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04(화)

안익태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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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키타이안,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영상 최초공개! 그리고 ‘안익태애국가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 이미 나는 약 10년 전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의 자료실에서 찾아낸 40초가량의 이 연주회 클라이맥스 장면을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영상은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이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쟁뉴스의 후반부에 실려 있다. 당시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말미에 문화뉴스 꼭지에 실린 이 연주회 소식 말고도 그 날의 전쟁뉴스는 꽤 긍정적인 톤이다. 이후 나는 <안익태케이스>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사전 예약을 거쳐 베를린 소재 독일연방기록원(Bundesarchiv)산하 영상원(Filmarchiv)를 방문했다. 저 클라이맥스 장면의 원 필름을 보기위해서다. 이 영상은 2000년대 잠시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파리에 머물 때였는데, 그 전날 베를린에서 하룻밤을 묶고 아침 일찍 영상원을 찾으니 직원이 내가 신청한 필름을 준비해 두었다. 영상원은 과거 내가 베를린에 살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이미 연방기록원은 안익태 즉 나치 시절 기록물에 포함된 에키타이안 파일을 열람 복사하기 위해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영상원은 처음이었다. 혼자 앉아 보고 또 보고하면서 직원의 동의하에 나의 휴대폰으로 그 영상을 두 번 촬영했다. 몇 달 전에 예약하고 또 파리에서 비행기로 이 이른 시간에 방문했던 때문인지 직원도 촬영요청에 선 뜻 동의해 주었다. 물론 대각선으로 검은 테이핑을 한 뒤에 말이다. 몇 년 전 나는 광복회에 바로 이 필름 원본 입수를 권고한 적이 있다. 비록 친일파의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역사 아닌가, 그렇다면 공법단체인 광복회라면 그 필름을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지금 공개하는 이 필름은 그렇게 입수된 원본 필름의 사본이다. 이 필름은 당시 국회토론회에서 공개한 바 있다. 그리고 축약본이 광복회 홈피에 올라간 적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이 영상은 전 국민이 한 번은 보고 들어야 할 우리 흑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판단된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안익태가 만든 ‘애국가’는 트로트처럼 ‘사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비록 법정 국가는 아니지만 ‘공적 의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안익태의 ‘명예회복’을 외치고 나섰다. 나로서는 국민 스스로가 이런 일부 극소수 뉴라이트의 주장에 얼마나 동의할 것인지 충분한 자료와 근거를 제공하고 판단해 보자는 쪽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에키타이안의 2차 대전 시기 영상자료는 모두 3가지다. 먼저 프랑스 국립영상원 자료가 있다. 두 번째는 시기적으로 이보다 앞선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 깊은 페스티 비가도홀에서 열린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 1주년 기념 연주회 영상이다. 여기서 에키타이안은 일본을 대표해서 ‘에텐라쿠’를 연주했다. 해방 후 에키타이안은 이를 ‘강천성악’이라 달리 부르며 청중을 우롱한 바 있다. 앞의 두 영상은 모두 내가 올려놓은지라 유튜브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영상이 바로 여기에 소개한 영상이다. 첫 번째 영상은 약 7분 50초 정도인 이 영상의 마지막 40초를 편집해 나치의 전쟁뉴스 영상에 내보낸 것이다. 이 곡이 연주된 때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인 시점에서 1년이 채 안 된 시점이다. 당시 상해 임정은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발동해 조선과 일본은 전쟁상태였다. 일본의 놀라운 전과를 목격한 독일 전역은 당시 일본 붐이 불고 있었다.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 일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독-일협회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가 독일 전역에, 그리고 <일독협회>가 일본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 바로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는 어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안이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전시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자 일본 귀족으로서 에키타이와 마찬가지 지휘자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다음이 에키타이였다. <독일협회>는 나치선전성의 지휘·감독을 받는 기관이었다. 즉 그 정점에 괴벨스가 있다. 안익태를 추적하면서 여러 차례 서신 교환을 한 바 있는 미 시카고대학 음대 티모시 잭슨 교수는 1942년 연주회 녹화가 괴벨스의 지시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시점 독일외교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반소 제2 전선을 열어 주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독일 동부전선의 압박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이 연주회는 일본 괴로 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이었다. 이 행사는 만주일대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던 그런 각종의 기념행사 중 하나였다. 즉 에키타이안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한 바로 그 적국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개최된 각종의 행사에 일본을 대표해서 이적행위에 솔선수범한 것이다. 에키타이안이 하필 ‘만주국’을 찬양하는 곡을 만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의 스폰서인 에하라 고이치가 당시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이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참사관이었지만 에하라 고이치는 동경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얼빈시 부시장을 역임한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하얼빈시 총무처장 그리고 부시장으로 재직 시 731부대 창설에 핵심적으로 조력하고 이후 독일과 일본의 생화학전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급상 참사관이지만 정식 공사인 한인 여의문 보다 실세였다. 바로 그런 그의 사저에 에키타이안은 2년 반 가까이 주소지를 두고 여기서 기식했다. 바로 베를린 호숫가에 있는 이 집에서 작곡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그리고 미 CIA 전신인 OSS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 고이치는 전쟁 말기 일본의 재독 첩보조직의 총책이었다, 쉽게 말해 재독 일본 스파이 수장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은 셈이다. 에키타이안과 같은 시기 에하라 고이치가 관리하던 베를린 체류 또 다른 조선인이자 현대 무용가 박영인(쿠니 마사미)을 OSS는 ‘가장 영리한 첩보원agent’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스파이총책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안은? 박영인은 전시에 독일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다녔다. 에키타이안은 전시에 추축국과 친추축국 그리고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그들을 위해 복무했다. 이 영상의 오프닝 크레딧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만주제국Mandschoutikuo 건국 10주년 기념 축하 연주회,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베를린 대편성 라디오방송교향악단이 라미LAMY 합창단 협연하에 작곡가 에키타이안이 지휘하고 에하라 고이치가 합창 대본을 쓴 ’축전곡Festmusik’.” 그리고 배경에 깔린 총보의 제목도 ‘축전곡’으로 되어 있고 바로 그 밑에 에하라 고이치가 일본어로 쓴 ‘오족협화’를 찬양하는 합창대본이 음역되어 있다. 1942년 9월 18일의 이 영상은 이 축전곡의 마지막 악장이다. 영상의 5:30초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에하라 고이치다. 그리고 합창대본을 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동양인이 만주국 공사 여의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후 그는 중국에서 ‘한간’ 혐의로 총살되었다. 당시 주독 일본대사 육군중장 오시마 히로시는 영상 6:36초에 등장한다. ‘히틀러보다 더 히틀러스럽다’는 평을 받던 인물이다. 6:40초 즈음 에하라 고이치가 다시 잠깐 등장하고 6:59초 너무나 익숙한 애국가의 ‘우리나라 만세’와 거의 같은 선율이 등장한다. 물론 이때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만주국이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에키타이가 청중석을 가리키는 데 아마 에하라 고이치가 아닐까 싶다. 이 영상은 전곡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1944년 말 이후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해지자, 사실상 추축국 편이었던 스페인의 프랑코정권은 추축국을 지원하기 위해 에키타이안의 '만주국'을 수차례 방송한 사실이 바르셀로나 라디오 방송국 편성표에 그 일자, 시간과 더불어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이 방송이 '음반'을 통해 나갔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축전곡’의 전곡을 들어야 과연 에키타이안이 안익태 애국가선율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로서는 꽤 장기간, 이 음반을 추적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상에서도 보듯 악보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에키타이안 본인이 이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 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코리아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가 스페인 도피 중 가지고 있던 이 곡의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한 바로 그것이다. 나는 몇 년 전 에키타이안이 만주국 악보를 한국환상곡으로 표지 갈이를 한 바로셀로나 북쪽 휴양지 사가로라는 곳을 직접 답사한 적이 있다. 훗날 에키타이는 이 악보를 '민족의 영도자'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1955년 문득 애국자로 둔갑 이승만 탄신기념연주를 위해 귀국한 에키타이안은 이승만에게 이 악보를 헌정한다. 바로 그 악보는 현재 김형석이 관장으로 있는 독립기념관에 있다! 1944년 이미 전황은 가망이 없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 히틀러 생일주간에 열린 연례 베토벤 페스티벌 연주를 위해 에키타이안은 에하라 고이치와 파리를 방문했다. 이 연주회에서 저 유명한 알프레드 코르토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협연했다. 알프레드 코르토는 그 직후 파리가 해방된 뒤 ‘입국 금지 인물 persona non grata’로 지목되어 한참 동안 프랑스에 올 수가 없었다. 에키타인안도 이 리스트에 올랐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연주를 끝으로 에키타이는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망’간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애국자가 이제 해방이 되었는데 그리운 조국으로 가지 않았을까. 일본인이지만 일본으로, 조선인이지만 조선으로도 가지 못한, 그렇다고 독일에 남을 수도 미국으로 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의 스페인행은 그의 친일, 친나치 행적을 은폐하기에 나름 '잘 된(?)' 선택일지 모르겠다. 프랑코 독재가 싫어 파블로 카잘스는 살아생전 조국인 스페인에 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가 나치 패망 후 손쉽게 도망갈 곳 중 하나가 스페인이었다. 최근 나는 해외 경매사이트에 에키타이안의 ‘흰백합화’ SP판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곡은 특히나 에키타이안의 몇 안 되는 곡 중 작곡 연도나 곡 내용이 불명인 상태로 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어디서 작곡되었는지는 이미 밝혀졌다. 에하라 고이치가 전후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귀국한 뒤 동경에서 자신의 후일담을 수필로 낸 것을 내가 발굴할 적이 있다. 여기에 이 ‘축전곡’과 함께 ‘흰백합화’도 자신의 집에서 작곡했다고 되어 있다. 가격이 터무니없어 나는 이 음반을 사지 않았다. 아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만주국 ‘축전곡’ 음반이 경매사이트에 등장하면 그것은 내가 산다. 누가 에키타이안의 명예회복을 말한다. 하지만 그전에 이런 자의 애국가를 불러야 했던 우리 국민의 ‘명예회복’이 먼저다. 그래야 한다.
    • 안익태 애국가
    • 왜 문제인가?
    • 친일 친나치 밀착
    2024-08-14
  • 에키타이안, 알프레드 코르토 그리고 프랑스 비시부역정부 일영사의 딸
    1944년 히틀러생일주간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페스티벌에 에키타이안이 알프레도 코르토와 협연했다. 공연뒤 프랑스 비시부역정부 일본 영사의 딸에게 코르토가 사인을 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 사진이 게재된 프랑스 일간지 사주는 파리수복후 즉각 체포되고, 신문은 폐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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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스페인 사가로S'Agaro, 1944년 바르셀로나로 가던 에키타이는 여기서 한 달 정도 체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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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 친나치 밀착
    2024-07-01
  • 안익태의 '만주환상곡'은 대한민국 애국가인 '한국환상곡'
    [오랜 만에 에키타이 안=안익태] 제자 이유철이 현지에서 어렵게 구해 준 귄터 하쉬가 편집한 <독-일협회 Deutsche-Japanische Gesellschaften von 1888 bis 1996>란 책에 에키타이 안이 등장하니 여기에 번역해 두고자 한다.(277-278쪽)에키타이 안은 1941-42년 [나치시기] 비엔나 총독Reichsstatthalter 발두어 폰 쉬락Baldur von Schirach이 관장했던 그리고 독-일협회 비엔나지부가 주최하는, <전시동계지원사업>을 위한 독-일협회주최 연주회시리즈를 통해 데뷔하였다. 원래 1942년 2월 3일로 예정된 연주회는 [전시] 석탄부족으로 3월 12일로 연기되었다.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베에토벤의 에그몬트서곡, 에키타이 안이 오케스트라버전으로 편곡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C장조,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A장조, 일본 황기 2,600년 기념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 축전곡>이 들어가 있었다. 또 한 번의 그런 연주회가 1943년 2월 11일에도 열렸다. 독일협회의 비엔나지부 사무총장은 그 연주회의 전사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에키타이 안씨는 일본대사관 참사관 M. 이마이를 통해 자신의 희망을 표현한 편지를 보내게 함으로써 비엔나에서 자신의 '만주환상곡'을 공연할 수 있었다. 이 연주회는 5월 초에 그것도 만주환상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함께 올리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비엔나에선 그런 식의 연주편성은 완전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비엔나총독 발두어 폰 쉬락에게도 문의한 뒤 독일제국 건국기념일인 1943년 2월 11일에 계획된 연주회때 오직 일본 작곡가의 일본 음악만으로 무대에 올리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자고 결정했다. 그렇지만 베에토벤 교향곡 7번과 레오노레서곡등 베에토벤의 작품과 에키타이안의 작품을 묶었던 그 날 밤 연주회는 독일의 스탈린그라드전투 패전이라는 암울한 분위기속에서 개최되었다. 비엔나 지부 사무총장은 말하길 "지금 이 불쾌하게 억눌린 분위기가 다수 청중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나는 모르긴 해도 상당량의 표를 공짜로 나눠 져야 할 것 같다."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서 작곡된 이 작품은 "(일본어로 부른) 소박한 그렇지만 힘있게 종종 제창unisono으로 이어지는 마지막합창속에서, 희망에 찬 평화의 사절처럼" 울려 퍼졌다. 어쩌나, 바로 이 <만주환상곡>이 <한국환상곡>이고, 스탈린그라드전투 패배이후 더 한층 짙어진 패전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는 이들을 위로 하기 위해 '일본어로' 된 저 감동적인 <애국가>의 마지막 합창부분을 지휘하고 있었다. 물론 그 때는 <만주환상곡>의 클라이맥스이지만 말이다. 1996년 출판된 이 아주 객관적인 책의 저자 조차 바로 이 만주환상곡이 한국환상곡인 줄 꿈에라도 알까. 에키타이가 바랬던 것처럼, 진짜 이 한국 아니 만주환상곡과 베에토벤 9번 합창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면 어찌 되었을까.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전쟁의 한 복판 하루 하루 고단한 삶을 견뎌야 했던 혹한속의 비엔나 시민들이 에키타이 안의 일본어로 된 오족협화의 선율에 위로를 받았을까. 그렇다면 안익태는 참으로 위대한 코스모폴리탄 박애주의자였음에 분명하다. 허나 그 선율에 - 황교안의 애국 기준에 따라 - 심지어 4절까지 따라 불러야 하는 우리는 어쩌나, 흔히 말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치곤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그래 '역사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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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 친나치 밀착
    2021-12-31
  • [단독]안익태, 일본 명절에 기미가요 연주했다
    일단 기사화했다. 전에 소개한 베를린주재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1952년 한국전쟁중에 기고한 글 말이다. 이 최초로 공개된 에하라의 글이 갖는 의미는 크게 네가지다. 1. 에하라의 기억에 의하면, 1941년 일본 4대명절인 명치절 11월 3일 아침 루마니아 일본공사관, 식순에 따른 기미가요 제창때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던 안익태 아니 에키타이를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하필이면 기미가요 반주를 하고 있었다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2. 41년 6월 당시 독소전이 개전되고 일본은 다음 달 12월 진주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헝가리 일본공사관은 현지 일인들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었다. 에키타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키타이로서는 이대로 귀국을 할 경우 자신의 미래에 보탬이 될 게 없었고, 해서 심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습직후 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런 사정을 알리... 없는 에키타이로서 내집에 와서 있어라는 에하라참사관의 제안은 한줄이 구원의 빛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안익태 연구에서 바로 이 대목이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이제 한 쪽 진술이 나온 것이다. 즉 에키타이가 나에게 상담을 요청해 그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를 내 집에 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에키타이 쪽의 진술은 현재 없다. 이후 42년, 43년 에키타이는 커리어에 정점을 찍는다. 나치가 망할 때까지도 에키타이의 집주소는 에하라의 집 바로 거기였다. 구스타프 프라이탁가 15번지, 베를린 반호숫가 지금도 쾌적한 고급 주택가다. 3. 11월 3일 저녁 부카레스트, 자신의 음악회에 에하라 참사관을 초대한 에키타이는 <코리아환상곡>을 '우라카이', 자기 표절한 <교쿠토(극동)>를 일본 궁중아악을 변주한 <에텐라쿠>와 함께 연주해 호평을 받았다. 이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루마니아공사는 본국 즉 외무성과 아울러 조선총독부에도 보고했다. 에하라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는 1942년 9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회를 지휘했고 그 동영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오래전에 그 동영상의 일부를 유튜브에 올려 놓았다) . 이 곡은 기본적으로 <교쿠토>에 마지막 4악장 합창부를 더해 총 4악장으로 된 것이었다. 에하라는 이 곡의 마지막 4악장의 가사를 자신이 썼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가사 내용은 이미 밝혀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 중국민요의 멜로디를 따왔다고 말한다. 이 민요가 바로 만주국 국가에도 사용된 '소무목양'이다. 4. 에하라는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처럼 말한다.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에하라는 1942년 3월 14일 저녁 지금도 영업중인 비엔나의 유명한 레스토랑 <드라이 후사렌(Drei Husaren: 3인의 기사들)> 별실에서 슈트라우스 부부와 에키타이 이렇게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42년 6월 슈트라우스의 첫 오페라 <군트람>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베를린 방문시 자신의 집에 머물것을 제안했고 슈트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열흘 가까이 에하라의 집에 머무는 동안 슈트라우스는 생일을 맞았다. 그런데 극소수의 사람이 에하라의 집 생일축하파티에 초대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치 선전성 음악담당 국장(에라하는 부장이라고 했다) 하인츠 티에첸Heinz Tietjen이었다. 티에첸은 나치독일의 음악정책을 총괄하는 실세중 실세였다. 아무튼 에하라참사관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아니라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를 연결해 준 '수완'을 발휘했다고 했지만, 에하라집에 기식하는 동안 슈트라우와 더욱 가까웠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에하라의 글로 인해 가리워져 있던 에키타이에 관련된 디테일이 보다 또렸해졌다. 하얼빈 세관장과 부시장을 지낸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의 그가 그저 에키타이가 '동생'같고 그의 '대성'을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 집에 머물게 했다고 믿는 다면 글쎄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 전쟁중이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에하라는 대단한 음악애호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본 아니 만주국의 고위외교관이었다. 아무런 정치적 목적없이 에키타이의 뒤를 바줄 수는 없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반면 에키타이로서는 본국송환을 모면케 해주고, 밥도 주고, 살 집도 주고, 돈도 벌게 해주고, 유명하게 해주고, 또 슈트라우스와 친하게 만들어 주고 혜택으로 보자면 이만 저만 남는 장사가 아니다. 그런 에하라에게 <코리아판타지>를 우라카이한 <만주국> 하나 만들어 주는 거야 인간의 정리상 마땅한 도리라 하겠다. 흔히 안익태의 애국가를 임시정부가 그 사용을 허가해 줬다고 애써 그 정통성을 찾는다. 그런데 바로 그 임시정부가 에키타이가 에하라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한 바로 그 즈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임시정부로 보자면 안익태는 도무지 어쩔 수 없을 정도의 반역행위를 한 셈이다. 관련기사 링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310600015&code=960201&nv=stand
    • 안익태 애국가
    • 왜 문제인가?
    • 안익태는 누구인가?
    2021-12-31
  • 이승만의 선물을 달고 있는 안익태
    [에키타이 안] 1938년 2월 20일 '애국가'선율이 포함된 <코리아환타지>가 더블린 Gaiety Theatre에서 초연되었다. 아래는 그 극장의 현재 모습이다. 이 때까지 안익태의 영문이름은 Eak Tai Ahn이지 에키타이안이 아니었다. 우리 나이로 33세 당시의 안익태다. 이 멋진 극장에서 연주된 환상곡의 4악장에 애국가의 선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요일 공연을 앞두고 더블린에 도착한 안익태를 현지 The Irish Times에서 인터뷰한 기사다. 38년 2월 15일이었다. 오래전 영국유학중인 나으 제자이자 학문의 도반인 유철군에게 부탁해 두었던 것을 이제 받아 보았다. 이 내용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자가 어떻게 알아 들었는지 모르지만, 인터뷰기사의 내용은 뭐라 할까 좀 괴이하다. 아래 그 인터뷰 내용을 보자. "금세기 초 러일전쟁직후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지위를 상실하고 일본의 지배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의견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왕자 리(Prince Li)다. 그는 2,000년 동안 이 나라를 통치한 황가 혈통의 계승자다. 이 들 민족주의자 상당수는 정치범으로 감옥에 있으며 온 나라가 자신들의 자유를 되찾아 줄 동방에서의 사태 전개를 기다리고 있다." 때는 1930년대 바야흐르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유럽 또한 세계 전쟁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애국가 세계초연의 현장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2,000년 황실 혈통의 적통자 "왕자 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오락가락하지만 안익태가 1938년 이 시점까지 낮은 수준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갖고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왕자 리"가 누군가. 평소 이승만은 자신을 왕가의 후손이라고 떠들고 다녔고, 또 스스로 왕노릇을 했다. 그렇다면 "왕자 리"가 바로 이승만? 1955년 이승만 탄신 80주년을 맞아 애국자로 둔갑해 귀국한 안익태에게 이승만은 문화훈장 1호를 선물했고, 안익태는 코리아환타지 자필 악보를 이 '민족의 영도자'에게 헌정했다. 사진은 이승만의 선물을 가슴에 달고 지휘하고 있는 안익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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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31
  • 나치와 일제 패망 후 스페인으로 도피한 에키타이 안
    나치독일과 일제의 패전후 일본사람 에키타이 안이 도피한 곳은 마찬가지 파시스트 독재국가인 스페인이었다. 1946년 3월 16일 에키타이 안의 이름이 바르셀로나 라디오방송국 편성표에 등장했다. 우선 당일의 연주목록을 보자. 이 날 에키타이 안은 리세오극장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 바그너의 '리엔치 서곡",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신들의 황혼", 본인이 작곡한 교향시 "에텐라쿠" (하늘에서 내려온 음악),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D minor", "푸가 G minor", 칸타타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를 연주하고 휴식시간뒤에 1944년 -1945년 사이 작곡된 교향적 환상곡 <코리아>를 '세계초연'했다.그렇다. 1. 여전히 그는 에키타이라는 일본이름을 쓰고 있다. 2. < 에텐라쿠> 는 일본왕실의 궁중음악을 서양 관현악 악기로 편곡한 곡으로 그가 이미 나치독일에서 몇 번 연주한 바 있는 곡이다. 여기 부제에서도 적혀 있듯 일본의 궁중음악 에텐라쿠는 이후 <강천성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전통음악으로 둔갑한다. 3. 베토벤이 사라지고 바흐가 대거 등장했다. 4. 일반적으로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환상곡>은 1938년 2월 20일 더블린에서 세계초연된 걸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세계초연'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 38년 코리아환상곡을 44년~45년 사이 개작한 걸로 보인다. 3악장은 나의 조국, 그 과거, 그 미래 란 이름이 붙어 지금의 코리아 환상곡에서 합창부분이 빠진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제 <만주국>은 사라졌다.이 시점 에키타이 안은 여전히 일본이름을 쓰고, 일본왕실 음악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오래전 자신이 만든 <코리아환상곡>을 손 봐서 '나의 조국'을 지휘하고 있다.에키타이 안과 안익태, 두개의 인격, 정신분석에서 이를 두고 '해리 dissociation'라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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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6
  • 대한민국 애국가를 작곡한 일본인 에키타이 안
    일본사람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 우리 애국가를 작곡했다는 사실은 이제는 꽤나 알려져 있다. 그 분의 한국이름이 안익태라는 것도 말이다. 이 분이 1943년 2월 11일 목요일 오후 7시 반 그 유명한 빈의 뮤직페어라인(음악협회) 대공연장에서 빈 국립오페라합창단 그리고 시립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베토벤의 레오노레 서곡과 교향곡 제7번 그리고 자신이 작곡한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혼성합창단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국Mandschukuo>을 공연했다.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곡이고 그 이전 베를린필에서도 공연한 바 있다. 아래 사진은 당일의 공연프로그램이다 (내가 찾은 것이니 마구 퍼나르셔도 된다 ㅎ). 이상하게도 에키타이 안의 <만주환상곡>의 악보는 현재 분실된 상태다. 그 당시 에키타이 안은 단 한번도 <한국환상곡>을 공연한 적이 없다. 대신 바로 이<만주환상곡>을 지휘했다. 이 <만주환상곡>에서 '만주'를 떼고 '한국'Korea을 집어넣은 것이 <한국환상곡>인지 현재 100%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나치를 포함 독일청중앞에서 이 곡을 연주한 기록영상물상으론 특히 '무궁화 삼천리....'등에서 우리 애국가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만주환상곡의 합창 가사를 쓴 사람은 독일주재 일본외교관 이하라 고이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10년 세월 제국은 무르익었다. 부지런한 땀은 보답받았네. 민중은 환호한다. 나라는 저 멀리 빛난다./ 하나의 생각으로 통일되어 사람들은, 희망에 차 번성한다. 난(蘭)은 환히 피었고, 새 질서의 첫 열매가./ 우리는 일본과 굳건히 연결되었네. 이 신성한 목표 속에 하나의 심장과도 같이, 영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라네, 독일이여 또한 이탈리아여 힘을 냅시다./ 영원한 봄날은 이미 가까이 와있네, 모든 족속 만족해할 그날이. 보라! 저 만주 평원 위에, 향기로운 난 환히 피었다."일본사람 에키타이 안은 독일체류 당시 바로 이 분 이하라 고이치의 집에서 기숙했다. 나치가 패망하는 시점 그는 파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치독일의 동맹국 프랑코의 스페인으로 '튀었다'. 그 곳에서 스페인여성과 결혼 국적세탁에 성공했고, 스페인사람이 된다. 스페인사람 에키타이 안은 유럽최고 휴양지중 하나인 스페인 마요카에서 이후 잘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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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 친나치 밀착
    2021-12-26
  • 나치독일 회원이었던 유일한 조선인 '에키타이 안'
    에키타이 안은 조선출신의 유일한 나치독일의 <제국음악협회> 회원이었다. 전 사회를 완벽하게, 전일적으로 조직화했던 나치독일에서 이 협회는 말하자면 음악분야의 나치 선전일꾼들의 조직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래 사진은 음악학자 이경분이 찾아 낸 에키타이 안의 회원증 사본이다. 내용을 보면, 성명: A h n /Ekitai, 주소: Grunewald구, Gustav- Freytag- str. 15번지, 생년월일: 1911년 12월 5일, 출생지: 동경/ 일본, 국적: 일본, 직업: 지휘자 겸 작곡가, "제국영토내 근로허가(A.G.)를 부여함" 이라고 오른 쪽 하단에 적혀 있다. 여기서 에키타이 안은 자신의 출생지를 평양이 아니라 동경이라고 명백히 허위로 기재하고 있다. 그리고 출생년도도 1906년인데 1911년이라고 되어 있다. 특히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사각 스탬프안의 내용이다. 그대로 옮기면, Nachteilige Notierungen in politischer Hinsicht liegen nicht vor.(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기재 사항 없음)Reichssicherheitshauptamt 4 C Id (제국안전본부 4국 C실 I과 d)Berlin, den 24 Juli 1943 (1943년 7월 24일 베를린)줄여서 흔히 RSHA라 불리는 제국안전본부에는 모두 6개의 국이 있는 데 <제4국>이 바로 그 유명한 게슈타포(Gestapo, 국가비밀경찰)다. 제4국 곧 게쉬타포내에는 다시 A(저항세력), B(세계관등 사상검열), C(기록관리), D (점령지), E (방첩), P(외사업무)등 6개의 실이 있다. 그중 4국 C실 1과는 심사등 기본적인 기록관리, 일종의 존안카드를 관리한다고 보면 되겠다.그리고 '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사항 없음'은 게쉬타포가 해당 인물에 대한 신원조회를 하고 회신을 할 때 관용적으로 흔히 사용하던 문구다. 쉽게 말해 에키타이 안의 사상등 신원은 게쉬타포가 보더라도 별 하자가 없다는 말로 보면 된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에키타이 안의 주소를 보자. 그뤼네발트는 베를린 서쪽의 호숫가 고급주택가다. 나도 베를린 있을 때 좀 가볼 라 하다가 너무 비싸 꿈도 못꾼 구역이다. 그 중 구스타프 프라이탁가는 바로 호수에 면해 있는 주택가다. 음악학자 송병욱이 밝혀 냇듯이 이 집은 일본외교관 이하라 고이치가 거주하던 집이자 사무공간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한 때 애국가를 작곡할 정도로 '불령선인'이었던 안익태, 이제 일본대사관이 확실하게 신원을 보장해 주는 그래서 게쉬타포조차도 정치적 하자가 없다고 판정해 준 그런 '동경'출신 일본인으로 완벽 변신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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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익태는 누구인가?
    2021-12-26
  • 안익태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거해 기소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에키타이 안=안익태가 이 법률에 의거 기소되었다면 과연 몇 조, 몇 항의 적용을 받았을까, 그리고 형량은 어느 정도 였을까?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다시 읽다.반민족행위처벌법 [시행 1948.9.22] [법률 제3호, 1948.9.22, 제정]제1장 죄제1조 일본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한다.제2조 일본정부로부터 작을 수한 자 또는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이상을 몰수한다.제3조 일본치하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제4조 좌의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0년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할 수 있다.1.습작한 자2.중추원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되었던 자3.칙임관이상의 관리되었던 자4.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5.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하였던 자6.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7.비행기, 병기 또는 탄약등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자8.도, 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적이 현저한 자9.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10.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단체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11.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12. 개인으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제5조 일본치하에 고등관 3등급이상, 훈 5등이상을 받은 관공리 또는 헌병, 헌병보, 고등경찰의 직에 있던 자는 본법의 공소시효경과전에는 공무원에 임명될 수 없다.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제6조 본법에 규정한 죄를 범한 자 개전의 정상이 현저한 자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할 수 있다.제7조 타인을 모함할 목적 또는 범죄자를 옹호할 목적으로 본법에 규정한 범죄에 관하여 허위의 신고, 위증, 증거인멸을 한 자 또는 범죄자에게 도피의 길을 협조한 자는 당해 내용에 해당한 범죄규정으로 처벌한다.제8조 본법에 규정한 죄를 범한 자로서 단체를 조직하는 자는 1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제2장 특별조사위원회제9조 반민족행위를 예비조사하기 위하여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특별조사위원회는 위원10인으로써 구성한다.특별조사위원은 국회의원중에서 좌기의 자격을 가진 자를 국회가 선거한다.1. 독립운동의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견수하고 애국의 성심이 있는 자2.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 덕망이 있는 자제10조 특별조사위원회는 위원장, 부위원장 각1인을 호선한다.위원장은 조사위원회를 대표하며 회의에 의장이 된다.부위원장은 위원장을 보좌하고 위원장이 사고가 있을 때에는 그 직무를 대리한다.제11조 특별조사위원은 기 재임중 현행범이외에는 특별조사위원장의 승인이 없이 체포심문을 받지 않는다.제12조 특별조사위원회는 사무를 분담하기 위하여 서울시와 각도에 조사부, 군부에 조사지부를 설치할 수 있다.조사부책임자는 조사위원회에서 선거하여 국회의 승인을 받어야 한다.제13조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채용하는 직원은 친일모리의 세평이 없는 자라야 한다.제14조 조사방법은 문서조사, 실지조사의 2종으로 한다.문서조사는 관공문서, 신문 기타 출판물을 조사하여 피의자명부를 작성한다.실지조사는 피의자명부를 기초로 하고 현지출장 기타 적당한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하여 조사서를 작성한다.제15조 특별조사위원회로부터 조사사무를 집행하기 위하여 정부 기타의 기관에 대하여 필요한 보고기록의 제출 또는 기타 협력을 요구할 때에는 이에 응하여야 한다.제16조 특별조사위원이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특별조사위원장의 신임장을 소지케 하며 그 행동의 자유를 보유하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제17조 특별조사위원회가 조사를 완료할 때에는 10일이내에 위원회의 결의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고 의견서를 첨부하여 특별검찰부에 제출하여야 한다.제18조 특별조사위원회의 비용은 국고부담으로 한다.제3장 특별재판부구성과 절차제19조 본법에 규정된 범죄자를 처단하기 위하여 대법원에 특별재판부를 부치한다.반민족행위를 처단하는 특별재판부는 국회에서 선거한 특별재판부부장1인, 부장재판관3인, 재판관12인으로써 구성한다.전항의 재판관은 국회의원중에서 5인, 고등법원이상의 법관 또는 변호사중에서 6인, 일반사회인사중에서 5인으로 하여야 한다.제20조 특별재판부에 특별검찰부를 병치한다.특별검찰부는 국회에서 선거한 특별검찰부검찰관장1인, 차장1인, 검찰관7인으로써 구성한다.제21조 특별재판관과 특별검찰관은 좌의 자격을 가진 자 중에서 선거하여야 한다.1. 독립운동에 경력이 있거나 절개를 견수하고 애국의 성심이 있는 법률가2. 애국의 열성이 있고 학식, 덕망이 있는 자제22조 특별재판부부장과 특별재판관은 대법원장 및 법관과 동일한 대우와 보수를 받고 특별검찰관장과 특별검찰관은 검찰총장 및 검찰관과 동일한 대우와 보수를 받는다.제23조 특별재판부의 재판관과 검찰관은 그 재임중 일반재판관 및 일반검찰관과 동일한 신분의 보장을 받는다.제24조 특별재판부의 재판관과 검찰관은 그 재임중 국회의원, 법관과 검찰관 이외의 공직을 겸하거나 영리기관에 참여하거나 정당에 관여하지 못한다.제25조 특별재판부에 3부를 두고 각부는 재판장1인과 재판관4인의 합의로써 재판한다.제26조 특별검찰관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와 일반검찰사실을 기초로 하여 공소을 제기한다.특별검찰관은 검찰상 필요에 의하여 특별조사위원 또는 사법경찰관을 지휘명령할 수 있다.제27조 특별검찰관은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보고서를 접수한 후 20일이내에 기소하여야 하며 특별재판부는 기소된 사건에 대하여 30일이내에 공판을 개정하여야 한다. 단, 특별재판부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기간을 연장할 수 있으되 30일을 초과할 수 없다.제28조 본법에 의한 재판은 단심제로 한다.소송절차와 형의 집행은 일반형사소송법에 의한다.부칙 <법률 제3호, 1948.9.22>제29조 본법에 규정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는 본법 공포일로부터 기산하여 2년을 경과하므로써 완성된다. 단, 도피한 자나 본법이 사실상 시행되지 못한 지역에 거주하는 자 또는 거주하던 자에 대하여는 그 사유가 소멸된 때로부터 시효가 진행된다.제30조 본법의 규정은 한일합병전후부터 단기 4278년 8월 15일이전의 행위에 이를 적용한다.제31조 본법에 규정한 범죄자로서 대한민국헌법 공포일로부터 이후에 행한 그 재산의 매매, 양도, 증여 기타의 법률행위는 일체무효로 한다.제32조 본법은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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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익태는 누구인가?
    202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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