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21(일)

NEWS ON AIR

한국전쟁당시 전북 이리에서 발견된 북한 애국가 등 각종 노래 필사집
자료실 06-28 14:22
[Interview] The untold story behind South Korea’s national anthem
국시모 06-28 13:13
안익태의 만주환상곡 영상자료
자료실 08-14 19:54
만주환상곡 소개 영상, 2차대전 프랑스 방송
자료실 12-31 19:07
에텐라쿠 강천성악 in 1941 헝가리
자료실 12-31 19:06
안익태의 '만주환상곡'은 대한민국 애국가인 '한국환상곡'
안익태 애국가 12-31 17:35
루이웬과 에하라 고이치
자료실 12-3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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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봉 05-11 21:11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 출발을 알리는 세미나 열려

    [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 등을 맞이하면서 대한민국은 친일청산이란 화두가 뜨겁게 전국을 달구었다. 그리고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의 ‘안익태 케이스’ 출판과 함께 오랜 시간 ‘안익태 애국가’의 친일 문제와 표절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은 지난 8월 8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안민석 의원이 주최하고 씨알재단이 주관한 공청회에 이해영 교수와 한예종 김정희 교수가 참석해 안익태 애국가의 친일.친나치행각과 불가리아 군가 표절 문제를 세부적으로 밝혔다. 오랜시간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온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은 11월 1일 국회에서 발표회를 개최하며 본격적인 안익태 애국가를 대체할 국가(國歌)만들기 시민 운동본부를 출발시켰다. 한신대학교 교수이며 대학원장인 이해영 교수는 ‘에하라 고이치와 에키타이 안 : 졸저 <안익태 케이스> 보유(補遺)’에 대해 발표했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김수현 연구교수는 ‘새로운 국가(國家) 제정 논의의 출발점 – 항일가요 애국가 연구’에 대해,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김정희 외래교수는 ‘세상의 國歌, 우리의 國歌 - 國歌, 누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발표했다. 첫 발표자인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이 되어 일본인 에하라 고이치와 연결된 부분을 파헤쳤다. 만주국 건국 축하를 위해 ‘만주환상곡’을 작곡한 ‘에키타이 안’의 발걸음을 그의 독일생활과 프랑스에서 활동,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기울어가던 마지막 시기 스페인으로 도주한 흔적까지 추적하며 해방 후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에서 애국지사로 변신한 ‘에키타이 안’을 고발하고 있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김수현 연구교수는 국가(國歌)라 부르지 않고 애국가(愛國歌)라고 부르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지적하며 법으로 제정된 국가(國歌)가 한국에 없다는 현실을 지적했다. 김수현 교수는 가사문제와 작자미상 등 안익태 애국가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앞선 연구에서 다뤄진 안익태 애국가의 표절문제가 1964년 5월 19일 ~ 26일 사이 열린 제3회 서울국제음악회에서 불가리아 출신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에 의해 이미 지적됐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김수현 교수는 지난 70여년간 안익태 애국가의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지적된 가운데 새로운 애국가를 지정하려고 한다면 역사적 맥락, 즉 항일운동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애국가의 역사적 배경이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가리아 출신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가 지적했던 불가리아 군가를 표절했다는 안익태 애국가의 곡 전체를 분석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정희 외래교수는 불가리아 군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와 안익태 애국가를 1:1로 악보비교를 했다. 김정희 교수의 악보비교분석은 일반인들도 한 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에서도 김정희 교수의 악보비교분석을 중심으로 안익태의 친일.친나치행각 뿐만아니라, 표절이라는 부분에 또 하나의 초점을 맞춰 안익태 애국가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애국가, 더 나아가 國歌로 자격을 상실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날 행사는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연구회'(대표의원 인재근, 강창일)가 주최했으며, 소속 의원으로 소병훈, 오영훈 의원이 연구의원을 맡고 있으며, 정회원으로 신경민, 심재권, 유승희, 유은혜, 이인영, 이해찬, 장정숙, 주승용, 추미애 의원등이 있으며, 준회원으로 권미혁, 기동민, 김영진, 김용태, 김철민, 박완주, 박홍근, 우원식, 윤관석, 윤후덕, 전혜숙, 정동영, 홍익표, 황희 의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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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봉 05-11 19:59

    안익태의 ‘애국가’를 꼭 불러야 하나?

    [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애국가(愛國歌)의 뜻(意味)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를 말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고난의 역사를 이겨내고 앞으로 함께 나가자는 뜻을 내포한 노래, 과거의 찬란한 역사와 영광, 그리고 현재의 자긍심을 담은 노래 등 다양한 노래들이 애국가로 불릴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애국가는 안익태의 애국가 외에는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 이승만-박정희 정권출범과 함께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고향의 봄’, ‘임을 위한 행진곡’, 윤도현의 아리랑‘, 아, 대한민국’ 등 수 많은 노래가 애국가로 불릴 수 있다. 대한민국은 법률로 수도(首都)와 국가(國歌)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 기능을 다하고 있지만,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고 정하지 않고 있으며, 안익태의 애국가 역시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로 한다’란 결정을 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안익태는 친일행각에 히틀러 치하의 독일제국에서 나찌의 선전도구로 또는 일제의 선전도구로 활용된 음악가다. 각종 자료를 통해 안익태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저질렀고, 나찌 치하의 독일에서 히틀런 편에 서서 음악활동을 하고 돈을 받은 사람이다. 위키백과에서 안익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안익태(安益泰, 스페인어: Eak-tai Ahn, 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스페인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안익태 케이스의 저자 이해영 교수(한신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국제관계학부)는 오랜 시간 안익태와 그가 작곡한 애국가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다. 6월 24일 가평 ‘포럼 1939:음담패설’에서 이해영 교수와 안익태기념재단 김형석 연구위원장의 찬반논쟁이 있었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친나찌행각 및 1942년 9월 18일 연주된 만주국환상곡이 일제의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 10년을 찬양하는 내용이었으며, 이후 80년대 ‘안익태추모사업회’에서 만주국 찬양 부분에 ‘나의 사랑 한반도’로 변경한 사실을 지적했다. 하지만 김형석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은 안익태 애국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안익태가 음악가로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였으며 독일제국시대였는데,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안익태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였다고 주장했다. 김형석 연구위원장의 이 같은 인식에 대해 취재기자는 “일제 강점기였고 독일 제국시대였다고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도 조국 독립운동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일제가 세운 만주국 안에서도 항일독립투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왜 안익태는 친일을 선택했는가?”라고 질문했지만,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명쾌하게 답변하지 못했다. 토론에서 이해영 교수는 “대한민국 애국가로 법률로 공식 지정된 곡은 없다. 애국가는 대통령령으로 제정되어 법률상 근거가 없고, 대통령령에도 ‘애국가를 부른다’라고 되어 있지, 누구의 애국가를 부르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사실 확인을 하며, “대통령령은 공무원들은 지킬 의무가 있지만, 국민들은 지킬 의무가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대한민국은 성문법의 국가이며, 관습법을 지키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언급한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의 애국가를 애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서울을 대한민국 수도로 하는 것도 관습법 아닌가?”란 주장으로 안익태의 애국가가 대한민국 공식 애국가로 문제점이 없다고 주장했다. 토론은 격한 논쟁으로 번졌다.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안익태 애국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방적인 이야기를 이어갔고,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 기념재단에서는 안익태의 친일부역행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맞섰다. ‘애국가, 대한민국의 국가로서 정당한가?’ 토론회는 사실 안익태기념재단에서 회심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참가자들에게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친나찌행각을 더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자리로 안익태의 애국가를 국가로 부를 수 없다는 당위성을 더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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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익태의 '만주환상곡'은 대한민국 애국가인 '한국환상곡'

    [오랜 만에 에키타이 안=안익태] 제자 이유철이 현지에서 어렵게 구해 준 귄터 하쉬가 편집한 <독-일협회 Deutsche-Japanische Gesellschaften von 1888 bis 1996>란 책에 에키타이 안이 등장하니 여기에 번역해 두고자 한다.(277-278쪽)에키타이 안은 1941-42년 [나치시기] 비엔나 총독Reichsstatthalter 발두어 폰 쉬락Baldur von Schirach이 관장했던 그리고 독-일협회 비엔나지부가 주최하는, <전시동계지원사업>을 위한 독-일협회주최 연주회시리즈를 통해 데뷔하였다. 원래 1942년 2월 3일로 예정된 연주회는 [전시] 석탄부족으로 3월 12일로 연기되었다. 연주회 프로그램에는 베에토벤의 에그몬트서곡, 에키타이 안이 오케스트라버전으로 편곡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C장조,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A장조, 일본 황기 2,600년 기념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 축전곡>이 들어가 있었다. 또 한 번의 그런 연주회가 1943년 2월 11일에도 열렸다. 독일협회의 비엔나지부 사무총장은 그 연주회의 전사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에키타이 안씨는 일본대사관 참사관 M. 이마이를 통해 자신의 희망을 표현한 편지를 보내게 함으로써 비엔나에서 자신의 '만주환상곡'을 공연할 수 있었다. 이 연주회는 5월 초에 그것도 만주환상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함께 올리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 비엔나에선 그런 식의 연주편성은 완전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비엔나총독 발두어 폰 쉬락에게도 문의한 뒤 독일제국 건국기념일인 1943년 2월 11일에 계획된 연주회때 오직 일본 작곡가의 일본 음악만으로 무대에 올리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자고 결정했다. 그렇지만 베에토벤 교향곡 7번과 레오노레서곡등 베에토벤의 작품과 에키타이안의 작품을 묶었던 그 날 밤 연주회는 독일의 스탈린그라드전투 패전이라는 암울한 분위기속에서 개최되었다. 비엔나 지부 사무총장은 말하길 "지금 이 불쾌하게 억눌린 분위기가 다수 청중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고 나는 모르긴 해도 상당량의 표를 공짜로 나눠 져야 할 것 같다."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해서 작곡된 이 작품은 "(일본어로 부른) 소박한 그렇지만 힘있게 종종 제창unisono으로 이어지는 마지막합창속에서, 희망에 찬 평화의 사절처럼" 울려 퍼졌다. 어쩌나, 바로 이 <만주환상곡>이 <한국환상곡>이고, 스탈린그라드전투 패배이후 더 한층 짙어진 패전의 무거운 분위기에서, 에키타이 안=안익태는 이들을 위로 하기 위해 '일본어로' 된 저 감동적인 <애국가>의 마지막 합창부분을 지휘하고 있었다. 물론 그 때는 <만주환상곡>의 클라이맥스이지만 말이다. 1996년 출판된 이 아주 객관적인 책의 저자 조차 바로 이 만주환상곡이 한국환상곡인 줄 꿈에라도 알까. 에키타이가 바랬던 것처럼, 진짜 이 한국 아니 만주환상곡과 베에토벤 9번 합창이 함께 무대에 올랐다면 어찌 되었을까.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전쟁의 한 복판 하루 하루 고단한 삶을 견뎌야 했던 혹한속의 비엔나 시민들이 에키타이 안의 일본어로 된 오족협화의 선율에 위로를 받았을까. 그렇다면 안익태는 참으로 위대한 코스모폴리탄 박애주의자였음에 분명하다. 허나 그 선율에 - 황교안의 애국 기준에 따라 - 심지어 4절까지 따라 불러야 하는 우리는 어쩌나, 흔히 말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치곤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그래 '역사가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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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영의 구이 보노] "에하라와 에키타이"

    도쿄생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ㆍ1896~1969)와 평양생 에키타이 안(한국명 안익태ㆍ1906~1965).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근대 이후 한일 관계사의 가장 괴이하고, 희비극적인 한 대목일지 모른다. 꽤 오랫동안 에키타이의 행적을 추적해 온 나는 최근 3건의 원본 문서들과 한 건의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미 CIA 문서고에서 기밀 해제된 것들이다. 문서 중 하나는 전쟁 중인 1944년 4월 18일자 ‘터키에서의 일본 첩보·선전활동’에 관한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1945년 1월 30일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일본 첩보활동’에 대한 보고서다. 전자는 미 전략첩보국(OSS) 이스탄불지부가, 후자는 영국 정보원이 생산한 것이다. 세 번째 문서는 종전 이후인 1949년 11월 18일자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이 미 합참 정보국장에게 보낸 ‘전시 독일의 외교·군사 정보활동’이라는 보고서다. 그리 보면 마지막 보고서가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셈이다. 전시 일본의 재유럽 첩보활동의 본부는 베를린에 있었다. 2차 대전 직후 일본은 처음에는 ‘간첩활동의 수도’라 불리던 포르투갈 리스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태평양전쟁이 확전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위협하게 되자 마찬가지 중립국인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한다. 하지만 터키마저 연합국으로 기울자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미·영 첩보전의 기지로 활용했다. 일본 첩보활동의 동선을 미국은 매우 촘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나라의 첩보 라인이 이렇게 ‘탈탈 털리는’ 경우는 드물다. 오직 패전이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에하라의 회고에 따르면 에키타이안은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까지 자신의 베를린 사저에 기거했다고 했다. 안익태가 나치 독일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에 기재한 주소지가 바로 이 사저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 나와는 다른 시기에 또 다른 이유로 에하라 고이치를 추적한 학자가 있다. 북텍사스대학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학 교수 팀 잭슨이다. 잭슨 교수는 에하라가 하얼빈 소재 731부대의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와 연루돼 있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1938년 에하라가 독일로 건너간 뒤 731부대의 생체실험 정보를 독일과 공유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우슈비츠 등에서의 생체실험과 731부대의 그것은 에하라를 고리로 해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말이다. 잭슨 교수와 서로 자료를 공유해 온 내 쪽에서도 확인해 본 결과 에하라는 1935~1937년 하얼빈의 총무처장으로 있다가 1937년 7월 1일자로 하얼빈 부시장으로 승진한 뒤 1년 뒤 베를린 주재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파견됐다. 731부대가 일왕 히로히토의 칙령에 의해 본격적으로 하얼빈으로 확장 이전된 때가 1936년이다. 만주국의 직제는 이른바 일만정위(日滿定位) 원칙 곧 일계(日係)와 만계의 직위가 정해져 있었다. 일본의 괴뢰국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장, 시장이나 공사 등은 만계에 할당하고 그 아래에 일계를 배치했는데 실세는 당연히 일계였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총무청(처) 중심주의를 기본으로 해서 인사ㆍ재정, 특히 모든 기밀업무를 총무(청)처장이 관장했고, 그 배후에는 관동군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에하라가 하얼빈 시절 직간접적으로 731부대와 연관됐을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다. 위에서 말한 1949년 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는 “재독 일본 첩보망의 총책”이었다. 이 진술은 페터 바이라우흐 나치 독일의 SS 해외첩보부(SD) 소련·일본국장에게서 나온 것이다. 독일과 소련은 군사동맹이었지만, 1943년 8월 이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상호 첩보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에하라는 1945년 1월의 영국 첩보부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당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핀란드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등록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1949년 보고서만큼 정확한 정보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 첩보원은 그가 일본과 러시아 간 협상을 담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OSS 이스탄불지부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베를린에서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약 300명의 정보망을 운용하고 있었다. 에하라 고이치는 외교관이라는 합법적 신분으로 위장한 ‘화이트’였다. 그의 집에 주소지를 둔 에키타이 안은 추축국과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나치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음악으로 응원했다. 에키타이 안이 안익태다.

    보충-베토벤과 안익태

    올 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 해다. 전세계적으로 온갖 행사가 준비되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그의 사거일인 3월 26일에 조차도 아무 일도 없었다. 대개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이 그가 죽기 일 년 전인 1826년 작곡된 작품번호 135 곧 현악 4 중주 제16번으로 알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 베토벤 작품번호 136 <영광의 순간>이 있다. 유튜브등에서 정명훈의 좋은 지휘로 쉽게 찾아 들을 수 있다. 이 작품은 1814년 작곡되었다. 그의 교향곡 제8번이 발표된 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은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을까? 베토벤 자신이 거절한 탓이다. 그렇다면 왜? 이 곡은 1814년에 초연되었다. 1814년! 전유럽을 혁명 의 소용돌이로 내 몬 나폴레옹전쟁이 종결되고 메테르니히 반동체제가 자리잡는 비엔나회의, '회의는 춤춘다'로 유명한 이 반나폴레옹 전후처리회의는 그 해 9월 개최되어 다음 해 6월까 지 지리하게 이어지는 데, 그 와중인 1814년 11월 이 곡은 첫무대에 오른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등 전승4국의 의도는 자명했다. 타도된 부르봉왕조를 복고 시켜 다시는 혁명운동이 부활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아울러 일체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경향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그래서 삼엄한 경찰국가체제제를 안착시키는 것이었다. 베토벤은 바로 이 비엔나체제를 찬양하는 곡을 회의기간에 무대에 올린 것이다. 한 때 프랑스혁명을 동경, 파리로 이주할 생각조차 했었고 또 '황제' 나폴레옹에 대해 극단적 혐오감을 내비친 급진 공화주의자였던 그가, 제우스라는 기성의 절대권력에 맞선 프로메테우스라는 항의와 저항의 아이돌을 형상화했던 그가 이제 보수반동체제의 나팔수로 변신한 셈이다. 그래서 황제와 합스 부르크왕가를 낯 뜨겁게 찬양하는 그리고 바로 그 '새로운 유럽'의 중심 비엔나의 희망찬 미래를 기리는 곡을 만든 것이다. 우리로 치면 전두환시절 타락한 종교인들의 '조찬기도회'를 연 상하면 이해가 쉽다. 변절도 이런 변절이 없다. 1941년 2월 1일자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69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대한민국 22년(1940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서 그의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하다.” 물론 정식 국가로 의결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안익태의 신곡조 애국가는 이렇게 임정의 사용 허가를 얻었다. 같은 해 12월 10일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임정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한다. 이 선전포고문에서 임정은 ‘축심국’ 곧 일본, 독일, 이태리등 추축국에 ‘전쟁을 선언’하고 만주국과 남경정부를 절대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그래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할 것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임정이 대일본 선전포고를 발표했던 바로 그 시점전후, 안익태에서 에키타이안으 로 변신한 그는 베를린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집 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까지 약 2년 반을 기식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록과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의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에하라 고이치는 일본 유럽첩보망의 독일 총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정보는 나치 제국안전본부 제6국 해외첩보부산하 극동국장의 재판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 있으면서 에키타이안은 1942년 독일음악계의 거두 리하르트 슈트라 우스의 <황기 2600년 기념 축전곡>을 지휘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18일 중국에서 9.18사변이 라 불리는 즉 만주사변일에 맞추어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축전곡>을 작곡해서 지휘했다. 나치 선전성이 제작한 이 날의 실황 영상은 마지막 4악장이 독일연방기록원에 남아있는데, 그 중 마지막 40초가량이 편집되어 나치의 전쟁뉴스를 통해 전세계에 방송되었다. 에키타이안은 1943년 2월 11일 일본 건국기념일에 비엔나에서 만주국을 다시 지휘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만주국>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같이 올리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하지만 5.16이후인 1962년 자신이 주도한 제1회 국제음악제때 꿈을 이루었다. 물론 <만주국>이 아니 라 <한국환상곡>과 <합창>을 묶어서 말이다. 베토벤은 메테르니히 반동체제를 위해 자신의 공화주의 신념을 훼절했지만 그 작품은 버렸다. 에키타이안은 변절의 도구였던 그 작품을 울궈먹고 또 울궈 먹었다. 그러는 사이 좌건 우건 우리 모두가 비루해졌다.

    [에하라 고이치와 안익태] 드디어, 에하라가 입을 열었다

    [에하라 고이치와 안익태] 드디어, 에하라가 입을 열었다. 아니 벌써 1950년에 입을 열었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허기사 안익태가 만주환상곡을 지휘한 걸 안 것도 고작 10년밖에 안되니 뭐 놀랄 일도 아니다. 아무튼 전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가 패전후 일본에서 이제는 어였한 중견변호사로 안익태'군'에 대해 있었던 일을 <레코드예술>이란 잡지에 기고했다. 물론 뿌듯한 표정이 곳곳에 묻어 있다. 정확한 전문 번역은 나오는 대로 읽기로 하고, 우선 내가 초벌번역한 몇 장면만 보자. 아 참, 한국 최초 개봉이다! 1) 언제 처음 만났을까?"1942년 가을, 나는 공무로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 있었다. 명치절 아침 일본공사관 의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기미가요제창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청년이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보기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상이었다. 식후에 T공사로부터 그가 당시 유럽유학중인 지휘자겸 작곡가인 안익태군이라는 소개를 ...받았다. 안군은 당일 오후 연주회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다 하면서 나를 연주회에 초대하였다." (내가 보기에 에하라의 연도표기는 착오이다. 다른 여러 자료를 대조해 보건대 1942년이 아니라 그 이전이다. 아무튼 이 시점에 이미 안익태는 일본외교공관에 출입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2) 그렇다면 안익태는 왜 베를린으로 가서 일인 외교관의 집에 기식하게 되었는가?"유럽에서 안은 빈에서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에게서 지휘를 지도받고, 부다페스트에서 코다이Zoltan Kodaly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유학기간이 지나간 뒤에도 미국의 어떤 노은행가로부터 송금을 받아 그럭저럭 연구를 이어나가다가, 전쟁으로 인해 송금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유럽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나에게 상담받기 위해 찾아 왔다. 안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대성시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우리의 작은 힘이라도 보탤 그런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되든 내 집으로 와라 ....'는 것으로 되어,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되었다." (독소전이 1941년 6월 개전되는 데, 위 안을 처음 본 때가 1942년이라는 것은 에하라의 착오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안을 처음 본 시점은 1940년일 수도 있다) 3) 그러면 <만주환상곡>은 어찌 된 걸까?"안군은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보통은 접근이 힘든 노대가의 환심을 산다는 의미에서 그런 수완이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수완이라기 보다 그의 천성이라 말하는 것이 낫겠다. 그 당시 안익태는 중국의 멜로디를 따고, 나의 작사부분을 곡의 말미 합창부분에 넣어 한 시간 정도의 연주가 요구되는 그런 축전곡을 만들었다. 빈에서 발표할 때에 슈트라우스 자신이 연주회장에 나와 곡의 영광된 출발을 기뻐해 주었다." ("중국의 멜로디"는 또 뭔가?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그것은 한나라때 소무의 영웅담을 찬양한 중국의 유명한 민요 '소무목양 (蘇武牧羊)'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 하면 만주국의 두번째 국가가 바로 이 소무목양의 멜로디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하라가 작사한 것이 만주축전곡의 제4악장 오족협화를 찬양한 바로 그 부분이다. 지금 우리 애국가 가사가 놓여 있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에하라는 보기 드문 음악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시인 모리케를 일어로 번역출판한 사람이다) 에하라는 자신의 동생이 안이 나온 동경국립음악원의 동문임을 들어 안'군'을 친동생으로 여겼다고 다른 글에서 밝히고 있다. 아무튼 이로써 도대체 언제 어떤 이유에서 안'군'이 에하라 고이치를 만나 그의 사택에서 기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슈트라우스와 어떻게 교분을 쌓게 되었는 지 적어도 한 쪽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다. 에하라 자신이 만주국 참사관이었음에도 이 글에서는 "변호사, 전 주독 외교관"이라 약력을 밝혀 '만주'를 의식적으로 삭제하고, 안이 작곡한 곡도 만주국이었음을 말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안이 작곡한 <만주국>에 실제 만주국의 국가에 사용된 중국민요가 포함되어 있었고, 에하라가 작사자 임을 스스로 밝혔음은 분명 새로운 사실이다. 에하라의 기억속에 안'군'은 술도 담배도 여자도 모르는 오직 하나 아는 것은 음악뿐인 그런 열심히 공부하는 '동생'으로 재현된다. 즉 식민지 지배/피지배관계는 사람좋은 에하라의 기억속에 형/동생의 관계 즉 그런 무의식으로 치환되어 있다. 하지만 피색깔까지 모든 것이 정치적인 당대 파시즘의 세계관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았을 터, 오갈 데 없는 안'군'을 거저 먹여주지는 않았을 것이고 안'군' 역시 여기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일종의 거래 즉 등가교환의 법칙이 작용했을 거라는 말이다. 여전히 안'군' 구하기에 미련을 둔 <조선>은 최근 한예종의 안익태연구가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있다. “친일 여부에 대해 짧게 답해야 한다면 그[안익태]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답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해방될 줄 내가 알았나" 바로 그런 말과 질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얼마전에는 음악학자 진환주가 안을 '문화예술주의자'로 보자고 한다. 예술가는 '투사'가 아니며, 안은 우리 민요의 선율을 세계에 알렸지 않냐는 말이다. 반민족행위에 대해서도 예술가이기 때문에 무방하다는 말일까? 아니면 유명하면 용서된다는 말일까? 최근의 친일담론은 갈수록 '뻔뻔해'지는 게 특징이다. 이런 궤변과 요설이 백주에 인쇄되어 나돌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까. 꼴보수 드골도 나치부역자들에 대해서는 기관총을 난사했고, 장개석도 '한간'에 대해서 할 만큼은 했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와는 달리 '민족'을 갖고 오지 못한 한국의 보수와 특히 그 기독교 변종에게 안익태는 그야말로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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