옹과 함께 무대 가까운 정면에 위치한 특별석에서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할 수 있었다. 지휘는 클레멘스 크라우스, 주연은 그 부인 우르술레악이었고, 그리스신화에서 가져온 3막으로 구성된, 옹의 작품으로는 대작에 속한다. 그 전년도에 초연된 ‘카프리치오’ 보다 전에 작곡되었지만 초연이 늦어진 이유이다.</p>
      <p>&nbsp;</p>
      <p>‘카프리치오’는 현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한 1막으로 구성된 가극으로 초연은 뮌헨 국립가극장에서 이루어졌다. 음악은 현악6중주가 끌어가는 것인데, 옹 만년의 고담한 맛을 보여주는 특이한 작품이다. 연출은 ‘다나에’’와 마찬가지로 하르트만 교수였다. 이것들에 더해 교향악시 ‘도메스티카’의 신작 발표가 있다는 등, 옹은 나이가 들어 창작욕이 더욱 왕성해지고 그 예술은 경지에 달한 감이 있다.</p>
      <p>&nbsp;</p>
      <p>슈트라우스가 돈에 물들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벌써 30년도 전에 일로, 당시 한번 지휘수당으로 천 마르크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옹 자신은 돈에 대해서는 화끈했다. 지금 안군 같은 경우에도 한 푼의 사례도 하지 않고 있다. 황기 2600년 일본축전악 작곡에 대해서도 돈을 거절하고 문화훈장과 같은 것을 갖고 싶어했다. 훈장 수여가 허락되지 않았기에 이에 대해 약간은 서운해 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옹의 입에서 이 일에 관한 단 한마디 불만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p>
      <p>&nbsp;</p>
      <p>옹은 허식을 싫어했다. 많은 음악가가 교수라 불리고 싶어했지만, 옹은 일생을 박사로 일관했다. 일본에서 특히 박사는 유난히 그렇지만, 베를린에서는 이는 흘려 듣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는 박사라고 부르는 것보다 마이스터로 부르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이는 옹의 마음에 맞는 것은 아닌 듯해 보였다.</p>
      <p>&nbsp;</p>
      <p>옹은 과도하게 예의 바른 사람으로, 편지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썼다. 그 글씨 또한 아름다웠다. 따라서 옹이 손수 그린 악보 자체가 훌륭한 예술품이다. 나는 옹으로부터 ‘황기 2600년 봉축 일본축전곡’과 앞서 말한 ‘카프리치오’의 스케치북을 받았는데, 그 때 마다 ‘보잘것없습니다만, 기념으로 받아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으며, 나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을 기다리고 증정의 시를 써넣는 등, 겸양을 지니고 있었다.</p>
      <p>&nbsp;</p>
      <p>옹의 취미는 스커트라는 트럼프 놀이었다. 옹이 음악을 하지 않을 때는 스커트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3명이서 하는 카드놀이이기 때문에 상대가 중요하다. 여기에는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듯 옹이 가는 곳에서는 그곳이 어디든 반드시 쫓아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두명 모두 60을 넘은 노인이지만 처음부터 옹의 숭배자이다. 옹이 나의 집에 머물자, 2명이 함께 나의 집에 나타난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면 놀이를 중단하고 각자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좋아하는 놀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밤을 새는 일은 없었다.</p>
      <p>&nbsp;</p>
      <p>옹은 식사 등도 매우 양이 적어 아침은 커피 한 잔에 빵 한 조각.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다. 그 고령에 명민한 두뇌, 넘치는 정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러한 절제된 생활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p>
      <p>&nbsp;</p>
      <p>옹의 집에서는 3대를 연속해서 리하르트로 부르고 있다. 영식도 리하르트, 영손도 리하르트. 가내에서 리하르트로 불리는 것은 손자로 옹은 모두로부터 파파, 파파로 불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단순히 가정 내에서 그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일뿐만 아니라 실로 근대 음악계의 위대한 파파였다. (&lt;레코드예술&gt; 1950년)</p>
      </div>
   </div>
<div>&nbsp;</div>
]]></content:encoded>

<atom:category label="자료실|칼럼.기고" term="20240721145047_8219|20240721145741_6388"/>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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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published>2021-12-31T17:11:25+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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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애국가를 돈 내고 들으라고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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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꽤나 오랫동안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허나 이런 기사를 만나면 아무리 팩트를 외쳐댄들 들을 귀가 없으면 별무 소용임을 알게 된다. 허나 다시 한 번 또 외쳐야겠다. 안익태 &amp;#038;lt;애/국/가&amp;#038;gt;/는/국/가/가/ 아/니/다! 그래서 이 곡의 제창을 강요할 법적 근거는 없다. 또한 불러야할 의무도 없다. 애국가 4절 외우라고 요구하는 건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다.&amp;#038;nbsp;
&amp;#038;nbsp;
그럼 지금 안익태 작 애국가는 도대체 뭔가? 요컨대 1936년 경 미국에서 작곡되어 교민 사회 일각에서 불리다, 이승만계 대한인국민회가 1942년 임시정부에 사용허가를 신청, 허가를 득한다. 임시정부로선 이를 국가로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 국내에 처음 소개된 때는 해방직후인 1945.12.16 -17 이화여고 동창회가 주최한 독립축전 음악대회에서다. 대회 수입은 38선 이북 곧 서북출신 학생 학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후 안익태 애국가는 주로 이승만계, 기독계, 이북출신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적 의미에서 국가였던 적은 없었다.&amp;#038;nbsp;
&amp;#038;nbsp;
안익태 본인도 자신의 곡이 비공식 국가처럼 불리고 있는 사실을 알 지 못했다. 그는 1955년 이승만 80회 생일에 맞춰 귀국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스페인으로 도피중 그때까지의 "만주"환상곡을 이보해 다시 "코리아"환상곡으로 우라까이(자기표절)해 스페인에서 또 "초연"한 그 악보를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안익태는 1960년 4.19혁명 직전이자 3.15부정선거 직후였던 이승만의 85회 생일에 다시 한국에 와 축하공연을 했다. 그리고 나서 5.16쿠데타 직후에는 박정희를 방문한다.&amp;#038;nbsp;
&amp;#038;nbsp;
안익태의 친일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없다. 친독재도 뭐 아니라 하기 어렵다. 그가 만든 애국가 선율 역시 대동아 음악성전을 위해, 나치독일의 승리를 위해 심하게 혹사당했다. 바로 그 애국가가 이후 부마, 광주항쟁때도 또 6월항쟁때도 불리웠다. 물론 이 당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애국적" 집단 정체성이었지 안익태는 아니었다.&amp;#038;nbsp;
&amp;#038;nbsp;
다시 말하지만 안익태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그 이유 때문에 수십년 동안 우리 모두가 그에게 저작료를 냈던 것이다. 이 멜로디가 한 때 대일본제국, 만주국 그리고 어떤 때는 제3제국의 이익을 위해 울렸음에도말이다. 이 희비극을 어쩔건가...
&amp;#038;nbsp;
관련기사 링크 :&amp;#038;nbsp;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amp;#038;amp;mid=sec&amp;#038;amp;oid=022&amp;#038;amp;aid=0003015270&amp;#038;amp;sid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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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div>꽤나 오랫동안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허나 이런 기사를 만나면 아무리 팩트를 외쳐댄들 들을 귀가 없으면 별무 소용임을 알게 된다. 허나 다시 한 번 또 외쳐야겠다. 안익태 &lt;애/국/가&gt;/는/국/가/가/ 아/니/다! 그래서 이 곡의 제창을 강요할 법적 근거는 없다. 또한 불러야할 의무도 없다. 애국가 4절 외우라고 요구하는 건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다.&nbsp;</div>
<div>&nbsp;</div>
<div>그럼 지금 안익태 작 애국가는 도대체 뭔가? 요컨대 1936년 경 미국에서 작곡되어 교민 사회 일각에서 불리다, 이승만계 대한인국민회가 1942년 임시정부에 사용허가를 신청, 허가를 득한다. 임시정부로선 이를 국가로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 국내에 처음 소개된 때는 해방직후인 1945.12.16 -17 이화여고 동창회가 주최한 독립축전 음악대회에서다. 대회 수입은 38선 이북 곧 서북출신 학생 학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후 안익태 애국가는 주로 이승만계, 기독계, 이북출신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적 의미에서 국가였던 적은 없었다.&nbsp;</div>
<div>&nbsp;</div>
<div>안익태 본인도 자신의 곡이 비공식 국가처럼 불리고 있는 사실을 알 지 못했다. 그는 1955년 이승만 80회 생일에 맞춰 귀국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스페인으로 도피중 그때까지의 "만주"환상곡을 이보해 다시 "코리아"환상곡으로 우라까이(자기표절)해 스페인에서 또 "초연"한 그 악보를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안익태는 1960년 4.19혁명 직전이자 3.15부정선거 직후였던 이승만의 85회 생일에 다시 한국에 와 축하공연을 했다. 그리고 나서 5.16쿠데타 직후에는 박정희를 방문한다.&nbsp;</div>
<div>&nbsp;</div>
<div>안익태의 친일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없다. 친독재도 뭐 아니라 하기 어렵다. 그가 만든 애국가 선율 역시 대동아 음악성전을 위해, 나치독일의 승리를 위해 심하게 혹사당했다. 바로 그 애국가가 이후 부마, 광주항쟁때도 또 6월항쟁때도 불리웠다. 물론 이 당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애국적" 집단 정체성이었지 안익태는 아니었다.&nbsp;</div>
<div>&nbsp;</div>
<div>다시 말하지만 안익태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그 이유 때문에 수십년 동안 우리 모두가 그에게 저작료를 냈던 것이다. 이 멜로디가 한 때 대일본제국, 만주국 그리고 어떤 때는 제3제국의 이익을 위해 울렸음에도말이다. 이 희비극을 어쩔건가...</div>
<div>&nbsp;</div>
<div>관련기사 링크 :&nbsp;<a href="http://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amp;mid=sec&amp;oid=022&amp;aid=0003015270&amp;sid1=001" target="_blank">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amp;mid=sec&amp;oid=022&amp;aid=0003015270&amp;sid1=001</a></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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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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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이승만의 선물을 달고 있는 안익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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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에키타이 안] 1938년 2월 20일 &amp;#039;애국가&amp;#039;선율이 포함된 &amp;#038;lt;코리아환타지&amp;#038;gt;가 더블린 Gaiety Theatre에서 초연되었다. 아래는 그 극장의 현재 모습이다. 이 때까지 안익태의 영문이름은 Eak Tai Ahn이지 에키타이안이 아니었다. 우리 나이로 33세 당시의 안익태다. 이 멋진 극장에서 연주된 환상곡의 4악장에 애국가의 선율이 포함되어 있었다.
&amp;#038;nbsp;
일요일 공연을 앞두고 더블린에 도착한 안익태를 현지 The Irish Times에서 인터뷰한 기사다. 38년 2월 15일이었다. 오래전 영국유학중인 나으 제자이자 학문의 도반인 유철군에게 부탁해 두었던 것을 이제 받아 보았다. 이 내용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자가 어떻게 알아 들었는지 모르지만, 인터뷰기사의 내용은 뭐라 할까 좀 괴이하다. 아래 그 인터뷰 내용을 보자. "금세기 초 러일전쟁직후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지위를 상실하고 일본의 지배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의견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왕자 리(Prince Li)다. 그는 2,000년 동안 이 나라를 통치한 황가 혈통의 계승자다. 이 들 민족주의자 상당수는 정치범으로 감옥에 있으며 온 나라가 자신들의 자유를 되찾아 줄 동방에서의 사태 전개를 기다리고 있다."

   &amp;#038;nbsp;


   때는 1930년대 바야흐르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유럽 또한 세계 전쟁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애국가 세계초연의 현장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2,000년 황실 혈통의 적통자 "왕자 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오락가락하지만 안익태가 1938년 이 시점까지 낮은 수준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갖고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왕자 리"가 누군가. 평소 이승만은 자신을 왕가의 후손이라고 떠들고 다녔고, 또 스스로 왕노릇을 했다. 그렇다면 "왕자 리"가 바로 이승만?
   &amp;#038;nbsp;
   1955년 이승만 탄신 80주년을 맞아 애국자로 둔갑해 귀국한 안익태에게 이승만은 문화훈장 1호를 선물했고, 안익태는 코리아환타지 자필 악보를 이 &amp;#039;민족의 영도자&amp;#039;에게 헌정했다. 사진은 이승만의 선물을 가슴에 달고 지휘하고 있는 안익태다.
   &amp;#038;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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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에키타이 안] 1938년 2월 20일 '애국가'선율이 포함된 &lt;코리아환타지&gt;가 더블린 Gaiety Theatre에서 초연되었다. 아래는 그 극장의 현재 모습이다. 이 때까지 안익태의 영문이름은 Eak Tai Ahn이지 에키타이안이 아니었다. 우리 나이로 33세 당시의 안익태다. 이 멋진 극장에서 연주된 환상곡의 4악장에 애국가의 선율이 포함되어 있었다.</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nbsp;</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일요일 공연을 앞두고 더블린에 도착한 안익태를 현지 The Irish Times에서 인터뷰한 기사다. 38년 2월 15일이었다. 오래전 영국유학중인 나으 제자이자 학문의 도반인 유철군에게 부탁해 두었던 것을 이제 받아 보았다. 이 내용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그런데 기자가 어떻게 알아 들었는지 모르지만, 인터뷰기사의 내용은 뭐라 할까 좀 괴이하다. 아래 그 인터뷰 내용을 보자. "금세기 초 러일전쟁직후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지위를 상실하고 일본의 지배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독립을 회복<span class="text_exposed_hide">...</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하기 위해 일하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의견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왕자 리(Prince Li)다. 그는 2,000년 동안 이 나라를 통치한 황가 혈통의 계승자다. 이 들 민족주의자 상당수는 정치범으로 감옥에 있으며 온 나라가 자신들의 자유를 되찾아 줄 동방에서의 사태 전개를 기다리고 있다."</span></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
   <span class="text_exposed_show">&nbsp;</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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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text_exposed_show" style="font-size: 15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background-color:="" #ffffff;"="">
   <p style="padding: 0px;">때는 1930년대 바야흐르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유럽 또한 세계 전쟁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애국가 세계초연의 현장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2,000년 황실 혈통의 적통자 "왕자 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오락가락하지만 안익태가 1938년 이 시점까지 낮은 수준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갖고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왕자 리"가 누군가. 평소 이승만은 자신을 왕가의 후손이라고 떠들고 다녔고, 또 스스로 왕노릇을 했다. 그렇다면 "왕자 리"가 바로 이승만?</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padding: 0px;">1955년 이승만 탄신 80주년을 맞아 애국자로 둔갑해 귀국한 안익태에게 이승만은 문화훈장 1호를 선물했고, 안익태는 코리아환타지 자필 악보를 이 '민족의 영도자'에게 헌정했다. 사진은 이승만의 선물을 가슴에 달고 지휘하고 있는 안익태다.</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31170158_tfcxbsnf.jpg" alt="10993394_873798079329259_3397978029313429517_n.jpg" style="width: 427px; height: 247px; float: left; margin-right: 1e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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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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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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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category label="안익태 애국가|왜 문제인가?|안익태는 누구인가?" term="20240721144936_0879|20240721145302_7788|20240721145340_2145"/>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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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일본축전곡'을 지휘했던 에키타이 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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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소장하고 있는 안익태 &amp;#038;lt;한국환상곡&amp;#038;gt; LP판, 1961년 LA필하모니 버전이다. 오래전 서라벌레코드사에서 찍었다. 작곡자 자신이 해석하고, 연주도 LA필 정도 되니 음악적으론 꽤나 가치 있다고 볼 만하다.
판의 뒷면을 보면 1942년 베를린 필과 &amp;#038;lt;코리아&amp;#038;gt; 즉 이 곡 &amp;#038;lt;코리아환상곡&amp;#038;gt;을 지휘했고 또 슈트라우스 페스티벌에서 지휘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이런 식이다. 사실은 날조되고 철저하게 은폐된 채, 진실은 사라지고 허구만 살아 있다. 직전 포스팅한 영상에서 똑똑히 볼 수 있듯, 전쟁중 그것도 나치 심장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주독 일본대사와 만주국 고위층을 모신 자리에서 "대한사람 대한으로 우리 나라 만세"를 합창했다는 말 아닌가.
...

   마찬가지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 페스티벌에서 지휘한 것은 슈트라우스가 일본 황기 2,600년을 기념해 작곡한 &amp;#038;lt;일본축전곡&amp;#038;gt;이었다. 허기사 그런 슈트라우스 출생 150주년을 맞아 작년 우리 KBS가 기념 연주회를 했으니 아직도 길 길이 멀다. 작년 그 맘때쯤 슈트라우스와 에키타이 그리고 &amp;#038;lt;일본축전곡&amp;#038;gt;을 상기한 것이 전국에 나 하나라면 이는 쫌 심각하다 해야하나.
   &amp;#038;nbsp;
   
   &amp;#038;nbs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소장하고 있는 안익태 &lt;한국환상곡&gt; LP판, 1961년 LA필하모니 버전이다. 오래전 서라벌레코드사에서 찍었다. 작곡자 자신이 해석하고, 연주도 LA필 정도 되니 음악적으론 꽤나 가치 있다고 볼 만하다.</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판의 뒷면을 보면 1942년 베를린 필과 &lt;코리아&gt; 즉 이 곡 &lt;코리아환상곡&gt;을 지휘했고 또 슈트라우스 페스티벌에서 지휘했다고 되어 있다.</p>
<p style="padding: 0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그렇다. 이런 식이다. 사실은 날조되고 철저하게 은폐된 채, 진실은 사라지고 허구만 살아 있다. 직전 포스팅한 영상에서 똑똑히 볼 수 있듯, 전쟁중 그것도 나치 심장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주독 일본대사와 만주국 고위층을 모신 자리에서 "대한사람 대한으로 우리 나라 만세"를 합창했다는 말 아닌가.</p>
<p><span class="text_exposed_hide"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font-size:="" 15px;="" background-color:="" #ffffff;"="">...</span></p>
<div class="text_exposed_show" style="font-size: 15px;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background-color:="" #ffffff;"="">
   <p style="padding: 0px;">마찬가지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 페스티벌에서 지휘한 것은 슈트라우스가 일본 황기 2,600년을 기념해 작곡한 &lt;일본축전곡&gt;이었다. 허기사 그런 슈트라우스 출생 150주년을 맞아 작년 우리 KBS가 기념 연주회를 했으니 아직도 길 길이 멀다. 작년 그 맘때쯤 슈트라우스와 에키타이 그리고 &lt;일본축전곡&gt;을 상기한 것이 전국에 나 하나라면 이는 쫌 심각하다 해야하나.</p>
   <p style="padding: 0px;">&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31165538_xgkhfgce.jpg" alt="10986702_871963032846097_1659129232365056712_n.jpg" style="width: 497px; height: 280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31165547_tvzyraov.jpg" alt="10942509_871963046179429_6126889846269108532_n.jpg" style="width: 497px; height: 280px;" /></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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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7:08:51+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1-12-31T16:57:07+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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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에키타이 안 바르셀로나 라디오 편성표 모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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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amp;#038;nbsp;에키타이안 1944.10.30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amp;#038;lt;만주국&amp;#038;gt;
&amp;#038;nbsp;

&amp;#038;nbsp;
에키타이안 1944.11.11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
&amp;#038;nbsp;

   

&amp;#038;nbsp;
에키타이안 1944.12.10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
&amp;#038;nbs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h3 class="title_text"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font-weight: 400; font-size: 26px; overflow-wrap: break-word; word-break: break-word;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background-color:="" #ffffff;"="">&nbsp;에키타이안 1944.10.30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lt;만주국&gt;</h3>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26224522_dxbdnltt.png" alt="에키타이안_바르셀로나_441030.png" style="width: 595px; height: 842px;"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h3 class="title_text"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font-weight: 400; font-size: 26px; overflow-wrap: break-word; word-break: break-word;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background-color:="" #ffffff;"="">에키타이안 1944.11.11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h3>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26224757_idflzhsm.png" alt="에키타이안_바르셀로나_441111.png" style="width: 595px; height: 842px;" />
</p>
<p style="text-align: center;">&nbsp;</p>
<h3 class="title_text" style="text-align: center; margin: 0px; padding: 0px; font-weight: 400; font-size: 26px; overflow-wrap: break-word; word-break: break-word; color: #333333; font-family: " apple="" sd="" gothic="" neo",="" "맑은="" 고딕",="" "malgun="" gothic",="" 돋움,="" dotum,="" sans-serif;="" background-color:="" #ffffff;"="">에키타이안 1944.12.10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h3>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26224838_lrvuxtvi.png" alt="에키타이안_바르셀로나_441210.png" style="width: 595px; height: 842px;" />
</p>
]]></content:encoded>

<atom:category label="자료실|연구자료" term="20240721145047_8219|20240721145732_1988"/>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7:12:37+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1-12-26T22:45:26+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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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일본 천황 찬양을 지휘한 에키타이 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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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비엔나엔 유명한 교향악단이 2개 있다. 비엔나 필하모니와 비엔나 심포니다. 앞에 것이 훨씬 우월한 명성을 누린다.에키타이 안은 후자 곧 비엔나 심포니와 42년 3월과 43년 2 월 두번 협연한 것으로 보인다. 안익태 시리즈 맨 처음 포스팅한 것이 1943년 2월 자신의 &amp;#038;lt;만주국&amp;#038;gt; 연주 프로그램이었다. 동부전선 곧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의 패배가 확실시 되던 급박한 시점이었다.그보다 일년 앞서&amp;#038;nbsp;42년 3월 그는 비엔나 심포니를 지휘했다. 프로그램을 보자면 베에토벤 &amp;#038;lt;에그몬트서곡&amp;#038;gt;, 바흐 &amp;#038;lt;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amp;#038;gt;, &amp;#038;lt;야악&amp;#038;gt;, 리스트 피아노협주곡 2번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번호 84, &amp;#038;lt;일본축전곡 , 황기2600 년 봉축음악&amp;#038;gt;등이다.이 중 밤의 음악이란 뜻인 &amp;#038;lt;야악&amp;#038;gt;은 현재 악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amp;#038;lt;에텐라쿠&amp;#038;gt;처럼 일본아악을 편곡한게 아닌가 싶다.이날 연주에서 중심은 아무래도 황기 2,600년을 봉축하기 위해 일본정부가 의뢰하고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슈트라우스에게 요청해 만든 &amp;#038;lt;일본축전곡&amp;#038;gt;이다. 이 곡은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바다풍경 2.벚꽃축제 3.화산폭발 4.사무라이의 공격 5. 천황찬가.&amp;#038;nbsp;추측건대 이연주를 고리로 슈트라우스와 에키타이 안이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이고, 당대의 문화권력 슈트라우스는 안에게 꽤나 만족했던지 다른 악단등에 안의 추천장을 써주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 은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아무튼 이렇게 에키타이 안은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곡을 지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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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비엔나엔 유명한 교향악단이 2개 있다. 비엔나 필하모니와 비엔나 심포니다. 앞에 것이 훨씬 우월한 명성을 누린다.<br /><br />에키타이 안은 후자 곧 비엔나 심포니와 42년 3월과 43년 2 월 두번 협연한 것으로 보인다. 안익태 시리즈 맨 처음 포스팅한 것이 1943년 2월 자신의 &lt;만주국&gt; 연주 프로그램이었다. 동부전선 곧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의 패배가 확실시 되던 급박한 시점이었다.<br /><br />그보다 일년 앞서&nbsp;42년 3월 그는 비엔나 심포니를 지휘했다. 프로그램을 보자면 베에토벤 &lt;에그몬트서곡&gt;, 바흐 &lt;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gt;, &lt;야악&gt;, 리스트 피아노협주곡 2번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번호 84, &lt;일본축전곡 , 황기2600 년 봉축음악&gt;등이다.<br /><br />이 중 밤의 음악이란 뜻인 &lt;야악&gt;은 현재 악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lt;에텐라쿠&gt;처럼 일본아악을 편곡한게 아닌가 싶다.<br /><br />이날 연주에서 중심은 아무래도 황기 2,600년을 봉축하기 위해 일본정부가 의뢰하고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슈트라우스에게 요청해 만든 &lt;일본축전곡&gt;이다. 이 곡은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바다풍경 2.벚꽃축제 3.화산폭발 4.사무라이의 공격 5. 천황찬가.&nbsp;<br /><br />추측건대 이연주를 고리로 슈트라우스와 에키타이 안이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이고, 당대의 문화권력 슈트라우스는 안에게 꽤나 만족했던지 다른 악단등에 안의 추천장을 써주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 은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아무튼 이렇게 에키타이 안은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곡을 지휘하게 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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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71503_lgwexnyc.jpg" alt="일본천황 찬양한 안익태.jpg" style="width: 487px; height: 800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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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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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나치와 일제 패망 후 스페인으로 도피한 에키타이 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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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나치독일과 일제의 패전후 일본사람 에키타이 안이 도피한 곳은 마찬가지 파시스트 독재국가인 스페인이었다. 1946년 3월 16일 에키타이 안의 이름이 바르셀로나 라디오방송국 편성표에 등장했다.&amp;#038;nbsp;우선 당일의 연주목록을 보자. 이 날 에키타이 안은 리세오극장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 바그너의 &amp;#039;리엔치 서곡", &amp;#038;lt;니벨룽의 반지&amp;#038;gt;에 나오는 "신들의 황혼", 본인이 작곡한 교향시 "에텐라쿠"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 minor", "푸가 G minor", 칸타타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를 연주하고 휴식시간뒤에 1944년 -1945년 사이 작곡된 교향적 환상곡 &amp;#038;lt;코리아&amp;#038;gt;를 &amp;#039;세계초연&amp;#039;했다.그렇다. 1. 여전히 그는 에키타이라는 일본이름을 쓰고 있다. 2. &amp;#038;lt; 에텐라쿠&amp;#038;gt; 는 일본왕실의 궁중음악을 서양 관현악 악기로 편곡한 곡으로 그가 이미 나치독일에서 몇 번 연주한 바 있는 곡이다. 여기 부제에서도 적혀 있듯 일본의 궁중음악 에텐라쿠는 이후 &amp;#038;lt;강천성악&amp;#038;gt;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전통음악으로 둔갑한다. 3. 베토벤이 사라지고 바흐가 대거 등장했다. 4. 일반적으로 애국가가 포함된 &amp;#038;lt;코리아환상곡&amp;#038;gt;은 1938년 2월 20일 더블린에서 세계초연된 걸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amp;#039;세계초연&amp;#039;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 38년 코리아환상곡을 44년~45년 사이 개작한 걸로 보인다. 3악장은 나의 조국, 그 과거, 그 미래 란 이름이 붙어 지금의 코리아 환상곡에서 합창부분이 빠진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제 &amp;#038;lt;만주국&amp;#038;gt;은 사라졌다.이 시점 에키타이 안은 여전히 일본이름을 쓰고, 일본왕실 음악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오래전 자신이 만든 &amp;#038;lt;코리아환상곡&amp;#038;gt;을 손 봐서 &amp;#039;나의 조국&amp;#039;을 지휘하고 있다.에키타이 안과 안익태, 두개의 인격, 정신분석에서 이를 두고 &amp;#039;해리 dissociation&amp;#039;라 하던가....&amp;#038;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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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나치독일과 일제의 패전후 일본사람 에키타이 안이 도피한 곳은 마찬가지 파시스트 독재국가인 스페인이었다. 1946년 3월 16일 에키타이 안의 이름이 바르셀로나 라디오방송국 편성표에 등장했다.&nbsp;</span><br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 /><br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 /><span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우선 당일의 연주목록을 보자. 이 날 에키타이 안은 리세오극장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 바그너의 '리엔치 서곡", &lt;니벨룽의 반지&gt;에 나오는 "신들의 황혼", 본인이 작곡한 교향시 "에텐라쿠" (하늘에</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display: inline; 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서 내려온 음악),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 minor", "푸가 G minor", 칸타타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를 연주하고 휴식시간뒤에 1944년 -1945년 사이 작곡된 교향적 환상곡 &lt;코리아&gt;를 '세계초연'했다.<br /><br />그렇다. 1. 여전히 그는 에키타이라는 일본이름을 쓰고 있다. 2. &lt; 에텐라쿠&gt; 는 일본왕실의 궁중음악을 서양 관현악 악기로 편곡한 곡으로 그가 이미 나치독일에서 몇 번 연주한 바 있는 곡이다. 여기 부제에서도 적혀 있듯 일본의 궁중음악 에텐라쿠는 이후 &lt;강천성악&gt;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전통음악으로 둔갑한다. 3. 베토벤이 사라지고 바흐가 대거 등장했다. 4. 일반적으로 애국가가 포함된 &lt;코리아환상곡&gt;은 1938년 2월 20일 더블린에서 세계초연된 걸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세계초연'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 38년 코리아환상곡을 44년~45년 사이 개작한 걸로 보인다. 3악장은 나의 조국, 그 과거, 그 미래 란 이름이 붙어 지금의 코리아 환상곡에서 합창부분이 빠진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제 &lt;만주국&gt;은 사라졌다.<br /><br />이 시점 에키타이 안은 여전히 일본이름을 쓰고, 일본왕실 음악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오래전 자신이 만든 &lt;코리아환상곡&gt;을 손 봐서 '나의 조국'을 지휘하고 있다.<br /><br />에키타이 안과 안익태, 두개의 인격, 정신분석에서 이를 두고 '해리 dissociation'라 하던가....&nbsp;<br /></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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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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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대한민국 애국가를 작곡한 일본인 에키타이 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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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일본사람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 우리 애국가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이제는 꽤나 알려져 있다. 그 분의 한국이름이 안익태라는 것도 말이다. 이 분이 1943년 2월 11일 목요일 오후 7시 반 그 유명한 빈의 뮤직페어라인(음악협회) 대공연장에서 빈 국립오페라합창단 그리고 시립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과 교향곡 제7번 그리고 자신이 작곡한 &amp;#038;lt;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혼성합창단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국Mandschukuo&amp;#038;gt;을 공연했다.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곡이고 그 이전 베를린필에서도 공연한 바 있다.&amp;#038;nbsp;


   &amp;#038;nbsp;


   아래 사진은 당일의 공연프로그램이다 (내가 찾은 것이니 마구 퍼나르셔도 된다 ㅎ). 이상하게도 에키타이 안의 &amp;#038;lt;만주환상곡&amp;#038;gt;의 악보는 현재 분실된 상태다. 그 당시 에키타이 안은 단 한번도 &amp;#038;lt;한국환상곡&amp;#038;gt;을 공연한 적이 없다. 대신 바로 이&amp;#038;lt;만주환상곡&amp;#038;gt;을 지휘했다. 이 &amp;#038;lt;만주환상곡&amp;#038;gt;에서 &amp;#039;만주&amp;#039;를 떼고 &amp;#039;한국&amp;#039;Korea을 집어넣은 것이 &amp;#038;lt;한국환상곡&amp;#038;gt;인지 현재 100%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나치를 포함 독일청중앞에서 이 곡을 연주한 기록영상물상으론 특히 &amp;#039;무궁화 삼천리....&amp;#039;등에서 우리 애국가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만주환상곡의 합창 가사를 쓴 사람은 독일주재 일본외교관 이하라 고이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10년 세월 제국은 무르익었다. 부지런한 땀은 보답받았네. 민중은 환호한다. 나라는 저 멀리 빛난다./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되어 사람들은, 희망에 차 번성한다. 난(蘭)은 환히 피었고, 새 질서의 첫 열매가./ 우리는 일본과 굳건히 연결되었네. 이 신성한 목표 속에 하나의 심장과도 같이,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네, 독일이여 또한 이탈리아여 힘을 냅시다./ 영원한 봄날은 이미 가까이 와있네, 모든 족속 만족해할 그날이. 보라! 저 만주 평원 위에, 향기로운 난 환히 피었다."일본사람 에키타이 안은 독일체류 당시 바로 이 분 이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기숙했다. 나치가 패망하는 시점 그는 파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치독일의 동맹국 프랑코의 스페인으로 &amp;#039;튀었다&amp;#039;. 그 곳에서 스페인여성과 결혼 국적세탁에 성공했고, 스페인사람이 된다. 스페인사람 에키타이 안은 유럽최고 휴양지중 하나인 스페인 마요카에서 이후 잘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amp;#038;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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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일본사람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 우리 애국가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이제는 꽤나 알려져 있다. 그 분의 한국이름이 안익태라는 것도 말이다. 이 분이 1943년 2월 11일 목요일 오후 7시 반 그 유명한 빈의 뮤직페어라인(음악협회) 대공연장에서 빈 국립오페라합창단 그리고 시립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과 교향곡 제7번 그리고 자신이 작곡한 &lt;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혼성합창단을 위한 교</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display: inline; 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향적 환상곡 만주국Mandschukuo&gt;을 공연했다.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곡이고 그 이전 베를린필에서도 공연한 바 있다.&nbsp;</span>
</p>
<p>
   <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display: inline; 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nbsp;</span>
</p>
<p>
   <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display: inline; 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아래 사진은 당일의 공연프로그램이다 (내가 찾은 것이니 마구 퍼나르셔도 된다 ㅎ). 이상하게도 에키타이 안의 &lt;만주환상곡&gt;의 악보는 현재 분실된 상태다. 그 당시 에키타이 안은 단 한번도 &lt;한국환상곡&gt;을 공연한 적이 없다. 대신 바로 이&lt;만주환상곡&gt;을 지휘했다. 이 &lt;만주환상곡&gt;에서 '만주'를 떼고 '한국'Korea을 집어넣은 것이 &lt;한국환상곡&gt;인지 현재 100%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나치를 포함 독일청중앞에서 이 곡을 연주한 기록영상물상으론 특히 '무궁화 삼천리....'등에서 우리 애국가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span>
</p>
<p>
   <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display: inline; 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br />이 만주환상곡의 합창 가사를 쓴 사람은 독일주재 일본외교관 이하라 고이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br /><br />"10년 세월 제국은 무르익었다. 부지런한 땀은 보답받았네. 민중은 환호한다. 나라는 저 멀리 빛난다./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되어 사람들은, 희망에 차 번성한다. 난(蘭)은 환히 피었고, 새 질서의 첫 열매가./ 우리는 일본과 굳건히 연결되었네. 이 신성한 목표 속에 하나의 심장과도 같이,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네, 독일이여 또한 이탈리아여 힘을 냅시다./ 영원한 봄날은 이미 가까이 와있네, 모든 족속 만족해할 그날이. 보라! 저 만주 평원 위에, 향기로운 난 환히 피었다."<br /><br />일본사람 에키타이 안은 독일체류 당시 바로 이 분 이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기숙했다. 나치가 패망하는 시점 그는 파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치독일의 동맹국 프랑코의 스페인으로 '튀었다'. 그 곳에서 스페인여성과 결혼 국적세탁에 성공했고, 스페인사람이 된다. 스페인사람 에키타이 안은 유럽최고 휴양지중 하나인 스페인 마요카에서 이후 잘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span>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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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category label="안익태 애국가|왜 문제인가?|친일 친나치 밀착" term="20240721144936_0879|20240721145302_7788|20240721145407_5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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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나치독일  회원이었던 유일한 조선인 '에키타이 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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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키타이 안은 조선출신의 유일한 나치독일의 &amp;#038;lt;제국음악협회&amp;#038;gt; 회원이었다. 전 사회를 완벽하게, 전일적으로 조직화했던 나치독일에서 이 협회는 말하자면 음악분야의 나치 선전일꾼들의 조직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래 사진은 음악학자 이경분이 찾아 낸 에키타이 안의 회원증 사본이다.&amp;#038;nbsp;내용을 보면, 성명: A h n /Ekitai, 주소: Grunewald구, Gustav- Freytag- str. 15번지, 생년월일: 1911년 12월 5일, 출생지: 동경/ 일본, 국적: 일본, 직업: 지휘자 겸 작곡가, "제국영토내 근로허가(A.G.)를 부여함" 이라고 오른 쪽 하단에 적혀 있다. 여기서 에키타이 안은 자신의 출생지를 평양이 아니라 동경이라고 명백히 허위로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출생년도도 1906년인데 1911년이라고 되어 있다.&amp;#038;nbsp;특히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사각 스탬프안의 내용이다. 그대로 옮기면,&amp;#038;nbsp;Nachteilige Notierungen in politischer Hinsicht liegen nicht vor.(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기재 사항 없음)Reichssicherheitshauptamt 4 C Id (제국안전본부 4국 C실 I과 d)Berlin, den 24 Juli 1943 (1943년 7월 24일 베를린)줄여서 흔히 RSHA라 불리는 제국안전본부에는 모두 6개의 국이 있는 데 &amp;#038;lt;제4국&amp;#038;gt;이 바로 그 유명한 게슈타포(Gestapo, 국가비밀경찰)다. 제4국 곧 게쉬타포내에는 다시 A(저항세력), B(세계관등 사상검열), C(기록관리), D (점령지), E (방첩), P(외사업무)등 6개의 실이 있다. 그중 4국 C실 1과는 심사등 기본적인 기록관리, 일종의 존안카드를 관리한다고 보면 되겠다.그리고 &amp;#039;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사항 없음&amp;#039;은 게쉬타포가 해당 인물에 대한 신원조회를 하고 회신을 할 때 관용적으로 흔히 사용하던 문구다. 쉽게 말해 에키타이 안의 사상등 신원은 게쉬타포가 보더라도 별 하자가 없다는 말로 보면 된다.&amp;#038;nbsp;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에키타이 안의 주소를 보자. 그뤼네발트는 베를린 서쪽의 호숫가 고급주택가다. 나도 베를린 있을 때 좀 가볼 라 하다가 너무 비싸 꿈도 못꾼 구역이다. 그 중 구스타프 프라이탁가는 바로 호수에 면해 있는 주택가다. 음악학자 송병욱이 밝혀 냇듯이 이 집은 일본외교관 이하라 고이치가 거주하던 집이자 사무공간이기도 했던 것 같다.&amp;#038;nbsp;한 때 애국가를 작곡할 정도로 &amp;#039;불령선인&amp;#039;이었던 안익태, 이제 일본대사관이 확실하게 신원을 보장해 주는 그래서 게쉬타포조차도 정치적 하자가 없다고 판정해 준 그런 &amp;#039;동경&amp;#039;출신 일본인으로 완벽 변신해 있다.


   &amp;#038;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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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에키타이 안은 조선출신의 유일한 나치독일의 &lt;제국음악협회&gt; 회원이었다. 전 사회를 완벽하게, 전일적으로 조직화했던 나치독일에서 이 협회는 말하자면 음악분야의 나치 선전일꾼들의 조직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래 사진은 음악학자 이경분이 찾아 낸 에키타이 안의 회원증 사본이다.&nbsp;</span><br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 /><br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 /><span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내용을 보면, 성명: A h n /Ekitai, 주소: Grunewald구, Gustav- Freytag- str. 15번지, 생년</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 display:="" inline;"="">월일: 1911년 12월 5일, 출생지: 동경/ 일본, 국적: 일본, 직업: 지휘자 겸 작곡가, "제국영토내 근로허가(A.G.)를 부여함" 이라고 오른 쪽 하단에 적혀 있다. 여기서 에키타이 안은 자신의 출생지를 평양이 아니라 동경이라고 명백히 허위로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출생년도도 1906년인데 1911년이라고 되어 있다.&nbsp;<br /><br />특히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사각 스탬프안의 내용이다. 그대로 옮기면,&nbsp;<br />Nachteilige Notierungen in politischer Hinsicht liegen nicht vor.<br />(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기재 사항 없음)<br />Reichssicherheitshauptamt 4 C Id (제국안전본부 4국 C실 I과 d)<br />Berlin, den 24 Juli 1943 (1943년 7월 24일 베를린)<br /><br />줄여서 흔히 RSHA라 불리는 제국안전본부에는 모두 6개의 국이 있는 데 &lt;제4국&gt;이 바로 그 유명한 게슈타포(Gestapo, 국가비밀경찰)다. 제4국 곧 게쉬타포내에는 다시 A(저항세력), B(세계관등 사상검열), C(기록관리), D (점령지), E (방첩), P(외사업무)등 6개의 실이 있다. 그중 4국 C실 1과는 심사등 기본적인 기록관리, 일종의 존안카드를 관리한다고 보면 되겠다.<br /><br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사항 없음'은 게쉬타포가 해당 인물에 대한 신원조회를 하고 회신을 할 때 관용적으로 흔히 사용하던 문구다. 쉽게 말해 에키타이 안의 사상등 신원은 게쉬타포가 보더라도 별 하자가 없다는 말로 보면 된다.&nbsp;<br /><br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에키타이 안의 주소를 보자. 그뤼네발트는 베를린 서쪽의 호숫가 고급주택가다. 나도 베를린 있을 때 좀 가볼 라 하다가 너무 비싸 꿈도 못꾼 구역이다. 그 중 구스타프 프라이탁가는 바로 호수에 면해 있는 주택가다. 음악학자 송병욱이 밝혀 냇듯이 이 집은 일본외교관 이하라 고이치가 거주하던 집이자 사무공간이기도 했던 것 같다.&nbsp;<br /><br />한 때 애국가를 작곡할 정도로 '불령선인'이었던 안익태, 이제 일본대사관이 확실하게 신원을 보장해 주는 그래서 게쉬타포조차도 정치적 하자가 없다고 판정해 준 그런 '동경'출신 일본인으로 완벽 변신해 있다.</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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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color: #37404e; font-family: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 display:="" inline;"="">&nbsp;</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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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category label="안익태 애국가|왜 문제인가?|안익태는 누구인가?" term="20240721144936_0879|20240721145302_7788|20240721145340_2145"/>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atom:updated>2024-07-21T17:22:12+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1-12-26T16:37:24+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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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안익태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거해 기소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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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에키타이 안=안익태가 이 법률에 의거 기소되었다면 과연 몇 조, 몇 항의 적용을 받았을까, 그리고 형량은 어느 정도 였을까?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다시 읽다.반민족행위처벌법&amp;#038;nbsp;[시행 1948.9.22] [법률 제3호, 1948.9.22, 제정]제1장 죄제1조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한다.제2조 일본정부로부터 작을 수한 자 또는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한다.제3조 일본치하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제4조 좌의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0년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할 수 있다.1.습작한 자2.중추원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되었던 자3.칙임관이상의 관리되었던 자4.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5.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하였던 자6.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7.비행기, 병기 또는 탄약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8.도, 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적이 현저한 자9.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10.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11.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12. 개인으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제5조 일본치하에 고등관 3등급이상, 훈 5등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경과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제6조 본법에 규정한 죄를 범한 자 개전의 정상이 현저한 자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할 수 있다.제7조 타인을 모함할 목적 또는 범죄자를 옹호할 목적으로 본법에 규정한 범죄에 관하여 허위의 신고, 위증, 증거인멸을 한 자 또는 범죄자에게 도피의 길을 협조한 자는 당해 내용에 해당한 범죄규정으로 처벌한다.제8조 본법에 규정한 죄를 범한 자로서 단체를 조직하는 자는 1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제2장 특별조사위원회제9조 반민족행위를 예비조사하기 위하여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특별조사위원회는 위원10인으로써 구성한다.특별조사위원은 국회의원중에서 좌기의 자격을 가진 자를 국회가 선거한다.1. 독립운동의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견수하고 애국의 성심이 있는 자2.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 덕망이 있는 자제10조 특별조사위원회는 위원장, 부위원장 각1인을 호선한다.위원장은 조사위원회를 대표하며 회의에 의장이 된다.부위원장은 위원장을 보좌하고 위원장이 사고가 있을 때에는 그 직무를 대리한다.제11조 특별조사위원은 기 재임중 현행범이외에는 특별조사위원장의 승인이 없이 체포심문을 받지 않는다.제12조 특별조사위원회는 사무를 분담하기 위하여 서울시와 각도에 조사부, 군부에 조사지부를 설치할 수 있다.조사부책임자는 조사위원회에서 선거하여 국회의 승인을 받어야 한다.제13조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채용하는 직원은 친일모리의 세평이 없는 자라야 한다.제14조 조사방법은 문서조사, 실지조사의 2종으로 한다.문서조사는 관공문서, 신문 기타 출판물을 조사하여 피의자명부를 작성한다.실지조사는 피의자명부를 기초로 하고 현지출장 기타 적당한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하여 조사서를 작성한다.제15조 특별조사위원회로부터 조사사무를 집행하기 위하여 정부 기타의 기관에 대하여 필요한 보고기록의 제출 또는 기타 협력을 요구할 때에는 이에 응하여야 한다.제16조 특별조사위원이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특별조사위원장의 신임장을 소지케 하며 그 행동의 자유를 보유하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제17조 특별조사위원회가 조사를 완료할 때에는 10일이내에 위원회의 결의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고 의견서를 첨부하여 특별검찰부에 제출하여야 한다.제18조 특별조사위원회의 비용은 국고부담으로 한다.제3장 특별재판부구성과 절차제19조 본법에 규정된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하여 대법원에 특별재판부를 부치한다.반민족행위를 처단하는 특별재판부는 국회에서 선거한 특별재판부부장1인, 부장재판관3인, 재판관12인으로써 구성한다.전항의 재판관은 국회의원중에서 5인, 고등법원이상의 법관 또는 변호사중에서 6인, 일반사회인사중에서 5인으로 하여야 한다.제20조 특별재판부에 특별검찰부를 병치한다.특별검찰부는 국회에서 선거한 특별검찰부검찰관장1인, 차장1인, 검찰관7인으로써 구성한다.제21조 특별재판관과 특별검찰관은 좌의 자격을 가진 자 중에서 선거하여야 한다.1. 독립운동에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견수하고 애국의 성심이 있는 법률가2.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 덕망이 있는 자제22조 특별재판부부장과 특별재판관은 대법원장 및 법관과 동일한 대우와 보수를 받고 특별검찰관장과 특별검찰관은 검찰총장 및 검찰관과 동일한 대우와 보수를 받는다.제23조 특별재판부의 재판관과 검찰관은 그 재임중 일반재판관 및 일반검찰관과 동일한 신분의 보장을 받는다.제24조 특별재판부의 재판관과 검찰관은 그 재임중 국회의원, 법관과 검찰관 이외의 공직을 겸하거나 영리기관에 참여하거나 정당에 관여하지 못한다.제25조 특별재판부에 3부를 두고 각부는 재판장1인과 재판관4인의 합의로써 재판한다.제26조 특별검찰관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와 일반검찰사실을 기초로 하여 공소을 제기한다.특별검찰관은 검찰상 필요에 의하여 특별조사위원 또는 사법경찰관을 지휘명령할 수 있다.제27조 특별검찰관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를 접수한 후 20일이내에 기소하여야 하며 특별재판부는 기소된 사건에 대하여 30일이내에 공판을 개정하여야 한다. 단, 특별재판부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기간을 연장할 수 있으되 30일을 초과할 수 없다.제28조 본법에 의한 재판은 단심제로 한다.소송절차와 형의 집행은 일반형사소송법에 의한다.부칙 &amp;#038;lt;법률 제3호, 1948.9.22&amp;#038;gt;제29조 본법에 규정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본법 공포일로부터 기산하여 2년을 경과하므로써 완성된다. 단, 도피한 자나 본법이 사실상 시행되지 못한 지역에 거주하는 자 또는 거주하던 자에 대하여는 그 사유가 소멸된 때로부터 시효가 진행된다.제30조 본법의 규정은 한일합병전후부터 단기 4278년 8월 15일이전의 행위에 이를 적용한다.제31조 본법에 규정한 범죄자로서 대한민국헌법 공포일로부터 이후에 행한 그 재산의 매매, 양도, 증여 기타의 법률행위는 일체무효로 한다.제32조 본법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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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반민족행위처벌법을 다시 읽다.<br /><br />반민족행위처벌법&nbsp;[시행 1948.9.22] [법률 제3호, 1948.9.22, 제정]<br /><br />제1장 죄<br /><br />제1조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한다.<br /><br />제2조 일본정부로부터 작을 수한 자 또는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한다.<br /><br />제3조 일본치하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br /><br />제4조 좌의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0년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할 수 있다.<br /><br />1.습작한 자<br /><br />2.중추원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되었던 자<br /><br />3.칙임관이상의 관리되었던 자<br /><br />4.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br /><br />5.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하였던 자<br /><br />6.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br /><br />7.비행기, 병기 또는 탄약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br /><br />8.도, 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적이 현저한 자<br /><br />9.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br /><br />10.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br /><br />11.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br /><br />12. 개인으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br /><br />제5조 일본치하에 고등관 3등급이상, 훈 5등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경과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br /><br />제6조 본법에 규정한 죄를 범한 자 개전의 정상이 현저한 자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할 수 있다.<br /><br />제7조 타인을 모함할 목적 또는 범죄자를 옹호할 목적으로 본법에 규정한 범죄에 관하여 허위의 신고, 위증, 증거인멸을 한 자 또는 범죄자에게 도피의 길을 협조한 자는 당해 내용에 해당한 범죄규정으로 처벌한다.<br /><br />제8조 본법에 규정한 죄를 범한 자로서 단체를 조직하는 자는 1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br /><br />제2장 특별조사위원회<br /><br />제9조 반민족행위를 예비조사하기 위하여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br /><br />특별조사위원회는 위원10인으로써 구성한다.<br /><br />특별조사위원은 국회의원중에서 좌기의 자격을 가진 자를 국회가 선거한다.<br /><br />1. 독립운동의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견수하고 애국의 성심이 있는 자<br /><br />2.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 덕망이 있는 자<br /><br />제10조 특별조사위원회는 위원장, 부위원장 각1인을 호선한다.<br /><br />위원장은 조사위원회를 대표하며 회의에 의장이 된다.<br /><br />부위원장은 위원장을 보좌하고 위원장이 사고가 있을 때에는 그 직무를 대리한다.<br /><br />제11조 특별조사위원은 기 재임중 현행범이외에는 특별조사위원장의 승인이 없이 체포심문을 받지 않는다.<br /><br />제12조 특별조사위원회는 사무를 분담하기 위하여 서울시와 각도에 조사부, 군부에 조사지부를 설치할 수 있다.<br /><br />조사부책임자는 조사위원회에서 선거하여 국회의 승인을 받어야 한다.<br /><br />제13조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채용하는 직원은 친일모리의 세평이 없는 자라야 한다.<br /><br />제14조 조사방법은 문서조사, 실지조사의 2종으로 한다.<br /><br />문서조사는 관공문서, 신문 기타 출판물을 조사하여 피의자명부를 작성한다.<br /><br />실지조사는 피의자명부를 기초로 하고 현지출장 기타 적당한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하여 조사서를 작성한다.<br /><br />제15조 특별조사위원회로부터 조사사무를 집행하기 위하여 정부 기타의 기관에 대하여 필요한 보고기록의 제출 또는 기타 협력을 요구할 때에는 이에 응하여야 한다.<br /><br />제16조 특별조사위원이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특별조사위원장의 신임장을 소지케 하며 그 행동의 자유를 보유하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br /><br />제17조 특별조사위원회가 조사를 완료할 때에는 10일이내에 위원회의 결의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고 의견서를 첨부하여 특별검찰부에 제출하여야 한다.<br /><br />제18조 특별조사위원회의 비용은 국고부담으로 한다.<br /><br />제3장 특별재판부구성과 절차<br /><br />제19조 본법에 규정된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하여 대법원에 특별재판부를 부치한다.<br /><br />반민족행위를 처단하는 특별재판부는 국회에서 선거한 특별재판부부장1인, 부장재판관3인, 재판관12인으로써 구성한다.<br /><br />전항의 재판관은 국회의원중에서 5인, 고등법원이상의 법관 또는 변호사중에서 6인, 일반사회인사중에서 5인으로 하여야 한다.<br /><br />제20조 특별재판부에 특별검찰부를 병치한다.<br /><br />특별검찰부는 국회에서 선거한 특별검찰부검찰관장1인, 차장1인, 검찰관7인으로써 구성한다.<br /><br />제21조 특별재판관과 특별검찰관은 좌의 자격을 가진 자 중에서 선거하여야 한다.<br /><br />1. 독립운동에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견수하고 애국의 성심이 있는 법률가<br /><br />2.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 덕망이 있는 자<br /><br />제22조 특별재판부부장과 특별재판관은 대법원장 및 법관과 동일한 대우와 보수를 받고 특별검찰관장과 특별검찰관은 검찰총장 및 검찰관과 동일한 대우와 보수를 받는다.<br /><br />제23조 특별재판부의 재판관과 검찰관은 그 재임중 일반재판관 및 일반검찰관과 동일한 신분의 보장을 받는다.<br /><br />제24조 특별재판부의 재판관과 검찰관은 그 재임중 국회의원, 법관과 검찰관 이외의 공직을 겸하거나 영리기관에 참여하거나 정당에 관여하지 못한다.<br /><br />제25조 특별재판부에 3부를 두고 각부는 재판장1인과 재판관4인의 합의로써 재판한다.<br /><br />제26조 특별검찰관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와 일반검찰사실을 기초로 하여 공소을 제기한다.<br /><br />특별검찰관은 검찰상 필요에 의하여 특별조사위원 또는 사법경찰관을 지휘명령할 수 있다.<br /><br />제27조 특별검찰관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를 접수한 후 20일이내에 기소하여야 하며 특별재판부는 기소된 사건에 대하여 30일이내에 공판을 개정하여야 한다. 단, 특별재판부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기간을 연장할 수 있으되 30일을 초과할 수 없다.<br /><br />제28조 본법에 의한 재판은 단심제로 한다.<br /><br />소송절차와 형의 집행은 일반형사소송법에 의한다.<br /><br />부칙 &lt;법률 제3호, 1948.9.22&gt;<br /><br />제29조 본법에 규정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본법 공포일로부터 기산하여 2년을 경과하므로써 완성된다. 단, 도피한 자나 본법이 사실상 시행되지 못한 지역에 거주하는 자 또는 거주하던 자에 대하여는 그 사유가 소멸된 때로부터 시효가 진행된다.<br /><br />제30조 본법의 규정은 한일합병전후부터 단기 4278년 8월 15일이전의 행위에 이를 적용한다.<br /><br />제31조 본법에 규정한 범죄자로서 대한민국헌법 공포일로부터 이후에 행한 그 재산의 매매, 양도, 증여 기타의 법률행위는 일체무효로 한다.<br /><br />제32조 본법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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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category label="안익태 애국가|왜 문제인가?|안익태는 누구인가?" term="20240721144936_0879|20240721145302_7788|20240721145340_2145"/>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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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안익태를 일본인으로 기록한 프랑스 국립도서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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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amp;#038;nbsp;
프랑스 국립도서관 DB의 에키타이 안 항목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amp;#039;일본국적이고 남성이며, 작곡자,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로서 1943년에 &amp;#038;lt;라디오 파리 대오케스트라와 파리음악원 협주회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amp;#039;. 덧붙여 &amp;#039;1939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였다&amp;#039;고 기록되어 있는 데 이는 최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지휘 연도와 관련해 &amp;#038;lt;독일음악가 핸드북&amp;#038;nbsp;1933-1945&amp;#038;gt;이라는 방대한 사전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항목을 찾아보면 이렇다. "1943년 3월 14일 에키타이 안이 점령지 파리에서 라디오 파리의 22회차 갈라 무대를 지휘했는데 슈트라우스의 &amp;#038;lt;황기 2600년 봉축 일본축전곡&amp;#038;gt;이었다." (7005쪽)

   

그렇다면 보자. 여기에 등장한 &amp;#038;lt;라디오 파리(Radio-Paris)&amp;#038;gt;방송국은 그냥 방송국이 아니라 나치 독일이 무력 점령한 프랑스 독일군정의 선전부(Propaganda Abteilung)의 하부기관 중 하나를 말한다. 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치는 점령지 프랑스 시민들을 나치화하고자 했다. 라디오 파리 산하 오케스트라는 에키타이 안뿐만 아니라 암스테르담 &amp;#039;콘체르토헤바우 오케스트라&amp;#039;의 지휘자 빌렘 멩겔베르크(Mengelberg)도 지휘했고, 너무나 유명한 알프레드 코르톳 (Alfred Cortot) 역시 피아노 독주자로 출연하곤 했다. 나치독일이 패망한 뒤 라디오파리의 직원 상당수는 부역자(collaborateur)혐의로 가차없는 숙청의 대상이 되었고, 이 거물 지휘자 멩겔베르크도 한 때 영구 출연금지 처분된 적이 있다. 물론 에키타이 안이 스페인으로 도피한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뒤 1942년-1943년 나치는 독-이-일 3국동맹을 확고히 하기 위해 대단히 공을 들인다. 심지어 1943년 나치의 공식 출판사에서는 &amp;#038;lt;일본의 강함에 숨은 비밀(Das Geheimnis Japanischer Kraft)&amp;#038;gt;라는 책을 내면서, 대동아공영권 수립을 위한 일본의 투쟁은 곧 앵글로색슨 제국주의 독점주의자들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투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있다. 에키타이 안의 라디오파리 오케스트라 지휘는 이런 나치의 정치노선의 결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파리수복후 드골정부의 부역자 처단이 얼마나 가혹했는 지는 이미 잘알려져 있다. 처벌은 언론인, 지식인에게 훨씬 더 혹독했다. 가차없이 총살대에 세웠다. &amp;#039;민족적 수치(indignite nationale)&amp;#039;로 간주된 이 들에 대해 프랑스 우파의 대명사 드골은 이렇게 선언한다.

   

"언론인들은 도덕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지식인과 작가는 사과로는 안되고 반드시 책임을 물려야 한다."&amp;#038;nbsp;

   

에키타이 안이 프랑스인이었다면 드골은 어떻게 했을까?
&amp;#038;nbsp;
&amp;#038;nbsp;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nbsp;</p>
<p>프랑스 국립도서관 DB의 에키타이 안 항목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국적이고 남성이며, 작곡자,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로서 1943년에 &lt;라디오 파리 대오케스트라와 파리음악원 협주회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덧붙여 '1939년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 이는 최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72526_rggawupd.jpg" alt="안익태 일본인03.jpg" style="width: 740px; height: 559px;" />
</p>
<p>지휘 연도와 관련해 &lt;독일음악가 핸드북&nbsp;1933-1945&gt;이라는 방대한 사전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항목을 찾아보면 이렇다. "1943년 3월 14일 에키타이 안이 점령지 파리에서 라디오 파리의 22회차 갈라 무대를 지휘했는데 슈트라우스의 &lt;황기 2600년 봉축 일본축전곡&gt;이었다." (7005쪽)</p>
<p>
   <br />
</p>
<p>그렇다면 보자. 여기에 등장한 &lt;라디오 파리(Radio-Paris)&gt;방송국은 그냥 방송국이 아니라 나치 독일이 무력 점령한 프랑스 독일군정의 선전부(Propaganda Abteilung)의 하부기관 중 하나를 말한다. 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치는 점령지 프랑스 시민들을 나치화하고자 했다. 라디오 파리 산하 오케스트라는 에키타이 안뿐만 아니라 암스테르담 '콘체르토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빌렘 멩겔베르크(Mengelberg)도 지휘했고, 너무나 유명한 알프레드 코르톳 (Alfred Cortot) 역시 피아노 독주자로 출연하곤 했다. 나치독일이 패망한 뒤 라디오파리의 직원 상당수는 부역자(collaborateur)혐의로 가차없는 숙청의 대상이 되었고, 이 거물 지휘자 멩겔베르크도 한 때 영구 출연금지 처분된 적이 있다. 물론 에키타이 안이 스페인으로 도피한 뒤에 일어난 일이었다.</p>
<p>
   <br />
</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72623_ddavekpl.jpg" alt="안익태 일본인01.jpg" style="width: 740px; height: 349px;" />
</p>
<p style="text-align: left;">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뒤 1942년-1943년 나치는 독-이-일 3국동맹을 확고히 하기 위해 대단히 공을 들인다. 심지어 1943년 나치의 공식 출판사에서는 &lt;일본의 강함에 숨은 비밀(Das Geheimnis Japanischer Kraft)&gt;라는 책을 내면서, 대동아공영권 수립을 위한 일본의 투쟁은 곧 앵글로색슨 제국주의 독점주의자들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투쟁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있다. 에키타이 안의 라디오파리 오케스트라 지휘는 이런 나치의 정치노선의 결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right;">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72634_bhnskzzv.jpg" alt="안익태 일본인02.jpg" style="width: 251px; height: 360px; float: right; margin-left: 1em;" />
</p>
<p style="text-align: left;">파리수복후 드골정부의 부역자 처단이 얼마나 가혹했는 지는 이미 잘알려져 있다. 처벌은 언론인, 지식인에게 훨씬 더 혹독했다. 가차없이 총살대에 세웠다. '민족적 수치(indignite nationale)'로 간주된 이 들에 대해 프랑스 우파의 대명사 드골은 이렇게 선언한다.</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언론인들은 도덕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지식인과 작가는 사과로는 안되고 반드시 책임을 물려야 한다."&nbsp;</p>
<p style="text-align: left;">
   <br />
</p>
<p style="text-align: left;">에키타이 안이 프랑스인이었다면 드골은 어떻게 했을까?</p>
<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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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category label="안익태 애국가|왜 문제인가?|안익태는 누구인가?" term="20240721144936_0879|20240721145302_7788|20240721145340_2145"/>
<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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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조선총독부에도 기록되어 있는 에키타이 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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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조선총독부 기록물에도 안익태는 등장한다. 아래는 그 중 하나다. 태평양전쟁 곧 진주만 공습을 한 달 앞둔 소화16년(1941년) 11월 14일 일본 외무성 구아국(유럽아시아국) 국장이 조선총독부 외사부(외무과와 척무과로 구성된 외무관련 총독부 부서)부장에게 보낸 공문이다.&amp;#039;안익태의 나국(루마니아)에서의 연주회개최의 건&amp;#039;이라는 제목을 단 공문의 내용은 이렇다. 주루마니아 일본 공사 쓰쓰이가 조선 평양출신의 안익태가 부카레스트교향악단의 초청을 받아 현지를 방문 그 달 11월 2일 그의 지휘하 연주회를 성황리에 마쳐 대호평을 받았다는 취지의 보고를 보냈다. 이를 남총독에게도 통보해 주시기를 바란다.&amp;#039;여기 남총독이란 조선7대총독 남차랑(미나미 지로)를 말한다. 중일전쟁 계속과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본격적 전시동원체제 구축에 나서 창씨개명, 내선일체 정책을 만든 사람이다.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이란 이름으로 &amp;#039;세계적인&amp;#039; 지휘자로 활동했던 곳은 거의 대부분 독일과 이태리를 비롯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 점령하 파리등 모두 추축국이거나 그 가입국들이다. 프랑코치하 스페인도 있지만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다. 안익태의 연주여행은 대부분 현지 일본 대사관 및 공사관과 연결되어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모니터링되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조선총독에게도 보고 되었을 개연성이 크다.&amp;#038;nbsp;그렇다면 이 날 무슨 곡이 연주되었을까. 다른 연구에 따르면 이 날 안익태 아니 에키타이 안은 &amp;#038;lt;쿄쿠토(Kyokuto, 극동)&amp;#038;gt;란 곡을 지휘한 걸로 되어 있다. 이 역시 악보나 음원이 존재하지 않지만, &amp;#038;lt;코리아 판타지&amp;#038;gt;에서 애국가 파트를 제외한 것일 거로 추정된다. 이 &amp;#038;lt;쿄쿠토&amp;#038;gt;는 1942년이 되면 &amp;#038;lt;만주국&amp;#038;gt;으로 바뀐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amp;#038;lt;동아(토아)&amp;#038;gt;가 되기도 한다. &amp;#038;lt;코리아판타지&amp;#038;gt;=&amp;#038;lt;극동&amp;#038;gt;=&amp;#038;lt;만주국&amp;#038;gt;=&amp;#038;lt;동아&amp;#038;gt;로 자기표절되다가 2차대전이후에 다시 &amp;#038;lt;코리아판타지&amp;#038;gt;로 되돌아 온다는 말이다. 여기서 애국가 선율이 있다가 없어졌다 나중에 다시 포함되는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amp;#038;nbsp;내가 올린 다른 포스팅을 통해 이미 &amp;#039;동양&amp;#039;, &amp;#039;동아&amp;#039;, &amp;#039;대동아&amp;#039;로 일본제국주의의 전개 국면에 따라 개념이 바뀜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렇다. 에키타이 안의 &amp;#038;lt;극동&amp;#038;gt;, &amp;#038;lt;만주&amp;#038;gt;, &amp;#038;lt;동아&amp;#038;gt; 이 모두 일본의 대동아공영의 제국주의 침략에 복무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내용적으로 자기 표절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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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an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Helvetica, Arial,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조선총독부 기록물에도 안익태는 등장한다. 아래는 그 중 하나다. 태평양전쟁 곧 진주만 공습을 한 달 앞둔 소화16년(1941년) 11월 14일 일본 외무성 구아국(유럽아시아국) 국장이 조선총독부 외사부(외무과와 척무과로 구성된 외무관련 총독부 부서)부장에게 보낸 공문이다.</span><br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Helvetica, Arial,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 /><br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Helvetica, Arial,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 /><span style="color: #333333; font-family: Helvetica, Arial,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안익태의 나국(루마니아)에서의 연주회개최의 건'이라는 제목을 단 공문의 내용은 이렇다. 주루마니아 일본 공사 쓰쓰이가 조선 평양출신의 안익태가 부카레스트교향악단의 초청을 받아 현지를 방문 그 달 11월 2일 그의 지휘하 연주회를 성황리에 마쳐 대호평을 받았다는 취지의 보고를 보냈다. 이를 남총독에게도 통보해 주시기를 바란다.'</span><span class="text_exposed_show" style="color: #333333; display: inline; font-family: Helvetica, Arial, " lucida="" grande",="" tahoma,="" verdana,="" arial,="" sans-serif;="" font-size:="" 13px;="" background-color:="" #ffffff;"=""><br /><br />여기 남총독이란 조선7대총독 남차랑(미나미 지로)를 말한다. 중일전쟁 계속과 태평양전쟁을 앞두고 본격적 전시동원체제 구축에 나서 창씨개명, 내선일체 정책을 만든 사람이다.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이란 이름으로 '세계적인' 지휘자로 활동했던 곳은 거의 대부분 독일과 이태리를 비롯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 점령하 파리등 모두 추축국이거나 그 가입국들이다. 프랑코치하 스페인도 있지만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다. 안익태의 연주여행은 대부분 현지 일본 대사관 및 공사관과 연결되어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모니터링되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조선총독에게도 보고 되었을 개연성이 크다.&nbsp;<br /><br />그렇다면 이 날 무슨 곡이 연주되었을까. 다른 연구에 따르면 이 날 안익태 아니 에키타이 안은 &lt;쿄쿠토(Kyokuto, 극동)&gt;란 곡을 지휘한 걸로 되어 있다. 이 역시 악보나 음원이 존재하지 않지만, &lt;코리아 판타지&gt;에서 애국가 파트를 제외한 것일 거로 추정된다. 이 &lt;쿄쿠토&gt;는 1942년이 되면 &lt;만주국&gt;으로 바뀐다. 그리고 또 그 후에는 &lt;동아(토아)&gt;가 되기도 한다. &lt;코리아판타지&gt;=&lt;극동&gt;=&lt;만주국&gt;=&lt;동아&gt;로 자기표절되다가 2차대전이후에 다시 &lt;코리아판타지&gt;로 되돌아 온다는 말이다. 여기서 애국가 선율이 있다가 없어졌다 나중에 다시 포함되는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nbsp;<br /><br />내가 올린 다른 포스팅을 통해 이미 '동양', '동아', '대동아'로 일본제국주의의 전개 국면에 따라 개념이 바뀜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렇다. 에키타이 안의 &lt;극동&gt;, &lt;만주&gt;, &lt;동아&gt; 이 모두 일본의 대동아공영의 제국주의 침략에 복무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내용적으로 자기 표절의 산물이었다.</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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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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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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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친일 음악가 '에키타이 안'이 민족음악가 안익태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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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
   

안익태와 관련된 시중의 대표 전기, 기사, 그리고 미담성 블로그들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되거나 심지어 아예 날조된 것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유럽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기간인 38년 - 44년 동안에 그는 에키타이 안 곧 일본인이었고, 해서 유럽인은 그를 일본인으로 알았을 것이고, 이 기간중 조선인이 유럽에서 그를 만났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amp;#038;nbsp;
혹 그를 알아 보았다 하더라도 당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까지 가서 그가 지휘하는 것을 보았을 가능성은 그 보다 훨씬 더 낮다.
&amp;#038;nbsp;
전쟁후엔 스페인으로 넘어가서 - 지금은 일급휴양지이지만 - 저 마요카라는 궁벽진 곳의 B급 향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살았으니, 더 그렇다. 조선사람중 이 시기에 마요카까지 가서 에키타이 안을 만날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 그런 상황적 조건에서 띄엄 띄엄 들리는 그의 소식은 그저 한국이 낳은 &amp;#039;세계적인&amp;#039; 음악가이자, 애국가를 작곡한 위대한 &amp;#039;민족&amp;#039;음악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허구의 이미지속에 그는 수십년을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amp;#038;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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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래저래 이 집안 &amp;#038;lt;만주국&amp;#038;gt;과 참 좋은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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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73253_mkczmxkn.jpg" alt="민족음악가 안익태01.jpg" style="width: 190px; height: 346px; float: left; margin-right: 1em;" />
</p>
<p>안익태와 관련된 시중의 대표 전기, 기사, 그리고 미담성 블로그들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되거나 심지어 아예 날조된 것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유럽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기간인 38년 - 44년 동안에 그는 에키타이 안 곧 일본인이었고, 해서 유럽인은 그를 일본인으로 알았을 것이고, 이 기간중 조선인이 유럽에서 그를 만났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p>
<p>&nbsp;</p>
<p>혹 그를 알아 보았다 하더라도 당시 오케스트라 연주회에까지 가서 그가 지휘하는 것을 보았을 가능성은 그 보다 훨씬 더 낮다.</p>
<p>&nbsp;</p>
<p>전쟁후엔 스페인으로 넘어가서 - 지금은 일급휴양지이지만 - 저 마요카라는 궁벽진 곳의 B급 향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살았으니, 더 그렇다. 조선사람중 이 시기에 마요카까지 가서 에키타이 안을 만날 가능성 또한 거의 없다. 그런 상황적 조건에서 띄엄 띄엄 들리는 그의 소식은 그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애국가를 작곡한 위대한 '민족'음악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허구의 이미지속에 그는 수십년을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nbsp;</p>
<p>&nbsp;</p>
<p>&nbsp;</p>
<p>&nbsp;</p>
아무튼 이래저래 이 집안 &lt;만주국&gt;과 참 좋은 관계였다.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407/20240721173412_bmxgbozv.jpg" alt="민족음악가 안익태02.jpg" style="width: 740px; height: 416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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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2021 국시모 랜선 송년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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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국시모 정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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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18152823_eykvmwrq.jpg" alt="국시모 정관(2021.3.9.)-1.jpg" style="width: 875px; height: 1241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18152825_vudxhrop.jpg" alt="국시모 정관(2021.3.9.)-2.jpg" style="width: 875px; height: 1241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18152830_tuacryzu.jpg" alt="국시모 정관(2021.3.9.)-3.jpg" style="width: 875px; height: 1241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18152832_bsfgbkzq.jpg" alt="국시모 정관(2021.3.9.)-4.jpg" style="width: 875px; height: 1241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18152834_fqkxdmck.jpg" alt="국시모 정관(2021.3.9.)-5.jpg" style="width: 875px; height: 1241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18152836_meprcbsg.jpg" alt="국시모 정관(2021.3.9.)-6.jpg" style="width: 875px; height: 1241px;" /></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http://guksimo.com/data/tmp/2112/20211218152837_sismrxdw.jpg" alt="국시모 정관(2021.3.9.)-7.jpg" style="width: 875px; height: 1241px;" /></p>
<p style="text-align: center;"><br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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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안익태 애국가의 표절 및 음악적 관점의 문제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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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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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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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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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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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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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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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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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 출발을 알리는 세미나 열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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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 등을 맞이하면서 대한민국은 친일청산이란 화두가 뜨겁게 전국을 달구었다.
&amp;#038;nbsp;
그리고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의 ‘안익태 케이스’ 출판과 함께 오랜 시간 ‘안익태 애국가’의 친일 문제와 표절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
&amp;#038;nbsp;
&amp;#039;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은 지난 8월 8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안민석 의원이 주최하고 씨알재단이 주관한 공청회에 이해영 교수와 한예종 김정희 교수가 참석해 안익태 애국가의 친일.친나치행각과 불가리아 군가 표절 문제를 세부적으로 밝혔다.
&amp;#038;nbsp;
오랜시간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온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은 11월 1일 국회에서 발표회를 개최하며 본격적인 안익태 애국가를 대체할 국가(國歌)만들기 시민 운동본부를 출발시켰다.

   

한신대학교 교수이며 대학원장인 이해영 교수는 ‘에하라 고이치와 에키타이 안 : 졸저 &amp;#038;lt;안익태 케이스&amp;#038;gt; 보유(補遺)’에 대해 발표했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김수현 연구교수는 ‘새로운 국가(國家) 제정 논의의 출발점 – 항일가요 애국가 연구’에 대해,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김정희 외래교수는 ‘세상의 國歌, 우리의 國歌 - 國歌, 누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발표했다.
&amp;#038;nbsp;
첫 발표자인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이 되어 일본인 에하라 고이치와 연결된 부분을 파헤쳤다. 만주국 건국 축하를 위해 ‘만주환상곡’을 작곡한 ‘에키타이 안’의 발걸음을 그의 독일생활과 프랑스에서 활동,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기울어가던 마지막 시기 스페인으로 도주한 흔적까지 추적하며 해방 후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에서 애국지사로 변신한 ‘에키타이 안’을 고발하고 있다.
&amp;#038;nbsp;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김수현 연구교수는 국가(國歌)라 부르지 않고 애국가(愛國歌)라고 부르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지적하며 법으로 제정된 국가(國歌)가 한국에 없다는 현실을 지적했다.
&amp;#038;nbsp;
김수현 교수는 가사문제와 작자미상 등 안익태 애국가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앞선 연구에서 다뤄진 안익태 애국가의 표절문제가 1964년 5월 19일 ~ 26일 사이 열린 제3회 서울국제음악회에서 불가리아 출신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에 의해 이미 지적됐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amp;#038;nbsp;
김수현 교수는 지난 70여년간 안익태 애국가의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지적된 가운데 새로운 애국가를 지정하려고 한다면 역사적 맥락, 즉 항일운동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애국가의 역사적 배경이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amp;#038;nbsp;
불가리아 출신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가 지적했던 불가리아 군가를 표절했다는 안익태 애국가의 곡 전체를 분석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정희 외래교수는 불가리아 군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와 안익태 애국가를 1:1로 악보비교를 했다.
&amp;#038;nbsp;
김정희 교수의 악보비교분석은 일반인들도 한 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에서도 김정희 교수의 악보비교분석을 중심으로 안익태의 친일.친나치행각 뿐만아니라, 표절이라는 부분에 또 하나의 초점을 맞춰 안익태 애국가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애국가, 더 나아가 國歌로 자격을 상실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amp;#038;nbsp;
한편, 이날 행사는 국회 &amp;#039;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연구회&amp;#039;(대표의원 인재근, 강창일)가 주최했으며, 소속 의원으로 소병훈, 오영훈 의원이 연구의원을 맡고 있으며, 정회원으로 신경민, 심재권, 유승희, 유은혜, 이인영, 이해찬, 장정숙, 주승용, 추미애 의원등이 있으며, 준회원으로 권미혁, 기동민, 김영진, 김용태, 김철민, 박완주, 박홍근, 우원식, 윤관석, 윤후덕, 전혜숙, 정동영, 홍익표, 황희 의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 등을 맞이하면서 대한민국은 친일청산이란 화두가 뜨겁게 전국을 달구었다.</p>
<p>&nbsp;</p>
<p>그리고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의 ‘안익태 케이스’ 출판과 함께 오랜 시간 ‘안익태 애국가’의 친일 문제와 표절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p>
<p>&nbsp;</p>
<p>'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은 지난 8월 8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안민석 의원이 주최하고 씨알재단이 주관한 공청회에 이해영 교수와 한예종 김정희 교수가 참석해 안익태 애국가의 친일.친나치행각과 불가리아 군가 표절 문제를 세부적으로 밝혔다.</p>
<p>&nbsp;</p>
<p>오랜시간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온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은 11월 1일 국회에서 발표회를 개최하며 본격적인 안익태 애국가를 대체할 국가(國歌)만들기 시민 운동본부를 출발시켰다.</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105/20210511203219_bunxmzao.jpg" alt="보도용DSC_0208.JPG" style="width: 700px; height: 408px;" />
</p>
<p>한신대학교 교수이며 대학원장인 이해영 교수는 ‘에하라 고이치와 에키타이 안 : 졸저 &lt;안익태 케이스&gt; 보유(補遺)’에 대해 발표했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김수현 연구교수는 ‘새로운 국가(國家) 제정 논의의 출발점 – 항일가요 애국가 연구’에 대해,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김정희 외래교수는 ‘세상의 國歌, 우리의 國歌 - 國歌, 누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발표했다.</p>
<p>&nbsp;</p>
<p>첫 발표자인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이 되어 일본인 에하라 고이치와 연결된 부분을 파헤쳤다. 만주국 건국 축하를 위해 ‘만주환상곡’을 작곡한 ‘에키타이 안’의 발걸음을 그의 독일생활과 프랑스에서 활동,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기울어가던 마지막 시기 스페인으로 도주한 흔적까지 추적하며 해방 후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에서 애국지사로 변신한 ‘에키타이 안’을 고발하고 있다.</p>
<p>&nbsp;</p>
<p>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김수현 연구교수는 국가(國歌)라 부르지 않고 애국가(愛國歌)라고 부르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지적하며 법으로 제정된 국가(國歌)가 한국에 없다는 현실을 지적했다.</p>
<p>&nbsp;</p>
<p>김수현 교수는 가사문제와 작자미상 등 안익태 애국가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앞선 연구에서 다뤄진 안익태 애국가의 표절문제가 1964년 5월 19일 ~ 26일 사이 열린 제3회 서울국제음악회에서 불가리아 출신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에 의해 이미 지적됐다는 사실을 언급했다.</p>
<p>&nbsp;</p>
<p>김수현 교수는 지난 70여년간 안익태 애국가의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지적된 가운데 새로운 애국가를 지정하려고 한다면 역사적 맥락, 즉 항일운동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애국가의 역사적 배경이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p>
<p>&nbsp;</p>
<p>불가리아 출신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가 지적했던 불가리아 군가를 표절했다는 안익태 애국가의 곡 전체를 분석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정희 외래교수는 불가리아 군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와 안익태 애국가를 1:1로 악보비교를 했다.</p>
<p>&nbsp;</p>
<p>김정희 교수의 악보비교분석은 일반인들도 한 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에서도 김정희 교수의 악보비교분석을 중심으로 안익태의 친일.친나치행각 뿐만아니라, 표절이라는 부분에 또 하나의 초점을 맞춰 안익태 애국가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애국가, 더 나아가 國歌로 자격을 상실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p>
<p>&nbsp;</p>
<p>한편, 이날 행사는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연구회'(대표의원 인재근, 강창일)가 주최했으며, 소속 의원으로 소병훈, 오영훈 의원이 연구의원을 맡고 있으며, 정회원으로 신경민, 심재권, 유승희, 유은혜, 이인영, 이해찬, 장정숙, 주승용, 추미애 의원등이 있으며, 준회원으로 권미혁, 기동민, 김영진, 김용태, 김철민, 박완주, 박홍근, 우원식, 윤관석, 윤후덕, 전혜숙, 정동영, 홍익표, 황희 의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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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kimjaibong@gmail.com 김재봉</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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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긴급 공청회,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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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는 안민석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주최하고 문화재단 씨알이 주관하는 ‘긴급 공청회,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 토론회가 열렸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이 여는 말씀으로 ‘친일행위의 성격과 범주’란 주제로 발언하고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가 발제를 맡아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에 대한 행위 보고서’를 발표했다.
&amp;#038;nbsp;
이해영 교수는 “지금까지는 안익태의 친일행위와 친나치행위, 그리고 안익태의 애국가가 반애국가적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불렀다고 하지만, 이제 알고 난 후에도 계속 부를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amp;#038;nbsp;
&amp;#038;nbsp;
이해영 교수는 그의 저서 ‘안익태 케이스’에 상세하게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친나치행각을 독일연방문서보관서(Bunderarchin) 자료를 바탕으로 기술하고 있다. 지난 2000년경부터 안익태의 반애국적 행위가 밝혀지는 가운데 안익태가 숨겨왔던 친일행각이 속속드러나고 있다.

   

문화기획가 구자우 얼룩소 대표는 “1955년 한국을 방문한 안익태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환상곡’ 악보를 제공하며 일제강점기와 독일제국시절 자신이 애국가가 포함된 한국환상곡을 계속 연주했다고 속였지만, 독일 예술가들과 자료들에 의해 허위로 밝혀졌다”고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자신의 업적을 애국자로 포장해 홍보한 사실을 고발했다.
&amp;#038;nbsp;
특히 지난 2006년 이후 송병욱, 전정임, 허영한, 이경분, 이해영 등 독일 현지 연구자들에 의해 안익태의 거짓말이 허위로 밝혀지면서 그의 친일 및 친나치 행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amp;#038;nbsp;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정희 외래교수는 “안익태는 표절을 넘어 자기표절까지 한 사람이다. 애국가의 상당부분이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로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했다”고 밝히며 애국가와 오! 도브로잔스키 크라이 악보를 비교하며 안익태의 표절을 증명하며 설명했다.
&amp;#038;nbsp;
김정희 교수는 “특히 대중가요에서 조금만 비슷한 멜로디가 나와도 표절시비에 휘말리는데, 다른 노래도 아닌 애국가가 50% 이상이 표절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계속 안익태의 애국가를 불러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amp;#038;nbsp;
김정희 교수는 “대부분 국가는 해당국가의 민족적 정서와 리듬을 모티브로 해 애국가 및 국가를 만들었다. 하지만 안익태의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인 ‘오! 도브로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했기 때문에 우리 한민족의 정서와 전혀 맞지 않다”며 중국과 일본의 국가와 비교해 설명했다.
&amp;#038;nbsp;
초등학교 교사인 인경화 선생은 “우리 어릴 때 암송하던 국민교육헌장도 사라졌고, 국기 하강식도 사라졌다. 그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으로 모두 알고 있었고,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사라졌다.”고 언급하며, “변절자가 작곡한 애국가를 우리 아이들에게 계속 가르치고 부르게 해야 하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판소리 명창인 임진택씨도 “애국가는 200여개 이상 발굴되어 있다. 애국가를 꼭 애국자가 만들 필요는 없지만, 반애국자, 반민족행위자가 만들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하며, 친일 및 친나치 행위자인 안익태의 애국가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강조했다.
&amp;#038;nbsp;
이부영 전 국회의원(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우리 세대는 알든 모르든 안익태 곡조를 불러왔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우리 아이들에게 부르게 해야 하는가?”라며, “현재 수출규제 문제가 발생한 일본 아베 수상은 ‘일본회의’ 소속인데, 이는 야마구치갱에서 출발했으며, 이들은 정한론을 펼쳤던 침략주의자였음을 지적했다. 특히 정한론을 주장했던 야마구치갱들이 대부분 만주국 출신들이며, 안익태는 만주국을 찬양하는 만주국환상곡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사람이다”라고 지적했다.
&amp;#038;nbsp;
남겨진 과제 : 토론회 참가자들의 질의 응답속에서
1. 오는 8.15광복절에 애국가를 어떻게 불러야 하나?
2. 안익태의 애국가를 제외하고 어떤 애국가를 불러야 하나?
3. 우리정서에 맞는 애국가를 만들기 위한 공론의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4. 안익태 애국가를 부르지 않도록 이슈와 대중화는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

   

]]></description>
<content:encoded><![CDATA[<p>[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는 안민석 국회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 주최하고 문화재단 씨알이 주관하는 ‘긴급 공청회,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 토론회가 열렸다.</p>
<p>
   <br />
</p>
<p>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이 여는 말씀으로 ‘친일행위의 성격과 범주’란 주제로 발언하고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가 발제를 맡아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에 대한 행위 보고서’를 발표했다.</p>
<p>&nbsp;</p>
<p>이해영 교수는 “지금까지는 안익태의 친일행위와 친나치행위, 그리고 안익태의 애국가가 반애국가적인 것을 몰랐기 때문에 불렀다고 하지만, 이제 알고 난 후에도 계속 부를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p>
<p>&nbsp;</p>
<p>&nbsp;</p>
<p>이해영 교수는 그의 저서 ‘안익태 케이스’에 상세하게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친나치행각을 독일연방문서보관서(Bunderarchin) 자료를 바탕으로 기술하고 있다. 지난 2000년경부터 안익태의 반애국적 행위가 밝혀지는 가운데 안익태가 숨겨왔던 친일행각이 속속드러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center;">
   <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105/20210511202639_hszklmrz.jpg" alt="보편-행사IMG_0015.JPG" style="width: 700px; height: 467px;" />
</p>
<p>문화기획가 구자우 얼룩소 대표는 “1955년 한국을 방문한 안익태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환상곡’ 악보를 제공하며 일제강점기와 독일제국시절 자신이 애국가가 포함된 한국환상곡을 계속 연주했다고 속였지만, 독일 예술가들과 자료들에 의해 허위로 밝혀졌다”고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자신의 업적을 애국자로 포장해 홍보한 사실을 고발했다.</p>
<p>&nbsp;</p>
<p>특히 지난 2006년 이후 송병욱, 전정임, 허영한, 이경분, 이해영 등 독일 현지 연구자들에 의해 안익태의 거짓말이 허위로 밝혀지면서 그의 친일 및 친나치 행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p>
<p>&nbsp;</p>
<p>한국예술종합학교 김정희 외래교수는 “안익태는 표절을 넘어 자기표절까지 한 사람이다. 애국가의 상당부분이 불가리아 민요 ‘오! 도브로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했다”고 밝히며 애국가와 오! 도브로잔스키 크라이 악보를 비교하며 안익태의 표절을 증명하며 설명했다.</p>
<p>&nbsp;</p>
<p>김정희 교수는 “특히 대중가요에서 조금만 비슷한 멜로디가 나와도 표절시비에 휘말리는데, 다른 노래도 아닌 애국가가 50% 이상이 표절한 것으로 드러나는데 계속 안익태의 애국가를 불러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p>
<p>&nbsp;</p>
<p>김정희 교수는 “대부분 국가는 해당국가의 민족적 정서와 리듬을 모티브로 해 애국가 및 국가를 만들었다. 하지만 안익태의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인 ‘오! 도브로잔스키 크라이’를 표절했기 때문에 우리 한민족의 정서와 전혀 맞지 않다”며 중국과 일본의 국가와 비교해 설명했다.</p>
<p>&nbsp;</p>
<p>초등학교 교사인 인경화 선생은 “우리 어릴 때 암송하던 국민교육헌장도 사라졌고, 국기 하강식도 사라졌다. 그 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으로 모두 알고 있었고,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사라졌다.”고 언급하며, “변절자가 작곡한 애국가를 우리 아이들에게 계속 가르치고 부르게 해야 하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p>
<p>판소리 명창인 임진택씨도 “애국가는 200여개 이상 발굴되어 있다. 애국가를 꼭 애국자가 만들 필요는 없지만, 반애국자, 반민족행위자가 만들면 안 된다”라고 이야기하며, 친일 및 친나치 행위자인 안익태의 애국가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강조했다.</p>
<p>&nbsp;</p>
<p>이부영 전 국회의원(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은 “우리 세대는 알든 모르든 안익태 곡조를 불러왔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우리 아이들에게 부르게 해야 하는가?”라며, “현재 수출규제 문제가 발생한 일본 아베 수상은 ‘일본회의’ 소속인데, 이는 야마구치갱에서 출발했으며, 이들은 정한론을 펼쳤던 침략주의자였음을 지적했다. 특히 정한론을 주장했던 야마구치갱들이 대부분 만주국 출신들이며, 안익태는 만주국을 찬양하는 만주국환상곡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부역했던 사람이다”라고 지적했다.</p>
<p>&nbsp;</p>
<p>남겨진 과제 : 토론회 참가자들의 질의 응답속에서</p>
<p>1. 오는 8.15광복절에 애국가를 어떻게 불러야 하나?</p>
<p>2. 안익태의 애국가를 제외하고 어떤 애국가를 불러야 하나?</p>
<p>3. 우리정서에 맞는 애국가를 만들기 위한 공론의 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p>
<p>4. 안익태 애국가를 부르지 않도록 이슈와 대중화는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가?</p>
<p>
   <br />
</p>
]]></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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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kimjaibong@gmail.com 김재봉</author>
<atom:updated>2022-01-10T16:56:33+09:00</atom:updated>
<atom:published>2021-05-11T20:27:25+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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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안익태의 ‘애국가’를 꼭 불러야 하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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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애국가(愛國歌)의 뜻(意味)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를 말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고난의 역사를 이겨내고 앞으로 함께 나가자는 뜻을 내포한 노래, 과거의 찬란한 역사와 영광, 그리고 현재의 자긍심을 담은 노래 등 다양한 노래들이 애국가로 불릴 수 있다.
&amp;#038;nbsp;
&amp;#038;nbsp;
하지만 대한민국에 애국가는 안익태의 애국가 외에는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 이승만-박정희 정권출범과 함께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고향의 봄’, ‘임을 위한 행진곡’, 윤도현의 아리랑‘, 아, 대한민국’ 등 수 많은 노래가 애국가로 불릴 수 있다.
&amp;#038;nbsp;
대한민국은 법률로 수도(首都)와 국가(國歌)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 기능을 다하고 있지만,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고 정하지 않고 있으며, 안익태의 애국가 역시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로 한다’란 결정을 하지 않았다.
&amp;#038;nbsp;
널리 알려진 것처럼 안익태는 친일행각에 히틀러 치하의 독일제국에서 나찌의 선전도구로 또는 일제의 선전도구로 활용된 음악가다. 각종 자료를 통해 안익태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저질렀고, 나찌 치하의 독일에서 히틀런 편에 서서 음악활동을 하고 돈을 받은 사람이다.
&amp;#038;nbsp;
위키백과에서 안익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안익태(安益泰, 스페인어: Eak-tai Ahn, 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스페인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가평 포럼1939에서 열린 안익태의 애국가 찬반 토론회 &amp;#038;lt;사진 김재봉 선임기자&amp;#038;gt;
      
   
&amp;#038;nbsp;
안익태 케이스의 저자 이해영 교수(한신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국제관계학부)는 오랜 시간 안익태와 그가 작곡한 애국가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다.
&amp;#038;nbsp;
6월 24일 가평 ‘포럼 1939:음담패설’에서 이해영 교수와 안익태기념재단 김형석 연구위원장의 찬반논쟁이 있었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친나찌행각 및 1942년 9월 18일 연주된 만주국환상곡이 일제의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 10년을 찬양하는 내용이었으며, 이후 80년대 ‘안익태추모사업회’에서 만주국 찬양 부분에 ‘나의 사랑 한반도’로 변경한 사실을 지적했다.
&amp;#038;nbsp;
하지만 김형석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은 안익태 애국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안익태가 음악가로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였으며 독일제국시대였는데,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안익태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였다고 주장했다.
&amp;#038;nbsp;
김형석 연구위원장의 이 같은 인식에 대해 취재기자는 “일제 강점기였고 독일 제국시대였다고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도 조국 독립운동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일제가 세운 만주국 안에서도 항일독립투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왜 안익태는 친일을 선택했는가?”라고 질문했지만,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명쾌하게 답변하지 못했다.
&amp;#038;nbsp;
토론에서 이해영 교수는 “대한민국 애국가로 법률로 공식 지정된 곡은 없다. 애국가는 대통령령으로 제정되어 법률상 근거가 없고, 대통령령에도 ‘애국가를 부른다’라고 되어 있지, 누구의 애국가를 부르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사실 확인을 하며, “대통령령은 공무원들은 지킬 의무가 있지만, 국민들은 지킬 의무가 없다”고 강조했다.
&amp;#038;nbsp;
또한 “대한민국은 성문법의 국가이며, 관습법을 지키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언급한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의 애국가를 애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amp;#038;nbsp;
이에 대해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서울을 대한민국 수도로 하는 것도 관습법 아닌가?”란 주장으로 안익태의 애국가가 대한민국 공식 애국가로 문제점이 없다고 주장했다.
&amp;#038;nbsp;
토론은 격한 논쟁으로 번졌다.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안익태 애국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방적인 이야기를 이어갔고,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 기념재단에서는 안익태의 친일부역행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맞섰다.
&amp;#038;nbsp;
‘애국가, 대한민국의 국가로서 정당한가?’ 토론회는 사실 안익태기념재단에서 회심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참가자들에게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친나찌행각을 더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자리로 안익태의 애국가를 국가로 부를 수 없다는 당위성을 더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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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CDATA[<p>[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애국가(愛國歌)의 뜻(意味)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를 말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고난의 역사를 이겨내고 앞으로 함께 나가자는 뜻을 내포한 노래, 과거의 찬란한 역사와 영광, 그리고 현재의 자긍심을 담은 노래 등 다양한 노래들이 애국가로 불릴 수 있다.</p>
<p>&nbsp;</p>
<p>&nbsp;</p>
<p>하지만 대한민국에 애국가는 안익태의 애국가 외에는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 이승만-박정희 정권출범과 함께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고향의 봄’, ‘임을 위한 행진곡’, 윤도현의 아리랑‘, 아, 대한민국’ 등 수 많은 노래가 애국가로 불릴 수 있다.</p>
<p>&nbsp;</p>
<p>대한민국은 법률로 수도(首都)와 국가(國歌)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 기능을 다하고 있지만,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고 정하지 않고 있으며, 안익태의 애국가 역시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로 한다’란 결정을 하지 않았다.</p>
<p>&nbsp;</p>
<p>널리 알려진 것처럼 안익태는 친일행각에 히틀러 치하의 독일제국에서 나찌의 선전도구로 또는 일제의 선전도구로 활용된 음악가다. 각종 자료를 통해 안익태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저질렀고, 나찌 치하의 독일에서 히틀런 편에 서서 음악활동을 하고 돈을 받은 사람이다.</p>
<p>&nbsp;</p>
<p>위키백과에서 안익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안익태(安益泰, 스페인어: Eak-tai Ahn, 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스페인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p>
<p><br /></p>
<div class="cheditor-caption-wrapper" style="text-align: center;">
   <figure class="cheditor-caption" style="border: 0px solid rgb(204, 204, 204); background-color: #ffffff; margin: 0px; text-align: left; display: inline-block; width: 640px;"><img src="http://www.guksimo.com/data/tmp/2105/20210511200555_sznfqgwo.jpg" alt="보편-이해영 김형석photo_2019-08-08_22-08-31.jpg" style="width: 640px; height: 451px;" />
      <figcaption class="cheditor-caption-text" style="margin: 10px 0px 10px 0px;color:#999; text-align: left; line-height: 18px; font-size: 12px; letter-spacing: -0.04em; text-align:justify;">가평 포럼1939에서 열린 안익태의 애국가 찬반 토론회 &lt;사진 김재봉 선임기자&gt;</figcaption>
      </figure>
   </div>
<p>&nbsp;</p>
<p>안익태 케이스의 저자 이해영 교수(한신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국제관계학부)는 오랜 시간 안익태와 그가 작곡한 애국가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다.</p>
<p>&nbsp;</p>
<p>6월 24일 가평 ‘포럼 1939:음담패설’에서 이해영 교수와 안익태기념재단 김형석 연구위원장의 찬반논쟁이 있었다.</p>
<p>이해영 교수는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친나찌행각 및 1942년 9월 18일 연주된 만주국환상곡이 일제의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 10년을 찬양하는 내용이었으며, 이후 80년대 ‘안익태추모사업회’에서 만주국 찬양 부분에 ‘나의 사랑 한반도’로 변경한 사실을 지적했다.</p>
<p>&nbsp;</p>
<p>하지만 김형석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은 안익태 애국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안익태가 음악가로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였으며 독일제국시대였는데,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안익태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였다고 주장했다.</p>
<p>&nbsp;</p>
<p>김형석 연구위원장의 이 같은 인식에 대해 취재기자는 “일제 강점기였고 독일 제국시대였다고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도 조국 독립운동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일제가 세운 만주국 안에서도 항일독립투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왜 안익태는 친일을 선택했는가?”라고 질문했지만,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명쾌하게 답변하지 못했다.</p>
<p>&nbsp;</p>
<p>토론에서 이해영 교수는 “대한민국 애국가로 법률로 공식 지정된 곡은 없다. 애국가는 대통령령으로 제정되어 법률상 근거가 없고, 대통령령에도 ‘애국가를 부른다’라고 되어 있지, 누구의 애국가를 부르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사실 확인을 하며, “대통령령은 공무원들은 지킬 의무가 있지만, 국민들은 지킬 의무가 없다”고 강조했다.</p>
<p>&nbsp;</p>
<p>또한 “대한민국은 성문법의 국가이며, 관습법을 지키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언급한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의 애국가를 애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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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에 대해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서울을 대한민국 수도로 하는 것도 관습법 아닌가?”란 주장으로 안익태의 애국가가 대한민국 공식 애국가로 문제점이 없다고 주장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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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토론은 격한 논쟁으로 번졌다.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안익태 애국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방적인 이야기를 이어갔고,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 기념재단에서는 안익태의 친일부역행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맞섰다.</p>
<p>&nbsp;</p>
<p>‘애국가, 대한민국의 국가로서 정당한가?’ 토론회는 사실 안익태기념재단에서 회심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참가자들에게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친나찌행각을 더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자리로 안익태의 애국가를 국가로 부를 수 없다는 당위성을 더해줬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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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kimjaibong@gmail.com 김재봉</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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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국가만들기 시민모임 세미나 알림 테스트 페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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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국가만들기 시민모임 2020 워크숍 및 송년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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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CDATA[보충- 교육 현장에서 안익태 '애국가'의 문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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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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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guksimo2019@gmail.com 국시모</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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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published>2021-12-18T15:08:48+09:00</atom: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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