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태의 '만주환상곡'은 대한민국 애국가인 '한국환상곡'
에키타이 안, 베토벤 9번 교향곡과 같이 무대에 올리자고 욕심
[오랜 만에 에키타이 안=안익태] 제자 이유철이 현지에서 어렵게 구해 준 귄터 하쉬가 편집한 <독-일협회 Deutsche-Japanische Gesellschaften von 1888 bis 1996>란 책에 에키타이 안이 등장하니 여기에 번역해 두고자 한다.(277-278쪽)
에키타이 안은 1941-42년 [나치시기] 비엔나 총독Reichsstatthalter 발두어 폰 쉬락Baldur von Schirach이 관장했던 그리고 독-일협회 비엔나지부가 주최하는, <전시동계지원사업>을 위한 독-일협회주최 연주회시리즈를 통해 데뷔하였다. 원래 1942년 2월 3일로 예정된 연주회는 [전시] 석탄부족으로 3월 12일로 연기되었다.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베에토벤의 에그몬트서곡, 에키타이 안이 오케스트라버전으로 편곡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C장조,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A장조, 일본 황기 2,600년 기념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 축전곡>이 들어가 있었다. 또 한 번의 그런 연주회가 1943년 2월 11일에도 열렸다. 독일협회의 비엔나지부 사무총장은 그 연주회의 전사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에키타이 안씨는 일본대사관 참사관 M. 이마이를 통해 자신의 희망을 표현한 편지를 보내게 함으로써 비엔나에서 자신의 '만주환상곡'을 공연할 수 있었다. 이 연주회는 5월 초에 그것도 만주환상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함께 올리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비엔나에선 그런 식의 연주편성은 완전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비엔나총독 발두어 폰 쉬락에게도 문의한 뒤 독일제국 건국기념일인 1943년 2월 11일에 계획된 연주회때 오직 일본 작곡가의 일본 음악만으로 무대에 올리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자고 결정했다.
그렇지만 베에토벤 교향곡 7번과 레오노레서곡등 베에토벤의 작품과 에키타이안의 작품을 묶었던 그 날 밤 연주회는 독일의 스탈린그라드전투 패전이라는 암울한 분위기속에서 개최되었다. 비엔나 지부 사무총장은 말하길 "지금 이 불쾌하게 억눌린 분위기가 다수 청중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나는 모르긴 해도 상당량의 표를 공짜로 나눠 져야 할 것 같다."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서 작곡된 이 작품은 "(일본어로 부른) 소박한 그렇지만 힘있게 종종 제창unisono으로 이어지는 마지막합창속에서, 희망에 찬 평화의 사절처럼" 울려 퍼졌다.
어쩌나, 바로 이 <만주환상곡>이 <한국환상곡>이고, 스탈린그라드전투 패배이후 더 한층 짙어진 패전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는 이들을 위로 하기 위해 '일본어로' 된 저 감동적인 <애국가>의 마지막 합창부분을 지휘하고 있었다. 물론 그 때는 <만주환상곡>의 클라이맥스이지만 말이다. 1996년 출판된 이 아주 객관적인 책의 저자 조차 바로 이 만주환상곡이 한국환상곡인 줄 꿈에라도 알까. 에키타이가 바랬던 것처럼, 진짜 이 한국 아니 만주환상곡과 베에토벤 9번 합창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면 어찌 되었을까.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전쟁의 한 복판 하루 하루 고단한 삶을 견뎌야 했던 혹한속의 비엔나 시민들이 에키타이 안의 일본어로 된 오족협화의 선율에 위로를 받았을까. 그렇다면 안익태는 참으로 위대한 코스모폴리탄 박애주의자였음에 분명하다. 허나 그 선율에 - 황교안의 애국 기준에 따라 - 심지어 4절까지 따라 불러야 하는 우리는 어쩌나, 흔히 말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치곤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그래 '역사가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