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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웬과 에하라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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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사다. 그런데 군데군데 사실관계에 오류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 우선 기사를 보자.
"당시를 녹화한 영상에는 '만주국 창립 10주년 축하 음악회'라는 독일어 자막이 찍혀 있고, 콘서트홀 중앙엔 대형 일장기가 걸려 있다. 일본과 만주국의 영광을 기리고, (나치) 독일 및 (무솔리니) 이탈리아의 건승을 비는 내용의 가사는 당시 주독 일본 공사였던 에하라 고이치가 썼다. 당시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한 안익태의 주소지는 에하라 고이치의 집이었다."오마이뉴스 관련 링크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34964
이미 오래전 어렵게 찾아, 어렵게 편집해 올린 유튜브 에키타이안 ( = 안익태)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튜브 조회수는 처참한 지경이다. 뭐 이래서 친일청산 안될 거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확신하고 있다.
기사에서 언급한 에하라 고이치는 당시 주독 일본 공사가 아니다. 뭐 어쩌 겠는가 기자가 읽은 책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에하라는 공사가 아니라 참사관councilor 이다. (이는 전후 독일의 미군정 문서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만주국은 로마에 대사관을 두고 독일 베를린과 함부룩에 공사관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국의 주베를린 공사는 에하라가 아니라 루 이웬 Lu I-Wen이란 인물이다. 북만주 길림성 퉁화현 현장, 만주국의 외무부 고위직을 지내다 만주국 총리 최측근으로 주독 베를린 공사로 39년에 임명되었다.
<코리아환상곡>을 자기표절한 <만주환상곡>을 에키타이안이 베를린에서 연주할 당시 그 가사를 쓴 사람이 에하라다. 오족협화가 주된 내용이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는 베를린 반호수Wannsee 주변 고급 주택가에 있던 에하라의 관저에 주소를 두고 있었고 양인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래 사진을 보자. 한국에선 처음 공개되는 거다. 첫번째는 위 내가 올린 안익태 <만주환상곡> 지휘장면중 정체불명의 인물이 비중있게 등장하는 것을 내가 캡쳐한 거다. 주독대사 오시마중장 바로 다음에 등장한다. 이 자가 일본인 에하라인지 만주국의 주독 공사인 루 이웬인지 한 번 비교해 보자. 바로 그 다음 사진이 우리는 도대체 알 리 없는 당시 주독 만주국공사 루 이웬이다. 비슷한 듯 아닌 듯 자신이 없다. 루 이웬은 만주국 공사지만 한족출신이다. 에하라는 비록 직급상 공사는 아니지만 실세였다. 당연하다. 만주국은 푸이가 황제고 한족이 총리였지만, 실세는 일본의 관동군이었다. 이런 권력구도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는 바로 이 만주국 공사관의 실세 에하라의 관저에 기식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잘 모르겠다, 아래 사진 두 인물이 같은지 다른지 ... 비슷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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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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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하라 고이치의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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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찾은 사진 한 장에 담긴 사연이 끝이 없다. 첫번째 사진의 왼쪽은 나치시대 만주국의 베를린공사 여의문(뤼이웬)이다. 오른 쪽은 강원강일 (에하라고이치) 베를린공사관 참사관이다. 그 가운데 인물은 - 내가 파악한 바로 - 나치 외무상 요아힘 폰 립펜트롭일게다. 모르긴 해도 히틀러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찍은 기념사진으로 보인다.
립펜트롭은 나치패망후 A급 전범으로 처형된다. 사진의 두 아시아인, 뤼이웬은 45년 5월 나치와 만주국이 망한 뒤 어째 어째 중경으로 귀국했다. 메이지대 (일설에 따르면 와세다 대)를 졸업한 그는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에서 퉁화성 성장을 지냈음이 37.6.12자 오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기사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같은 날 인사이동에서보듯이 에하라 고이치는 하얼빈시 차장(일종의 부시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두사람은 바로 다음해인 1938년 베를린 만주국 공사 및 참사관으로 임명된다. 에하라가 공사관의 2인자인 참사관이라 ...해서 이상할 일이 아니다. 위 성장급 인사이동에서 보듯 성장급 아니 그 위인 대신급은 거의 한족이지만 차관이나 차장은 일본인이다. 즉 완전식민지인 조선과는 달리 만주는 형식상 오족 특히 한족을 내세웠고 실권은 차장, 차관인 일인이 쥐고 있었다. 이는 해외공관도 마찬가지 였다.
여의문 공사는 귀국후 체포되어 1946.5.11 쿤밍성 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른바 찬일부역자, '한간'이었다. 사진에 보듯이 사형판결문 주문은 "적국과 통모하여 본국에 반역을 도모햐였기에 사형에 처한다. 죽을 때까지 공민권을 박탈하며, 유가족의 필수생활비를 제외한 전재산을 몰수한다"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처형당한 것은 1950년 10월 인민해방군의 운남성 소탕작전때였다. 성장급 이상은 사형에 처했던 '한간' 즉 친일파 처리 법규정에 따른 것이었지만, 다수 만주국 고위 관료가 국공내전때 살아 남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좀 불운(?)했던 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중국엔 친일파 문제는 없다.)
사진의 두사람과 에하라 고이치의 운명은 판이했다. 참사관으로서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놀라운 교분을 쌓았고 심지어 나치 선전상 괴벨스의 사적인 티파티에도 참석할 정도 였다. 에하라의 베를린 반호수(Wannsee)가 사저엔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하기 전까지 사실상 기식을 했고 베를린을 방문한 슈트라우스도 그 집에서 묶었을 정도다. 에하라가 없이 안익태, 에키타이가 과연 슈트라우스와 연결되었을 지는 전혀 의문이다.
아무튼 사진 속 두사람이 전범 또는 부역자로 처단된 데 반해 에하라 고이치는 나치패망후 만주국의 나머지 공사관 인원을 인솔 소련의 보호를 거쳐 일본에 무사 안착했다. 동경대 법학부를 나온 탓에 이후 그는 1969년 사망할 때까지 유력한 변호사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 그 과정에 슈트라우스와 안익태에 관한 수필을 남겼는데 곧 입수되는 대로 번역, 공개할 예정이다. 이 역시 최초 공개 아닌가 한다.
독일, 일본, 만주 3국 모두 패전국이었다. 사진에는 있을 이유가 없지만 살아 남은 자는 에키타이, 그리고 그의 스폰서 에하라였다. 에키타이 즉 안익태가 나이가 훨씬 많았던 에하라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1세기가 될 때까지 '애국자'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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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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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하라 고이치와 안익태] 드디어, 에하라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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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하라 고이치와 안익태] 드디어, 에하라가 입을 열었다. 아니 벌써 1950년에 입을 열었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허기사 안익태가 만주환상곡을 지휘한 걸 안 것도 고작 10년밖에 안되니 뭐 놀랄 일도 아니다. 아무튼 전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패전후 일본에서 이제는 어였한 중견변호사로 안익태'군'에 대해 있었던 일을 <레코드예술>이란 잡지에 기고했다. 물론 뿌듯한 표정이 곳곳에 묻어 있다. 정확한 전문 번역은 나오는 대로 읽기로 하고, 우선 내가 초벌번역한 몇 장면만 보자. 아 참, 한국 최초 개봉이다!
1) 언제 처음 만났을까?"1942년 가을, 나는 공무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 있었다. 명치절 아침 일본공사관 의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기미가요제창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청년이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보기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상이었다. 식후에 T공사로부터 그가 당시 유럽유학중인 지휘자겸 작곡가인 안익태군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안군은 당일 오후 연주회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다 하면서 나를 연주회에 초대하였다."
(내가 보기에 에하라의 연도표기는 착오이다. 다른 여러 자료를 대조해 보건대 1942년이 아니라 그 이전이다. 아무튼 이 시점에 이미 안익태는 일본외교공관에 출입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2) 그렇다면 안익태는 왜 베를린으로 가서 일인 외교관의 집에 기식하게 되었는가?"유럽에서 안은 빈에서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에게서 지휘를 지도받고, 부다페스트에서 코다이Zoltan Kodaly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유학기간이 지나간 뒤에도 미국의 어떤 노은행가로부터 송금을 받아 그럭저럭 연구를 이어나가다가, 전쟁으로 인해 송금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유럽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나에게 상담받기 위해 찾아 왔다. 안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대성시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우리의 작은 힘이라도 보탤 그런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되든 내 집으로 와라 ....'는 것으로 되어,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되었다."
(독소전이 1941년 6월 개전되는 데, 위 안을 처음 본 때가 1942년이라는 것은 에하라의 착오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안을 처음 본 시점은 1940년일 수도 있다)
3) 그러면 <만주환상곡>은 어찌 된 걸까?"안군은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보통은 접근이 힘든 노대가의 환심을 산다는 의미에서 그런 수완이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완이라기 보다 그의 천성이라 말하는 것이 낫겠다. 그 당시 안익태는 중국의 멜로디를 따고, 나의 작사부분을 곡의 말미 합창부분에 넣어 한 시간 정도의 연주가 요구되는 그런 축전곡을 만들었다. 빈에서 발표할 때에 슈트라우스 자신이 연주회장에 나와 곡의 영광된 출발을 기뻐해 주었다."
("중국의 멜로디"는 또 뭔가?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그것은 한나라때 소무의 영웅담을 찬양한 중국의 유명한 민요 '소무목양 (蘇武牧羊)'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 하면 만주국의 두번째 국가가 바로 이 소무목양의 멜로디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하라가 작사한 것이 만주축전곡의 제4악장 오족협화를 찬양한 바로 그 부분이다. 지금 우리 애국가 가사가 놓여 있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에하라는 보기 드문 음악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시인 모리케를 일어로 번역출판한 사람이다)
에하라는 자신의 동생이 안이 나온 동경국립음악원의 동문임을 들어 안'군'을 친동생으로 여겼다고 다른 글에서 밝히고 있다. 아무튼 이로써 도대체 언제 어떤 이유에서 안'군'이 에하라 고이치를 만나 그의 사택에서 기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슈트라우스와 어떻게 교분을 쌓게 되었는 지 적어도 한 쪽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다. 에하라 자신이 만주국 참사관이었음에도 이 글에서는 "변호사, 전 주독 외교관"이라 약력을 밝혀 '만주'를 의식적으로 삭제하고, 안이 작곡한 곡도 만주국이었음을 말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안이 작곡한 <만주국>에 실제 만주국의 국가에 사용된 중국민요가 포함되어 있었고, 에하라가 작사자 임을 스스로 밝혔음은 분명 새로운 사실이다.
에하라의 기억속에 안'군'은 술도 담배도 여자도 모르는 오직 하나 아는 것은 음악뿐인 그런 열심히 공부하는 '동생'으로 재현된다. 즉 식민지 지배/피지배관계는 사람좋은 에하라의 기억속에 형/동생의 관계 즉 그런 무의식으로 치환되어 있다. 하지만 피색깔까지 모든 것이 정치적인 당대 파시즘의 세계관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을 터, 오갈 데 없는 안'군'을 거저 먹여주지는 않았을 것이고 안'군' 역시 여기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일종의 거래 즉 등가교환의 법칙이 작용했을 거라는 말이다.
여전히 안'군' 구하기에 미련을 둔 <조선>은 최근 한예종의 안익태연구가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있다. “친일 여부에 대해 짧게 답해야 한다면 그[안익태]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답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해방될 줄 내가 알았나" 바로 그런 말과 질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얼마전에는 음악학자 진환주가 안을 '문화예술주의자'로 보자고 한다. 예술가는 '투사'가 아니며, 안은 우리 민요의 선율을 세계에 알렸지 않냐는 말이다. 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예술가이기 때문에 무방하다는 말일까? 아니면 유명하면 용서된다는 말일까?
최근의 친일담론은 갈수록 '뻔뻔해'지는 게 특징이다. 이런 궤변과 요설이 백주에 인쇄되어 나돌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까. 꼴보수 드골도 나치부역자들에 대해서는 기관총을 난사했고, 장개석도 '한간'에 대해서 할 만큼은 했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민족'을 갖고 오지 못한 한국의 보수와 특히 그 기독교 변종에게 안익태는 그야말로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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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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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안익태, 일본 명절에 기미가요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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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기사화했다. 전에 소개한 베를린주재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1952년 한국전쟁중에 기고한 글 말이다. 이 최초로 공개된 에하라의 글이 갖는 의미는 크게 네가지다.
1. 에하라의 기억에 의하면, 1941년 일본 4대명절인 명치절 11월 3일 아침 루마니아 일본공사관, 식순에 따른 기미가요 제창때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던 안익태 아니 에키타이를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애국가를 작곡한 사람이 하필이면 기미가요 반주를 하고 있었다니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2. 41년 6월 당시 독소전이 개전되고 일본은 다음 달 12월 진주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헝가리 일본공사관은 현지 일인들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었다. 에키타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에키타이로서는 이대로 귀국을 할 경우 자신의 미래에 보탬이 될 게 없었고, 해서 심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진주만 공습직후 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런 사정을 알리... 없는 에키타이로서 내집에 와서 있어라는 에하라참사관의 제안은 한줄이 구원의 빛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안익태 연구에서 바로 이 대목이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이제 한 쪽 진술이 나온 것이다. 즉 에키타이가 나에게 상담을 요청해 그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를 내 집에 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에키타이 쪽의 진술은 현재 없다. 이후 42년, 43년 에키타이는 커리어에 정점을 찍는다. 나치가 망할 때까지도 에키타이의 집주소는 에하라의 집 바로 거기였다. 구스타프 프라이탁가 15번지, 베를린 반호숫가 지금도 쾌적한 고급 주택가다.
3. 11월 3일 저녁 부카레스트, 자신의 음악회에 에하라 참사관을 초대한 에키타이는 <코리아환상곡>을 '우라카이', 자기 표절한 <교쿠토(극동)>를 일본 궁중아악을 변주한 <에텐라쿠>와 함께 연주해 호평을 받았다. 이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루마니아공사는 본국 즉 외무성과 아울러 조선총독부에도 보고했다. 에하라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는 1942년 9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회를 지휘했고 그 동영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오래전에 그 동영상의 일부를 유튜브에 올려 놓았다) . 이 곡은 기본적으로 <교쿠토>에 마지막 4악장 합창부를 더해 총 4악장으로 된 것이었다. 에하라는 이 곡의 마지막 4악장의 가사를 자신이 썼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가사 내용은 이미 밝혀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 중국민요의 멜로디를 따왔다고 말한다. 이 민요가 바로 만주국 국가에도 사용된 '소무목양'이다.
4. 에하라는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처럼 말한다.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를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에하라는 1942년 3월 14일 저녁 지금도 영업중인 비엔나의 유명한 레스토랑 <드라이 후사렌(Drei Husaren: 3인의 기사들)> 별실에서 슈트라우스 부부와 에키타이 이렇게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42년 6월 슈트라우스의 첫 오페라 <군트람>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베를린 방문시 자신의 집에 머물것을 제안했고 슈트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열흘 가까이 에하라의 집에 머무는 동안 슈트라우스는 생일을 맞았다. 그런데 극소수의 사람이 에하라의 집 생일축하파티에 초대되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나치 선전성 음악담당 국장(에라하는 부장이라고 했다) 하인츠 티에첸Heinz Tietjen이었다. 티에첸은 나치독일의 음악정책을 총괄하는 실세중 실세였다. 아무튼 에하라참사관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아니라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를 연결해 준 '수완'을 발휘했다고 했지만, 에하라집에 기식하는 동안 슈트라우와 더욱 가까웠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에하라의 글로 인해 가리워져 있던 에키타이에 관련된 디테일이 보다 또렸해졌다. 하얼빈 세관장과 부시장을 지낸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동경제대 법학부 출신의 그가 그저 에키타이가 '동생'같고 그의 '대성'을 바라는 마음에서 자기 집에 머물게 했다고 믿는 다면 글쎄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얘기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일본은 당시 전쟁중이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에하라는 대단한 음악애호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본 아니 만주국의 고위외교관이었다. 아무런 정치적 목적없이 에키타이의 뒤를 바줄 수는 없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반면 에키타이로서는 본국송환을 모면케 해주고, 밥도 주고, 살 집도 주고, 돈도 벌게 해주고, 유명하게 해주고, 또 슈트라우스와 친하게 만들어 주고 혜택으로 보자면 이만 저만 남는 장사가 아니다. 그런 에하라에게 <코리아판타지>를 우라카이한 <만주국> 하나 만들어 주는 거야 인간의 정리상 마땅한 도리라 하겠다. 흔히 안익태의 애국가를 임시정부가 그 사용을 허가해 줬다고 애써 그 정통성을 찾는다. 그런데 바로 그 임시정부가 에키타이가 에하라의 집에 얹혀 살기 시작한 바로 그 즈음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임시정부로 보자면 안익태는 도무지 어쩔 수 없을 정도의 반역행위를 한 셈이다.
관련기사 링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310600015&code=960201&nv=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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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익태 애국가
- 왜 문제인가?
- 안익태는 누구인가?
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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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군의 편모(片貌) by 에하라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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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글은 일본 잡지 <레코드예술> 1952년에 실린 에하라 고이치의 글이다. 이미 TV, 라디오를 비롯 대부분의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에 따로 소개는 하지 않겠다. 원래는 나의 상세각주가 붙어 있었는데 편집과정에서 다 빠졌다. 여기에 원래 언론사에 보냈던 데로 각주를 되살려 다시 싣는다. 그리고 페북이 각주를 지원하지 않아, 혹은 내가 그 기능을 몰라 (* .... )식으로 내주 방식으로 달았다. 양도 많고 좀 보기에 불편이 있겠지만 양해를 바란다. 그리고 에하라가 기고한 <슈트라우스의 추억>이라는 또 한편의 글도 번역해 올 릴 예정이다.
안익태군의 편모(片貌) - 에하라 고이치
"1942년 가을 (*1942년이라는 연도는 에하라의 착오다. 이 글의 뒷 부분에서도 나오듯 “독소전이 개시되는 해”부터 베를린에서 같이 살았다고 되어 있듯이, 독소전은 1941년 6월이다. 더욱이 허영한이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안익태가 부카레스트에서 두 번째 연주회를 가진 날은 1941년 11월 2일이다. 명치절이 11월 3일이지만 시차를 감안하면 하루 당겨 11월 2일이 현지 시간으로 명치절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에라하는 이 날 안익태가 에텐라쿠(월천악)과 베토벤 교약곡 6번을 연주했다고 하나,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로시니 <세미라미데서곡>, 바흐 <토카타와 푸가 C 장조>, <에텐라쿠> 그리고 후반부에는 안익태 작곡의 <먼 동양에서>를 연주했다고 되어 있다. 바로 이 <먼 동양에서>가 <코리아환상곡>의 또 하나의 이름 <교쿠토(極東)>이다. 그런데 왜 에하라가 그 날 안익태가 베토벤 6번 전원교향곡을 지휘한 걸로 기억했는 지 알 수 없으나, 추측건대 그날 곡 해설에 ‘전주곡’, ’‘전원’, ’춤’ 이렇게 3악장으로 되어 있어 이런 착오가 발생했지 않을 까 한다.), 나는 공무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 있었다. 명치절 (*일본의 이른바 4대명절중 하나. 1월 1일, 기원절, 천장절, 명치절로서 11월 3일이다.) 아침 일본공사관 의식에 참석했다, 그곳에 기미가요 제창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흰 넥타이를 맨 청년이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보기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상이었다. 식후에 T공사 (* 당시 루마니아(羅國)주재 쓰쓰이 키요시(筒井潔) 공사를 말한다. 쓰쓰이는 이 날 연주회 후 본국과 조선총독부에 연주회가 성공적이었음을 알리는 보고서를 보낸다. 이 문서는 지금도 남아 있다)
로부터 그가 당시 유럽 유학중인 지휘자 겸 작곡가 안익태군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안군은 당일 오후 연주회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다 하면서 나를 연주회에 초대하였다. 다행히 휴일이었고 (*1941년 11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특별히 예정된 것도 없었으며 연주회장도 내 숙소에서 코에 닿을 거리인 왕립음악당이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음악당은 만원이었다. 곡목은 자작곡인 월천악 (*에켄라쿠(월천악)는 일본의 대표적인 궁중아악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전시 일본수상의 동생이자 일본귀족이었던 고노에 히데마루와 에키타이 안의 에텐라쿠 두가지 버전이 연주되었다. 두 버전을 비교해 들어 보면 전자가 좀 더 정적이고 원래 테마에 충실하다면, 에키타이의 그것은 좀 더 동적이고 화려해 대중들에게 좀 더 어필할 수 있었다. 에키타이가 당시 이 에텐라쿠를 지휘하는 장면은 유튜브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과 베토벤 교향곡 6번이었다. (* 위 각주 1)을 참조)
조선에서 태어난 안군이 월천악을 교향곡화한 것에 대해 약간 기이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조선의 궁정에 다수의 아악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들보다 아악에 대해 친밀하고 깊이 있게 알고 있지 않을 까하는 등의 소박한 상상을 했지만, 특히 나로선 극동의 한 음악생도가 얼마나 큰 성공을 했는지를 지켜 보는 것도 흥미로웠기에, 나는 정해진 시각에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첫번째 아악의 테마가 반복되는 사이 기대치 못했던 배리에이션이 나타났고, 기교 넘치는 타악기 구사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흠…’하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교향시는 우아한 월천악의 멜로디에 조선의 궁정악을 더하여 극적인 효과를 내며 내 가슴을 울렸다.
연주가 끝나고 내가 물품보관소 옷장에서 외투를 받아 들려 하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루마니아인 부인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 음악은 어떻던가요? 저 동양의 멜로디! 그 동양의 테크닉!..” 감탄하더니, 이내 스스로 놀라며, “죄송해요. 제가 감격해서 그만… 무의식 중에 지휘자와 같은 나라 사람인줄 알았어요. 근데, 정말 근사한 공연이었어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저도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만, 실로 유쾌했습니다” 라고 맞장구 쳤다. 그러자 부인은 “그래요. 베토벤 연주도 물론 꽤나 대단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베토벤 곡은 많이 들어봤기에, 아무래도 둔감해진 측면이 적지 않아요…. 그러나 극동의 음악은… 어떻게 이렇게나 근사할 수 있죠! 맞아요. 이렇게나 감격한 사람은 저뿐만이 아닐 거에요. 오늘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이 그럴 거에요. 정말 좋은 음악회였어요!”
문밖으로 나서자, 광장 멀리 왕궁의 지붕 끝에 남국의 석양이 남아 있었다. 넓은 포장도로를 걸으며, 마음속으로 나도 모르게 “오늘은 정말이지 경축일일세”를 연신 반복하고 있었다.
안군은 국립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고학하는 사이, (*필라델피아 콩쿨에 입선하여 안익태가 필라델피아 필하모니 콩쿨에 입선해서 유럽 유학하게 되었다는 것은 확인이 필요하다) 유럽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유럽에서 안군은 빈에서 바인가르트너 Felix Weingartner에게서 지휘를 지도받고, 부다페스트에서 코다이Zoltan Kodaly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유학기간이 지나간 뒤에도 미국의 어떤 노은행가로부터 송금을 받아 (*이 또한 확인이 안되는 말이다. 왜냐 하면 온갖 허구와 미사여구로 가득한 김경래의 안익태 전기에도 이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럭저럭 연구를 이어나가다가, 전쟁으로 인해 송금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유럽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안군은 나에게 상담을 받고자 찾아 왔다. 안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대성시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우리의 작은 힘이라도 보탤 그런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되든 내 집에 오면 ....’, 하는 것으로 되어,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안군은 참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음악회와 오페라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는 담배도, 술도 하지 않았으며, 여성과의 교제도 삼가고, 먹고 자는 것 빼고는 오로지 음악에 빠져 생활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작곡을 시도했다. 당시, 내가 뫼리케 (*Eduard Friedrich Mörike(1804.9.8 -1875. 6.4) 독일 서정시인. 그의 시를 최초로 일어로 번역한 사람이 에하라 고이치다.)의 시를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는 여기에 음을 붙여 작곡하였다.- ‘풍주금’과 ‘4월의 노란나비’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완성하자, 우에노 (일본 동경의 지명)에 살던 마리아 토르씨에게 노래를 부탁했다.
우하라 재유再遊’를 교향시로 만들고 싶다고도 말했지만, 이는 나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본래 첼리스트였기에 첼로 독주곡 ‘흰백합화’ 등을 자작, 자연하기도 했다.
안군은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범접하기 어려운 노대가의 환심을 산 그의 수완에 우리들도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수완이라기 보다 그의 천성이자 타고난 능력이라 말하는 것이 낫겠다. 그 당시 그는 중국의 멜로디를 따,(* "중국의 멜로디"는 또 뭔가?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그것은 한나라때 소무의 영웅담을 찬양한 중국의 유명한 민요 '소무목양 (蘇武牧羊)'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 하면 만주국의 두번째 국가가 바로 이 ‘소무목양’의 멜로디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하라가 작사한 것이 만주축전곡의 제4악장 오족협화를 찬양한 바로 그 부분이다. 지금 우리 애국가 가사가 놓여 있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에하라는 보기 드문 음악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시인 뫼리케를 일어로 번역출판한 사람이다) 나의 작사부분을 곡 말미 합창부분에 넣어 한 시간 정도의 연주가 요구되는 그런 축전곡을 만들었다. 빈에서 이를 발표할 때를 (*슈트라우스는 자신이 작곡한 황기 2,600년을 봉축하기 위한 <일본축전곡>을 안익태가 지휘한 42년 3월 12일자 빈의 연주회와 1년 뒤인 43년 2월 11일 연주회에 참석했다) 비롯해, 그 밖의 안군의 연주회장에도 슈트라우스 자신이 직접 그의 연주회장에 참석해 곡의 영광된 출발을 기뻐해 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근무처로 전화 벨이 울렸다. 베를린 필하모니의 매니저였다. (*실제 1943년 5월 3일자 베를린 필하모니 총감독 게르하르트 폰 베스터만Gerhart von Westerman은 베를린 일독협회에 보낸 편지에서 고노에백작보다 에키타이 안을 여름시즌에 출연시킬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다. 에키타이안은 1943년 8월 18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를린 필하모니의 비정규 시즌 지휘를 맡았다)
“신인 소개 차원에서 안군에게 지휘를 맡기고 싶은데요, 안군은 어떻게 생각할까요?”라는 이야기였다. 안군의 소원이 실현될 때가 도래한 셈이었다. 몇 일 전 한 모임 자리에서 이 사람이 “과거에는 돈을 내면 (*실제 고노에 히데마로는 1920년대 자신이 비용을 내고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한 적이 있다) 필하모니에서 지휘도 할 수 있었지만 현재로선 그것도 힘들어졌어요. 회(會) (*여기서 ‘회’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정황으로 보건대 독일협회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일 가능성이 높다)쪽에서 바로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에게 의뢰하는 길만이 유일하니 더욱 어려워졌죠.”라는 이야기를 한 직후였기에 다소 의외였다. 안군이 때마침 부다페스트로 연주여행을 떠나 있었던 터라 내가 있는 이 곳에 연락이 온 것이기에 조속히 연락을 취해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는 베를린 외에도 함부르크, 빈, 로마, 파리, 부다페스트, 부카레스트와 같은 유럽 각지에서 지휘봉을 흔들었다. 1944년에는 파리의 팔레 샤이요에서 3일간 베에토벤축제를 시도했다. 첫째 날은 티보Jacques Thibaud와 바이올린협주곡을, 둘째 날은 코르토(Alfred Cortot)와 황제 협주곡을, 그리고 셋째 날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하여 이를 성황리에 마쳤다. (*파리의 에펠탑앞에 위치한 Palais de Chaillot은 나치 점령기 베토벤축제의 무대였다. 나치 점령하 파리에서는 독일의 ‘문화적’ 우월을 과시하기 위해 나치선전성이 주도하는 수많은 연주회가 개최되었다. 피아니스 빌헬름 켐프, 발터 기제킹이 단골로 출연했고, 자크 티보나 알프레도 코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키타이 안은 티보와 1944년 4월 14일에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을, 4월 18일에는 코르토와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를 협연했다. 그리고 4월 21일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지휘했다)
그 후, 그는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가서 베를린 이 함락되는 날까지 나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에하라는 베를린 함락이후 만주국 공사관의 인원을 인솔 모스크바를 거쳐 일본으로 귀국, 변호사로 활동했다)
학도와 같은 순진함,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그 희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멈추지 않은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는 그가 가는 앞에는 어떠한 장애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그는 지금도 여전히 유럽천지를 종횡으로 활보하고 있다.
(변호사 전 주독외교관) (*에하라는 만주국의 주독 베를린 공사관 참사관이었다. 당시 공사는 여의문(뤼이웬)이었고, 그는 참사관이었지만 사실상의 실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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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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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키타이 안과 에하라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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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언론에 공개된 에하라 고이치의 다른 글이다.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기에 제자 이유철의 도움을 받아 전문번역했다. 안익태에 대한 글보다 좀 빠른 1950년 쓴 글이다. 서양고전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아주 아주 재미난 글인데, 대개는 그렇지 않을 거다.
양이 꽤 되고, 아주 오래된 글인데다, 당시의 가타가나로 표기된 인명과 지명을 일일이 찾아서 복원시켰다. 거의 암호해독 수준이어서 시간도 많이 걸렸고 품도 꽤 많이 들였다.
안익태는 1941년 11월 이후 에하라와 동거하면서 본격적인 친일이력의 정점을 찍는다. 에키타이는 1942년 3월 12일 빈에서 슈트라우스의 <일본축전곡>을 지휘했고, 슈트라우스는 호평을 해 주었다. 그 이틀 뒤 3월 14일 저녁 <드라이후사렌> (세명의 기사)라는 빈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슈트라우스 부부와 저녁을 먹는다. 물론 에하라가 밥값은 지불했을 거다. 그리고 흔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에하라가 슈트라우스와 에키타이를 중개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에하라의 말은 아주 재밋다.
슈트라우스의 생일을 영광스럽게도 자신의 집에서 모신 에하라와 에키타이 안의 기쁨이야 말할 수 없을 게다. 이런 저런 정황에서 보건대 에키타이는 이 기회를 최대 활용했다. 특히 그 날 파티석상에는 하인츠 드레베스라는 나치 음악정책의 총책이 왔다. 그리고 에키타이는 다른 때 에하라와 함께 슈트라우스의 사저에서 전설의 피아니스트 에밀 폰 자우어도 만난다. 놀라운일이다.
참 슈트라우스한테 에키타이는 공짜로 배웠다고 이 글에서는 말한다. 대략 1942-43년간 에키타이 안의 유럽내 활동에 있어, 이미 알려진 나치 선전기구의 일종인 <일독협회>는 말할 것도 없고, 슈트라우스를 필두로, 괴벨스, 드레베스 선전성 음악국장, 티에첸 베를린 국립오페라 총감독등 나치 수뇌부와 그 총애를 받았던 인물들도 중요한 배경을 이룬다.)
* 는 내가 추가한 주석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옹(翁)과의 추억>
6척이 넘는 키, 살집이 좋은 거구에, 백발이 무성한 동안에다, 전체적인 선은 두껍지만 부드럽고, 장년기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날카로움은 보이지 않으며, 조용해 보이는 움직임과 낮은 목소리는 온화하다. 이것이 만년의 옹의 풍모였다.
내가 처음 옹의 작품을 접한 것은 다이쇼 (1912-1926) 7, 8년경으로, ‘살로메 댄스’, ‘죽음과 정화’, ‘틸 오이겐슈피겔’ 등을 듣고 – 물론 레코드음반을 통해서 였지만 - 그 참신하고, 종횡으로 누비는 작풍과 화려한 음색에 반하고 말았다. 당시 독일에서 미국을 돌아 귀국한 야마다 코우사쿠 씨로부터 옹의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옹의 예술에 대해 깊은 경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음악에 관해서는 단순한 애호가에 불과해, 소위 문외한인 내가, 뒷날 옹의 인정을 받은 것이 나의 7년간의 유럽생활 중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하나가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친아들보다 나이차가 많은 아득한 타향의 나그네, 게다가 직접적으로 음악과는 관계가 없는 나와 이 거장을 맺어 준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른다. 아마 옹의 동심과 여기에 감응한 나의 영혼이 부지불식간에 서로를 끌어당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옹과 만나게 된 그 인연은 친구 안익태군이 만들어 낸 것이다. 안군은 국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필라델피아 필하모니의 콩쿠르에 입선 유럽 유학의 기회를 얻어, 당시 아직 빈에 살던 펠릭스 바인가르트너 (F. Weingartner)와 부다페스트의 졸탄 코다이에게 지휘와 작곡을 배웠지만, 내가 그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옹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있었다. 안군은 또한 나의 동생과 같은 시기 국립 음악원을 졸업한 사람이라, 나는 그를 동생처럼 생각하며 가깝게 지냈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빈을 여행할 기회를 이용해 옹을 식사에 초대했다. 옹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고, 부인을 동반하고 시내 일류 레스토랑 <드라이 후사렌 (Drei Husaren)*> (*30년 개업한 빈의 고급레스토랑으로 현재도 영업중이다)의 별실에서 그를 만났다. 변변찮은 모임이었지만 오히려 분위기는 격의가 없었다. 부인은 스위스 태생으로 그녀의 부친은 군인이었다. 상당한 수완가로 생각한 건 서슴지 않고 말하고 해치워 버리는 성격이었다.
“베를린은 최근 간간이 공습이 있는데, 어떻게 그 곳에 살고 있는지요” 부인은 나를 향해 이런 분위기로 말을 걸었다. 그녀의 말투는 아름답고, 예의 바랐다. “베를린도 상당히 좋은 곳입니다. 공습은 이렇다 할 정도로 특별한 정도는 아닙니다.”고 답하자, “저는 영국인은 신사적이어서 매우 좋아합니다. 프랑스인은 세련되어 가깝게 지내기 좋죠.”라며 내 얼굴을 보고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맞아요, 일본인은 예의 바르고”라고 덧붙이며, “그러나, 독일인은 매우 싫어합니다. 특히, 베를린 사람이라면….” 그녀의 말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그녀의 베를린 기피는 꽤 유명하다. 옹이 베를린에 여행한다고 하면, 부인은 결코 함께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공습에서 전쟁 이야기로 이어지자, 옹은 “전쟁은 하루라도 빨리 막아야만 합니다. 아시아에서도 전쟁을 하고 있는 듯한데, 전쟁은 백해하고, 어떠한 이익도 없을뿐더러 인간의 부끄러움이며, 타락이고 파괴일 뿐입니다. 저는 얼마나 많은 인간이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모르겠소. 전쟁만은 즉각 멈추게 해야만 합니다!”라며 꽤나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말에는 일반적인 예술가를 뛰어 넘는 그런 열정이 담겨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다른 곳에서 옹의 모습을 본적이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그가 선전성 장관 괴벨스가 주최한 차 마시는 자리에 부인과 동반한 자리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괴벨스와 이태리 대사가 유태인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둘의 논전이 흥미로워 나는 이들 사이에 끼어 엿듣고 있었는데, 그 사이 옹은 아무도 모르게 황급히 떠났다. 옆 자리의 자이델 박사와 함께 나는 옹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옹의 지휘를 처음 들은 건 1939년 4월 베를린의 국립가극장에서였다. 파리 오페라좌의 유명가수 제르멘 뤼벵 (Germaine Lubin, 1890 – 1979)이 ‘아드리아네’를 비롯하여 ‘아라벨라’의 주역을 맡게 되어 수 년 만에 옹 자신이 지휘대에 섰다. 이틀 밤 모두 대성공이었던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에 옹과 뤼벵을 비롯해 총감독 티에첸 (*Heinz Tietjen 1881 – 1967 나치시절 베를린국립오페라 총감독 히틀러를 비롯 괴링과도 친분이 있었다)은 몇 번이고 다시 무대위로 올라가야 했다.
베를린의 국립가극장에서는 그 후 매 시즌 마지막에는 항상 슈트라우스 주간을 개최했다. 덕분에 나는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베를린에서 옹이 만든 가극의 대부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빈, 뮌헨, 잘츠부르크 등에서 들었던 것을 합치면 옹 작품의 거의 전부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43년 6월에는 베를린에서 옹의 초기 작품 ‘군트람’을 상연하게 되었다. 이 가극은 어떠한 사정 때문인지, 초연 이후 무대에 올리는 것을 옹이 원치 않았는데, 가르미슈의 옹 별장에는 ‘군트람’의 묘비가 있는 인연도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따라서 이번 공연이 초연이래 몇 십 년 만의 무대이기에, 가극동호인들 사이에는 즉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옹도 특별히 본인자신이 연습과 예행연습까지 참가했다. 그 때 나는 이미 옹과 가까워져 있었던 터라, 사전에 베를린 나의 집에 머물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옹은 수행원을 데리고 그루네발트(*베를린의 행정구역, 반 호숫가에 있다)의 나의 집에 약 열흘간 유숙했다. 이러한 연유에서 나는 옹에게 초대받아 함께 예행연습을 비롯해 공연에 참석하였다.
당시 주연은 테너의 프란츠 휄커 (Franz Voelker)와 소프라노의 힐데 쉐판 (Hilde Scheppan 1907– 1970)이었다. 쉐판은 당시 궁정가수작위(Kammersaengerin)를 아직 받지 못했지만, 특별히 발탁되어 주연을 맡게 되었다. 그 데뷔는 매우 훌륭했기에 옹도 만족하고, 그녀를 발탁한 티에첸 총감독도 득의만면했다.
그 체류 기간중, 옹은 79세 생일 (6월 11일)을 맞았다. 옹이 나의 집에 머물고 있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밖에 모르고 있었지만, 그 날은 아침부터 많은 꽃들이 배달되어 나의 집은 현관부터 거실, 식당, 침실까지 온통 화려한 꽃으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평소에는 옹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방문객을 돌려보내곤 했었지만, 이 날은 특별한 기회라 베를린에 있는 음악관계자 십 여명을 초대하여 작은 파티를 열었다. 참석자 중에는 티에첸 총감독, 선전성의 드레베스 음악부장 (*Heinz Drewes 1903-1980 선전성 10국 음악국 국장, 나치시대 음악에 관한 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실세) 등도 있었다.
그 직전에는 이태리 ‘스칼라좌’ 여가수의 초청공연이 국립가극장에서 열려 ‘살로메’가 상연되었다. 국립가극장의 건물은 당시 공습 때문에 타버려 수리 중이었기에, ‘군트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티어가르텐의 크롤오퍼 (Krolloper)로 임시 이전하여 상연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빈 또는 다른 곳에서 여러 차례 ‘살로메’를 들었지만, 사전평가도 대단했고 처음에 이 이태리 여배우의 연기가 살로메의 이국적인 기분에 딱 들어 맞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공연 중 3번이나 이것을 들으러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회를 거듭할수록 내 감흥은 희미해져만 갔다. 생일파티 석상에서 내가 그런 말을 내뱉자, 옹은 “이태리사람에게 내 가극을 부르게 하는 건 무립니다. 독일사람만큼 음역이 넓지 않기 때문입니다. 음역대에 있어서 만큼은 러시아사람입니다. 러시아사람에게는 독일사람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추운 나라의 음역대는 광대합니다. 그러나 노래는 결국은 마음 (Herz)입니다”하면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린 후, 자리에 있던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 교수를 뒤돌아보며 “이것이 나의 예언자 (Prophet)입니다”라며, 다시 그 옆에 앉아 있던 크라우스의 부인이자 명배우 비오리카 우르술레악(Violica Ursuleac)를 가르키며 “마음! 마음!”이라며 반복했다.
옹은 이태리인에게는 별로 감복하지 않아 보였다. 또 다른 경우였지만, 나는 뮌헨 국립가극장의 총감독 하르트만 교수와 ‘나비부인’ 연출에 있어, 일본인이 보았을 때 드는 부자연스러운 점을 지적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르트만 교수는 “그 점에 대해서는 그라프 고노에 (고노에 히데마로백작 近衛伯, 독일에서는 고노에씨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로부터도 주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고노에씨에게 부탁해서 일본에서 의상 등을 가져오고자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등등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자, 옹은 옆에서 “이태리인은 일본에 대해 알 수 없지”라며 일축했다. 천하의 푸치니도 옹을 만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단, 독일에서 가장 많이 상영되는 가극은 ‘나비부인’과 ‘라 보엠’이기 때문에 그 인기는 대단했으며, 푸치니 때문에 죽고 사는 이들도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내가 빈에 머물고 있을 때, 옹으로부터 차나 한 잔 하러 오라는 전갈이 왔다. 옹의 저택은 일본총영사관 근처에 있었으며, 넓은 정원을 갖춘 굉장한 저택이었다. 대문에서 시작하는 완만한 경사를 오르면 현관에 다다르는 구조였다. 응접실은 조도가 모두 어두운 것들로 되어 있어 차분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는 동서의 수많은 골동품이 진열되어 있어 옹의 취미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합석한 손님은 리스트의 수제자로 당시 살아있던 유일한 한 사람인 에밀 폰 자우어 (Emil von Sauer)교수였다. 일찍이 쿠노 히사코 여사가 가르침을 받고 싶었지만, 이를 허락 받지 못해 비관끝에 하숙집 2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애화를 남긴 당사자다. 앞서 말했다시피 슈트라우스는 당당한 체구인데 반해, 자우어 교수는 왜소했다. 연령은 자우어교수 쪽이 두세살 위였다. 그러나 여전히 기력이 정정해서, 최근 젊은 여제자와 결혼하여 아기가 태어난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결코 인기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그의 말년은 오히려 불우했다. 그 밖에 역사를 전공한 모 교수와 안익태 군이 있었다. 그 날은 집사가 모습을 비추지 않고, 가정부가 대신 나오고 슈트라우스 부인이 전담하여 우리를 접대했다.
노인이 모이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회고적이 된다. 슈트라우스는 그의 초기 작품을 바그너에게 보여줬던 때를 회상하며, 바그너가 그의 작품을 쳐다보지도 않고 책상 서랍에 쳐넣어 버린 것에 대해 분통해하며 이야기를 하자, 자우어는 다시 리스트 문하에 있었던 당시의 이야기 회상하며 손짓 몸짓으로 이를 열심히 설명했다. 볼을 부풀리며 새빨간 얼굴을 하고는 끝내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는 결말. 내게 더 음악의 소양이 있고, 장래에 추억을 쓰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다면 모든 모임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이끌어 내었을 터인데 지금에서야 아쉬운 생각이 든다.
자우어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 중 젊은 부인과 아기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떠났으며, 슈트라우스도 작년 가르미슈의 별장에서 영면해 이러한 기회를 다시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영원히 잃고 말았다.
1944년 7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는 옹의 80세 축하의 의미에서 그 신작가극, ‘다나에’가 초연되었다. 때가 때이니 만큼, 북부 프랑스에서는 영미의 상륙작전이 결행되었고, 국내에서는 히틀러 암살 음모가 폭발한다. 전쟁도 정치도 모두 쉽지 않은 형세를 취하고 있었기에 음악제는 중지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모처럼의 기획이었기에, 초연은 총 예행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특별히 안내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만 상영되었다. 나는 독일에 체류 중 매년 바이로이트와 잘츠부르크의 음악제에는 참석해왔으나, 이 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럽의 형세가 몹시 긴박했기에 출석을 단념하고 있을 때, 옹으로부터 자축하는 의미에서 초대를 받아, 이후 작정하고 옹이 있는 잘츠부르크에서 몇 일을 머물렀다. 나는 옹과 함께 무대 가까운 정면에 위치한 특별석에서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할 수 있었다. 지휘는 클레멘스 크라우스, 주연은 그 부인 우르술레악이었고, 그리스신화에서 가져온 3막으로 구성된, 옹의 작품으로는 대작에 속한다. 그 전년도에 초연된 ‘카프리치오’ 보다 전에 작곡되었지만 초연이 늦어진 이유이다.
‘카프리치오’는 현대의 파리를 배경으로 한 1막으로 구성된 가극으로 초연은 뮌헨 국립가극장에서 이루어졌다. 음악은 현악6중주가 끌어가는 것인데, 옹 만년의 고담한 맛을 보여주는 특이한 작품이다. 연출은 ‘다나에’’와 마찬가지로 하르트만 교수였다. 이것들에 더해 교향악시 ‘도메스티카’의 신작 발표가 있다는 등, 옹은 나이가 들어 창작욕이 더욱 왕성해지고 그 예술은 경지에 달한 감이 있다.
슈트라우스가 돈에 물들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벌써 30년도 전에 일로, 당시 한번 지휘수당으로 천 마르크를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옹 자신은 돈에 대해서는 화끈했다. 지금 안군 같은 경우에도 한 푼의 사례도 하지 않고 있다. 황기 2600년 일본축전악 작곡에 대해서도 돈을 거절하고 문화훈장과 같은 것을 갖고 싶어했다. 훈장 수여가 허락되지 않았기에 이에 대해 약간은 서운해 하는 것 같았으나, 나는 옹의 입에서 이 일에 관한 단 한마디 불만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옹은 허식을 싫어했다. 많은 음악가가 교수라 불리고 싶어했지만, 옹은 일생을 박사로 일관했다. 일본에서 특히 박사는 유난히 그렇지만, 베를린에서는 이는 흘려 듣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는 박사라고 부르는 것보다 마이스터로 부르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이는 옹의 마음에 맞는 것은 아닌 듯해 보였다.
옹은 과도하게 예의 바른 사람으로, 편지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썼다. 그 글씨 또한 아름다웠다. 따라서 옹이 손수 그린 악보 자체가 훌륭한 예술품이다. 나는 옹으로부터 ‘황기 2600년 봉축 일본축전곡’과 앞서 말한 ‘카프리치오’의 스케치북을 받았는데, 그 때 마다 ‘보잘것없습니다만, 기념으로 받아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라고 물었으며, 나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을 기다리고 증정의 시를 써넣는 등, 겸양을 지니고 있었다.
옹의 취미는 스커트라는 트럼프 놀이었다. 옹이 음악을 하지 않을 때는 스커트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3명이서 하는 카드놀이이기 때문에 상대가 중요하다. 여기에는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다니듯 옹이 가는 곳에서는 그곳이 어디든 반드시 쫓아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두명 모두 60을 넘은 노인이지만 처음부터 옹의 숭배자이다. 옹이 나의 집에 머물자, 2명이 함께 나의 집에 나타난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면 놀이를 중단하고 각자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좋아하는 놀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밤을 새는 일은 없었다.
옹은 식사 등도 매우 양이 적어 아침은 커피 한 잔에 빵 한 조각. 술과 담배도 하지 않았다. 그 고령에 명민한 두뇌, 넘치는 정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러한 절제된 생활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옹의 집에서는 3대를 연속해서 리하르트로 부르고 있다. 영식도 리하르트, 영손도 리하르트. 가내에서 리하르트로 불리는 것은 손자로 옹은 모두로부터 파파, 파파로 불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단순히 가정 내에서 그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일뿐만 아니라 실로 근대 음악계의 위대한 파파였다. (<레코드예술>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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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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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돈 내고 들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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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오랫동안 진실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허나 이런 기사를 만나면 아무리 팩트를 외쳐댄들 들을 귀가 없으면 별무 소용임을 알게 된다. 허나 다시 한 번 또 외쳐야겠다. 안익태 <애/국/가>/는/국/가/가/ 아/니/다! 그래서 이 곡의 제창을 강요할 법적 근거는 없다. 또한 불러야할 의무도 없다. 애국가 4절 외우라고 요구하는 건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다.
그럼 지금 안익태 작 애국가는 도대체 뭔가? 요컨대 1936년 경 미국에서 작곡되어 교민 사회 일각에서 불리다, 이승만계 대한인국민회가 1942년 임시정부에 사용허가를 신청, 허가를 득한다. 임시정부로선 이를 국가로 승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 국내에 처음 소개된 때는 해방직후인 1945.12.16 -17 이화여고 동창회가 주최한 독립축전 음악대회에서다. 대회 수입은 38선 이북 곧 서북출신 학생 학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후 안익태 애국가는 주로 이승만계, 기독계, 이북출신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적 의미에서 국가였던 적은 없었다.
안익태 본인도 자신의 곡이 비공식 국가처럼 불리고 있는 사실을 알 지 못했다. 그는 1955년 이승만 80회 생일에 맞춰 귀국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스페인으로 도피중 그때까지의 "만주"환상곡을 이보해 다시 "코리아"환상곡으로 우라까이(자기표절)해 스페인에서 또 "초연"한 그 악보를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안익태는 1960년 4.19혁명 직전이자 3.15부정선거 직후였던 이승만의 85회 생일에 다시 한국에 와 축하공연을 했다. 그리고 나서 5.16쿠데타 직후에는 박정희를 방문한다.
안익태의 친일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없다. 친독재도 뭐 아니라 하기 어렵다. 그가 만든 애국가 선율 역시 대동아 음악성전을 위해, 나치독일의 승리를 위해 심하게 혹사당했다. 바로 그 애국가가 이후 부마, 광주항쟁때도 또 6월항쟁때도 불리웠다. 물론 이 당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애국적" 집단 정체성이었지 안익태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안익태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그 이유 때문에 수십년 동안 우리 모두가 그에게 저작료를 냈던 것이다. 이 멜로디가 한 때 대일본제국, 만주국 그리고 어떤 때는 제3제국의 이익을 위해 울렸음에도말이다. 이 희비극을 어쩔건가...
관련기사 링크 :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oid=022&aid=0003015270&sid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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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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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선물을 달고 있는 안익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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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키타이 안] 1938년 2월 20일 '애국가'선율이 포함된 <코리아환타지>가 더블린 Gaiety Theatre에서 초연되었다. 아래는 그 극장의 현재 모습이다. 이 때까지 안익태의 영문이름은 Eak Tai Ahn이지 에키타이안이 아니었다. 우리 나이로 33세 당시의 안익태다. 이 멋진 극장에서 연주된 환상곡의 4악장에 애국가의 선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요일 공연을 앞두고 더블린에 도착한 안익태를 현지 The Irish Times에서 인터뷰한 기사다. 38년 2월 15일이었다. 오래전 영국유학중인 나으 제자이자 학문의 도반인 유철군에게 부탁해 두었던 것을 이제 받아 보았다. 이 내용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자가 어떻게 알아 들었는지 모르지만, 인터뷰기사의 내용은 뭐라 할까 좀 괴이하다. 아래 그 인터뷰 내용을 보자. "금세기 초 러일전쟁직후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지위를 상실하고 일본의 지배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일하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의견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우두머리가 왕자 리(Prince Li)다. 그는 2,000년 동안 이 나라를 통치한 황가 혈통의 계승자다. 이 들 민족주의자 상당수는 정치범으로 감옥에 있으며 온 나라가 자신들의 자유를 되찾아 줄 동방에서의 사태 전개를 기다리고 있다."
때는 1930년대 바야흐르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유럽 또한 세계 전쟁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애국가 세계초연의 현장에서 뜬금없이 등장한, 2,000년 황실 혈통의 적통자 "왕자 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오락가락하지만 안익태가 1938년 이 시점까지 낮은 수준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갖고 있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왕자 리"가 누군가. 평소 이승만은 자신을 왕가의 후손이라고 떠들고 다녔고, 또 스스로 왕노릇을 했다. 그렇다면 "왕자 리"가 바로 이승만?
1955년 이승만 탄신 80주년을 맞아 애국자로 둔갑해 귀국한 안익태에게 이승만은 문화훈장 1호를 선물했고, 안익태는 코리아환타지 자필 악보를 이 '민족의 영도자'에게 헌정했다. 사진은 이승만의 선물을 가슴에 달고 지휘하고 있는 안익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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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익태 애국가
- 왜 문제인가?
- 안익태는 누구인가?
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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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축전곡'을 지휘했던 에키타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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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하고 있는 안익태 <한국환상곡> LP판, 1961년 LA필하모니 버전이다. 오래전 서라벌레코드사에서 찍었다. 작곡자 자신이 해석하고, 연주도 LA필 정도 되니 음악적으론 꽤나 가치 있다고 볼 만하다.
판의 뒷면을 보면 1942년 베를린 필과 <코리아> 즉 이 곡 <코리아환상곡>을 지휘했고 또 슈트라우스 페스티벌에서 지휘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이런 식이다. 사실은 날조되고 철저하게 은폐된 채, 진실은 사라지고 허구만 살아 있다. 직전 포스팅한 영상에서 똑똑히 볼 수 있듯, 전쟁중 그것도 나치 심장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주독 일본대사와 만주국 고위층을 모신 자리에서 "대한사람 대한으로 우리 나라 만세"를 합창했다는 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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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 페스티벌에서 지휘한 것은 슈트라우스가 일본 황기 2,600년을 기념해 작곡한 <일본축전곡>이었다. 허기사 그런 슈트라우스 출생 150주년을 맞아 작년 우리 KBS가 기념 연주회를 했으니 아직도 길 길이 멀다. 작년 그 맘때쯤 슈트라우스와 에키타이 그리고 <일본축전곡>을 상기한 것이 전국에 나 하나라면 이는 쫌 심각하다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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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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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키타이 안 바르셀로나 라디오 편성표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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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키타이안 1944.10.30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만주국>
에키타이안 1944.11.11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
에키타이안 1944.12.10 라디오 바르셀로나 방송편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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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