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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키타이안 과 스페인 바르셀로나 방송국 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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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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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8
  • 보도자료-에키타이 안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 공개 기자회견 관련 자료
    에키타이 안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 공개 기자회견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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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1
  • 안익태의 만주환상곡 영상자료
    폐친 조계문님이 홍영두교수의 중계로 안익태=에키타이 안(아래 사진)의 1942년 9월 '만주환상곡' 장면을 다시 편집해서 유튜브에 성공적으로 복원시켜 놓으셨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미 밝힌 대로 이 40초가량의 연주회 클라이막스 장면은 프랑스국립영상원INA 가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황뉴스의 마지막부분에 실려 있다. 연주장 맨 앞에 앉아 있는 자는 당시 주독 일본대사이고 그 옆은 만주국 영사가 아닌가 싶다. 이 시기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공습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인 시점이었다. 당시 상해 임정은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정식으로 한 바 있다. 아무튼 일본의 놀라운 전광에 당시 독일 전역은 일본붐이 불고 있었다. 안익태가 본격적인 친일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이시기이고,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 일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독-일협회가 독일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고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는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가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수상의 친동생이자 일본귀족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 다음이 에키타이였다. 이 영상에서 연주되는 곡은 '만주환상곡'이다. 내가 누차 말한 바 있지만 에키타이는 30년대에 작곡했던 '코리아 환상곡'을 자기표절 바로 만주곡 건국 10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만주환상곡'을 지휘했고, 이후 동일한 곡을 '극동', '동아'라는 이름으로도 지휘했다. 에키타이는 독일점령국이거나 추축국을 중심으로 유럽 곳곳에서 자신의 이 곡 만주환상곡을 지휘했다. 거의 1942년-43년이다. 그러다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당시 파리에 연주여행중이던 에키타이는 프랑코 파시스트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주한다. 논란의 핵심은 지금 한 40초 정도 나오는 만주환상곡이 과연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환상곡이냐 아니냐다. 현재 에키타이 본인이 바로 만주환상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지금 독립기념관에 남아 있는 코리아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던중 가지고 있던 만주환상곡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한 바로 그 것이다 훗날 에키타이는 이 악보를 '민족의 영도자'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그리고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 하면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한 뒤에 바르셀로나 방송국 편성표에는 만주환상곡이 방송된 일자 시간등이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음반으로 방송한 사실도 기재되어 있다. 이 편성표는 내가 이미 포스팅한 바 있다. 바로 이 SP음반을 찾아 낸다면, 애국가 논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갈 것으로 본다. 그리된다면 정부도 지금처럼 소닭보듯 할 수는 없을 게다. 안익태의 친일부역 행위 여부는 전혀 논란거리가 아니라고 나는 본다. 그저 이 동영상을 딱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답변은 충분하다. 그리고 7분짜리 영상도 이미 존재한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이 SP음반을 찾으러 가야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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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4
  • 에키타이안, 스트라우스, 소토먀요(스페인화가) 1946년 4월 카탈라냐음악당(바르셀로나)
    *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는 사진 Títol Ekitai Ahn Autor Presse-ILlustrationem Hoffman (Viena) Data del document original Abril 1946 Localització Palau de la Música Catalana Matèria Directors d'orquestraCompositors Onomàstics Ahn, EkitaiStrauss, Richard, 1864-1949 Descripció Retrat d'Ekitai Ahn, Richard Strauss i el pintor Lluís Sotomayor Signatura 2.4.2_0060.02 Font 2 fotografies;paper; positiu; b/n Editor Centre de Documentació de l'Orfeó Català Data de publicació 2014 Format Jpg Gestió dels drets Còpia permesa amb finalitat d'estudi o recerca, citant la font "Centre de Documentació de l'Orfeó Català". Per a qualsevol altre ús cal demanar autorització. Tipus de recurs (Europeana) Image Repositori Memòria Digital de Catalunya Gestió dels drets (Europeana) http://www.europeana.eu/rights/r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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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31
  • 만주환상곡 소개 영상, 2차대전 프랑스 방송
    에키타이안=안익태, 필요가 있어 유튜브에 일전에 내가 찾은 안익태 만주환상곡 동영상을 검색하니 이렇다. "안익태, 만주국...이 동영상과 연결된 Youtube 계정이 여러 건의 제 3자 저작권 침해 신고로 인해 해지 되었습니다 " 한마디로 삭제되었다. 원래 내가 올린 1942년 10월 2일 나치 점령하 프랑스 방송국에서 제작한 전쟁뉴스 9분3초 - 9분 40초 사이가 안익태=에키타이 안의 베를린 공연 즉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공연중 클라이막스 장면이다. 흔히 이를 두고 안익태가 유럽에서 <코리아환상곡>을 연주했다고 거짓되게 알려진 그 장면이다. 안익태는 2차대전이 종전되기 까지 바로 이 <만주환상곡>을 레퍼토리로 순회공연을 했다. 당연 일본괴뢰국 만주영사관의 전폭적 지원하에서다. 파리계시는 Young-Lee Rim-Fuster 선생께서 영상에 나오는 아나운서 멘트를 통역해 주셨다. A Berlin, le célèbre chef d'orch...estre japonais Ekitai Ahn dirige lui - même l'exécution d'une de ses oeuvres qui révèle l'influence occidentale sur la musique nippone d'aujourd'hui. (베를린에서는 유명한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이 그의 작품 중 한 곡을 직접 지휘 연주하는데, 이곡은 오늘날 일본 음악에 미친 서양의 영향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베토벤9번을 흉내낸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합창편성, 후기낭만파취향의 테마, 애국가와 흡사한 선율등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곡에 대한 당시 나치독일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이곡이 현대 '일본'음악이고, 서양음악의 압도적 영향하에서 만들어졌다는 데있다. <만주>, <극동>등으로 자기표절되던 이 곡의 악보는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이후 에키타이 안의 스페인 도주과정에서 폐기되고, 새로이 이보되어 <코리아환상곡>의 1차 악보로 남게된다. ■관련자료 링크 : https://www.ina.fr/ina-eclaire-actu/video/afe86004295/journal-france-actualites-emission-du-2-octobre-1942 나의 페친 홍영두교수가 편집해 준 해당 장면이 유튜브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9분까지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다. 그러나 어쩌겠나, 가짜 애국자, 안익태의 친일부역의 현장을 목격하는 셈치고 봐줬으면 좋겠다. 참 무대중간에 걸린 일장기도 감상하면서 말이다. 아울러 지금 애국가에서 '대한사람 대한으로 -' 이하 부분의 선율하고 비교해 봐도 좋겠다. 그런데 과연 누가 "여러 건의 제3자 저작권 침해 신고"를 했을까. 분명 이 영상의 저작권은 프랑스국립영상원에 있다. 프랑스 영상원INA이 "여러건의 저작권 침해 신고"를 했을까? 과연 그럴까? 차제에 작년 베를린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복사해 온 안익태=에키타이 안 자료를 전 국민이 공유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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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31
  • 에텐라쿠 강천성악 in 1941 헝가리
    안익태 즉 자막에 나오는 대로 '일본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에키타이안'이다. 1941년 11월 헝가리 월드뉴스의 장면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에키타이안의 1940년대 초반의 영상은 모두 3가지다. 여기의 1941년 헝가리 영상이 있고, 1942년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을 지휘한 만주환타지가 있다. 만주환타지 영상은 오래전 2000년대 중반 국내에 소개되어 충격을 준 바 있는데, 현재 베를린 필름아카이브에 소재한다. 그 일부가 편집되어 나치점령하 파리의 전쟁뉴스에 삽입되었는데, 이 것을 편집해서 이미 올린바 있다. 이 영상도 페친 Moon Ma님이 수고해 주셨다. 에키타이안은 대략 1940년 - 1944년 사이 유럽에서 주로 추축국을 중심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사실상 같은 곡인 <교쿠토(극동)>,<만주환상곡> 그리고 바로 이 일본 궁중음악을 모태로 작곡한 <에텐라쿠>를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편곡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C장조>도 에키타이가 즐겨... 연주한 레퍼토리였다. 당시 독일에서는 2가지의 <에텐라쿠>가 연주되었다. 하나는 고노에 히데마로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키타이안의 것이었다. 고노에는 전시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자 귀족집안의 자제로서 당시 재독 일본음악인의 중심이었다고 할만하다. 고노에의 <에텐라쿠>가 듣기에 일본 가가쿠(아악)의 전통에 충실한 것이었다면, 에키타이안의 그것은 보다 발랄하고 화려해서 대중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후 에키타이안은 이 <에텐라쿠>를 어이없게도 <강천성악>으로 '우라까이' 내지 자기표절해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영상에 나오는 연주회는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깊은 페스티 비가도홀에서 열렸다. 화면에서 보듯 왼쪽에는 일장기가 오른쪽에는 헝가리왕국의 국기가 걸려있다. 헝가리는 1940년 11월 20일 추축국에 가입했다. 이후 나치독일의 편에서 소련침공을 감행한다. 그래서 이 날의 연주회는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 1주년을 축하하고 대소전을 독려, 선전할 목적으로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날의 연주회는 에키타이안의 <에텐라쿠>뿐만 아니라, 독일, 이태리의 음악 그리고 특히 헝가리 작곡가 산도르 베레슈(Sandor Veress)가 일본 황기 2,600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일본에서>도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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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31
  • 루이웬과 에하라 고이치
    <오마이뉴스> 기사다. 그런데 군데군데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 우선 기사를 보자. "당시를 녹화한 영상에는 '만주국 창립 10주년 축하 음악회'라는 독일어 자막이 찍혀 있고, 콘서트홀 중앙엔 대형 일장기가 걸려 있다. 일본과 만주국의 영광을 기리고, (나치) 독일 및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건승을 비는 내용의 가사는 당시 주독 일본 공사였던 에하라 고이치가 썼다. 당시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한 안익태의 주소지는 에하라 고이치의 집이었다."오마이뉴스 관련 링크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964 이미 오래전 어렵게 찾아, 어렵게 편집해 올린 유튜브 에키타이안 ( = 안익태)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튜브 조회수는 처참한 지경이다. 뭐 이래서 친일청산 안될 거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확신하고 있다. 기사에서 언급한 에하라 고이치는 당시 주독 일본 공사가 아니다. 뭐 어쩌 겠는가 기자가 읽은 책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에하라는 공사가 아니라 참사관councilor 이다. (이는 전후 독일의 미군정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만주국은 로마에 대사관을 두고 독일 베를린과 함부룩에 공사관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국의 주베를린 공사는 에하라가 아니라 루 이웬 Lu I-Wen이란 인물이다. 북만주 길림성 퉁화현 현장, 만주국의 외무부 고위직을 지내다 만주국 총리 최측근으로 주독 베를린 공사로 39년에 임명되었다. <코리아환상곡>을 자기표절한 <만주환상곡>을 에키타이안이 베를린에서 연주할 당시 그 가사를 쓴 사람이 에하라다. 오족협화가 주된 내용이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는 베를린 반호수Wannsee 주변 고급 주택가에 있던 에하라의 관저에 주소를 두고 있었고 양인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래 사진을 보자. 한국에선 처음 공개되는 거다. 첫번째는 위 내가 올린 안익태 <만주환상곡> 지휘장면중 정체불명의 인물이 비중있게 등장하는 것을 내가 캡쳐한 거다. 주독대사 오시마중장 바로 다음에 등장한다. 이 자가 일본인 에하라인지 만주국의 주독 공사인 루 이웬인지 한 번 비교해 보자. 바로 그 다음 사진이 우리는 도대체 알 리 없는 당시 주독 만주국공사 루 이웬이다. 비슷한 듯 아닌 듯 자신이 없다. 루 이웬은 만주국 공사지만 한족출신이다. 에하라는 비록 직급상 공사는 아니지만 실세였다. 당연하다. 만주국은 푸이가 황제고 한족이 총리였지만, 실세는 일본의 관동군이었다. 이런 권력구도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는 바로 이 만주국 공사관의 실세 에하라의 관저에 기식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잘 모르겠다, 아래 사진 두 인물이 같은지 다른지 ... 비슷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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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31
  • 에하라 고이치의 생존
    우연히 찾은 사진 한 장에 담긴 사연이 끝이 없다. 첫번째 사진의 왼쪽은 나치시대 만주국의 베를린공사 여의문(뤼이웬)이다. 오른 쪽은 강원강일 (에하라고이치) 베를린공사관 참사관이다. 그 가운데 인물은 - 내가 파악한 바로 - 나치 외무상 요아힘 폰 립펜트롭일게다. 모르긴 해도 히틀러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찍은 기념사진으로 보인다. 립펜트롭은 나치패망후 A급 전범으로 처형된다. 사진의 두 아시아인, 뤼이웬은 45년 5월 나치와 만주국이 망한 뒤 어째 어째 중경으로 귀국했다. 메이지대 (일설에 따르면 와세다 대)를 졸업한 그는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에서 퉁화성 성장을 지냈음이 37.6.12자 오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기사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같은 날 인사이동에서보듯이 에하라 고이치는 하얼빈시 차장(일종의 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두사람은 바로 다음해인 1938년 베를린 만주국 공사 및 참사관으로 임명된다. 에하라가 공사관의 2인자인 참사관이라 ...해서 이상할 일이 아니다. 위 성장급 인사이동에서 보듯 성장급 아니 그 위인 대신급은 거의 한족이지만 차관이나 차장은 일본인이다. 즉 완전식민지인 조선과는 달리 만주는 형식상 오족 특히 한족을 내세웠고 실권은 차장, 차관인 일인이 쥐고 있었다. 이는 해외공관도 마찬가지 였다. 여의문 공사는 귀국후 체포되어 1946.5.11 쿤밍성 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른바 찬일부역자, '한간'이었다. 사진에 보듯이 사형판결문 주문은 "적국과 통모하여 본국에 반역을 도모햐였기에 사형에 처한다. 죽을 때까지 공민권을 박탈하며, 유가족의 필수생활비를 제외한 전재산을 몰수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처형당한 것은 1950년 10월 인민해방군의 운남성 소탕작전때였다. 성장급 이상은 사형에 처했던 '한간' 즉 친일파 처리 법규정에 따른 것이었지만, 다수 만주국 고위 관료가 국공내전때 살아 남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좀 불운(?)했던 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중국엔 친일파 문제는 없다.) 사진의 두사람과 에하라 고이치의 운명은 판이했다. 참사관으로서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놀라운 교분을 쌓았고 심지어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사적인 티파티에도 참석할 정도 였다. 에하라의 베를린 반호수(Wannsee)가 사저엔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하기 전까지 사실상 기식을 했고 베를린을 방문한 슈트라우스도 그 집에서 묶었을 정도다. 에하라가 없이 안익태, 에키타이가 과연 슈트라우스와 연결되었을 지는 전혀 의문이다. 아무튼 사진 속 두사람이 전범 또는 부역자로 처단된 데 반해 에하라 고이치는 나치패망후 만주국의 나머지 공사관 인원을 인솔 소련의 보호를 거쳐 일본에 무사 안착했다. 동경대 법학부를 나온 탓에 이후 그는 1969년 사망할 때까지 유력한 변호사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그 과정에 슈트라우스와 안익태에 관한 수필을 남겼는데 곧 입수되는 대로 번역, 공개할 예정이다. 이 역시 최초 공개 아닌가 한다. 독일, 일본, 만주 3국 모두 패전국이었다. 사진에는 있을 이유가 없지만 살아 남은 자는 에키타이, 그리고 그의 스폰서 에하라였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가 나이가 훨씬 많았던 에하라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1세기가 될 때까지 '애국자'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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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31
  • 에키타이 안 바르셀로나 라디오 편성표 모음
    에키타이안 1944.10.30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만주국> 에키타이안 1944.11.11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 에키타이안 1944.12.10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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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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