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기사화했다. 전에 소개한 베를린주재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1952년 한국전쟁중에 기고한 글 말이다. 이 최초로 공개된 에하라의 글이 갖는 의미는 크게 네가지다.
1. 에하라의 기억에 의하면, 1941년 일본 4대명절인 명치절 11월 3일 아침 루마니아 일본공사관, 식순에 따른 기미가요 제창때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던 안익태 아니 에키타이를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하필이면 기미가요 반주를 하고 있었다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2. 41년 6월 당시 독소전이 개전되고 일본은 다음 달 12월 진주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헝가리 일본공사관은 현지 일인들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었다. 에키타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키타이로서는 이대로 귀국을 할 경우 자신의 미래에 보탬이 될 게 없었고, 해서 심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습직후 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런 사정을 알리... 없는 에키타이로서 내집에 와서 있어라는 에하라참사관의 제안은 한줄이 구원의 빛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안익태 연구에서 바로 이 대목이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이제 한 쪽 진술이 나온 것이다. 즉 에키타이가 나에게 상담을 요청해 그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를 내 집에 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에키타이 쪽의 진술은 현재 없다. 이후 42년, 43년 에키타이는 커리어에 정점을 찍는다. 나치가 망할 때까지도 에키타이의 집주소는 에하라의 집 바로 거기였다. 구스타프 프라이탁가 15번지, 베를린 반호숫가 지금도 쾌적한 고급 주택가다.
3. 11월 3일 저녁 부카레스트, 자신의 음악회에 에하라 참사관을 초대한 에키타이는 <코리아환상곡>을 '우라카이', 자기 표절한 <교쿠토(극동)>를 일본 궁중아악을 변주한 <에텐라쿠>와 함께 연주해 호평을 받았다. 이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루마니아공사는 본국 즉 외무성과 아울러 조선총독부에도 보고했다. 에하라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는 1942년 9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회를 지휘했고 그 동영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오래전에 그 동영상의 일부를 유튜브에 올려 놓았다) . 이 곡은 기본적으로 <교쿠토>에 마지막 4악장 합창부를 더해 총 4악장으로 된 것이었다. 에하라는 이 곡의 마지막 4악장의 가사를 자신이 썼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가사 내용은 이미 밝혀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 중국민요의 멜로디를 따왔다고 말한다. 이 민요가 바로 만주국 국가에도 사용된 '소무목양'이다.
4. 에하라는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처럼 말한다.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에하라는 1942년 3월 14일 저녁 지금도 영업중인 비엔나의 유명한 레스토랑 <드라이 후사렌(Drei Husaren: 3인의 기사들)> 별실에서 슈트라우스 부부와 에키타이 이렇게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42년 6월 슈트라우스의 첫 오페라 <군트람>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베를린 방문시 자신의 집에 머물것을 제안했고 슈트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열흘 가까이 에하라의 집에 머무는 동안 슈트라우스는 생일을 맞았다. 그런데 극소수의 사람이 에하라의 집 생일축하파티에 초대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치 선전성 음악담당 국장(에라하는 부장이라고 했다) 하인츠 티에첸Heinz Tietjen이었다. 티에첸은 나치독일의 음악정책을 총괄하는 실세중 실세였다. 아무튼 에하라참사관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아니라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를 연결해 준 '수완'을 발휘했다고 했지만, 에하라집에 기식하는 동안 슈트라우와 더욱 가까웠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에하라의 글로 인해 가리워져 있던 에키타이에 관련된 디테일이 보다 또렸해졌다. 하얼빈 세관장과 부시장을 지낸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의 그가 그저 에키타이가 '동생'같고 그의 '대성'을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 집에 머물게 했다고 믿는 다면 글쎄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 전쟁중이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에하라는 대단한 음악애호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본 아니 만주국의 고위외교관이었다. 아무런 정치적 목적없이 에키타이의 뒤를 바줄 수는 없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반면 에키타이로서는 본국송환을 모면케 해주고, 밥도 주고, 살 집도 주고, 돈도 벌게 해주고, 유명하게 해주고, 또 슈트라우스와 친하게 만들어 주고 혜택으로 보자면 이만 저만 남는 장사가 아니다. 그런 에하라에게 <코리아판타지>를 우라카이한 <만주국> 하나 만들어 주는 거야 인간의 정리상 마땅한 도리라 하겠다. 흔히 안익태의 애국가를 임시정부가 그 사용을 허가해 줬다고 애써 그 정통성을 찾는다. 그런데 바로 그 임시정부가 에키타이가 에하라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한 바로 그 즈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임시정부로 보자면 안익태는 도무지 어쩔 수 없을 정도의 반역행위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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