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ON AIR
-
- 에키타이안,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영상 최초공개! 그리고 ‘안익태애국가
-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 이미 나는 약 10년 전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의 자료실에서 찾아낸 40초가량의 이 연주회 클라이맥스 장면을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영상은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이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쟁뉴스의 후반부에 실려 있다. 당시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말미에 문화뉴스 꼭지에 실린 이 연주회 소식 말고도 그 날의 전쟁뉴스는 꽤 긍정적인 톤이다. 이후 나는 <안익태케이스>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사전 예약을 거쳐 베를린 소재 독일연방기록원(Bundesarchiv)산하 영상원(Filmarchiv)를 방문했다. 저 클라이맥스 장면의 원 필름을 보기위해서다. 이 영상은 2000년대 잠시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파리에 머물 때였는데, 그 전날 베를린에서 하룻밤을 묶고 아침 일찍 영상원을 찾으니 직원이 내가 신청한 필름을 준비해 두었다. 영상원은 과거 내가 베를린에 살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이미 연방기록원은 안익태 즉 나치 시절 기록물에 포함된 에키타이안 파일을 열람 복사하기 위해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영상원은 처음이었다. 혼자 앉아 보고 또 보고하면서 직원의 동의하에 나의 휴대폰으로 그 영상을 두 번 촬영했다. 몇 달 전에 예약하고 또 파리에서 비행기로 이 이른 시간에 방문했던 때문인지 직원도 촬영요청에 선 뜻 동의해 주었다. 물론 대각선으로 검은 테이핑을 한 뒤에 말이다. 몇 년 전 나는 광복회에 바로 이 필름 원본 입수를 권고한 적이 있다. 비록 친일파의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역사 아닌가, 그렇다면 공법단체인 광복회라면 그 필름을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지금 공개하는 이 필름은 그렇게 입수된 원본 필름의 사본이다. 이 필름은 당시 국회토론회에서 공개한 바 있다. 그리고 축약본이 광복회 홈피에 올라간 적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이 영상은 전 국민이 한 번은 보고 들어야 할 우리 흑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판단된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안익태가 만든 ‘애국가’는 트로트처럼 ‘사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비록 법정 국가는 아니지만 ‘공적 의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안익태의 ‘명예회복’을 외치고 나섰다. 나로서는 국민 스스로가 이런 일부 극소수 뉴라이트의 주장에 얼마나 동의할 것인지 충분한 자료와 근거를 제공하고 판단해 보자는 쪽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에키타이안의 2차 대전 시기 영상자료는 모두 3가지다. 먼저 프랑스 국립영상원 자료가 있다. 두 번째는 시기적으로 이보다 앞선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 깊은 페스티 비가도홀에서 열린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 1주년 기념 연주회 영상이다. 여기서 에키타이안은 일본을 대표해서 ‘에텐라쿠’를 연주했다. 해방 후 에키타이안은 이를 ‘강천성악’이라 달리 부르며 청중을 우롱한 바 있다. 앞의 두 영상은 모두 내가 올려놓은지라 유튜브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영상이 바로 여기에 소개한 영상이다. 첫 번째 영상은 약 7분 50초 정도인 이 영상의 마지막 40초를 편집해 나치의 전쟁뉴스 영상에 내보낸 것이다. 이 곡이 연주된 때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인 시점에서 1년이 채 안 된 시점이다. 당시 상해 임정은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발동해 조선과 일본은 전쟁상태였다. 일본의 놀라운 전과를 목격한 독일 전역은 당시 일본 붐이 불고 있었다.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 일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독-일협회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가 독일 전역에, 그리고 <일독협회>가 일본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 바로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는 어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안이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전시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자 일본 귀족으로서 에키타이와 마찬가지 지휘자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다음이 에키타이였다. <독일협회>는 나치선전성의 지휘·감독을 받는 기관이었다. 즉 그 정점에 괴벨스가 있다. 안익태를 추적하면서 여러 차례 서신 교환을 한 바 있는 미 시카고대학 음대 티모시 잭슨 교수는 1942년 연주회 녹화가 괴벨스의 지시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시점 독일외교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반소 제2 전선을 열어 주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독일 동부전선의 압박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이 연주회는 일본 괴로 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이었다. 이 행사는 만주일대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던 그런 각종의 기념행사 중 하나였다. 즉 에키타이안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한 바로 그 적국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개최된 각종의 행사에 일본을 대표해서 이적행위에 솔선수범한 것이다. 에키타이안이 하필 ‘만주국’을 찬양하는 곡을 만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의 스폰서인 에하라 고이치가 당시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이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참사관이었지만 에하라 고이치는 동경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얼빈시 부시장을 역임한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하얼빈시 총무처장 그리고 부시장으로 재직 시 731부대 창설에 핵심적으로 조력하고 이후 독일과 일본의 생화학전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급상 참사관이지만 정식 공사인 한인 여의문 보다 실세였다. 바로 그런 그의 사저에 에키타이안은 2년 반 가까이 주소지를 두고 여기서 기식했다. 바로 베를린 호숫가에 있는 이 집에서 작곡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그리고 미 CIA 전신인 OSS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 고이치는 전쟁 말기 일본의 재독 첩보조직의 총책이었다, 쉽게 말해 재독 일본 스파이 수장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은 셈이다. 에키타이안과 같은 시기 에하라 고이치가 관리하던 베를린 체류 또 다른 조선인이자 현대 무용가 박영인(쿠니 마사미)을 OSS는 ‘가장 영리한 첩보원agent’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스파이총책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안은? 박영인은 전시에 독일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다녔다. 에키타이안은 전시에 추축국과 친추축국 그리고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그들을 위해 복무했다. 이 영상의 오프닝 크레딧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만주제국Mandschoutikuo 건국 10주년 기념 축하 연주회,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베를린 대편성 라디오방송교향악단이 라미LAMY 합창단 협연하에 작곡가 에키타이안이 지휘하고 에하라 고이치가 합창 대본을 쓴 ’축전곡Festmusik’.” 그리고 배경에 깔린 총보의 제목도 ‘축전곡’으로 되어 있고 바로 그 밑에 에하라 고이치가 일본어로 쓴 ‘오족협화’를 찬양하는 합창대본이 음역되어 있다. 1942년 9월 18일의 이 영상은 이 축전곡의 마지막 악장이다. 영상의 5:30초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에하라 고이치다. 그리고 합창대본을 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동양인이 만주국 공사 여의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후 그는 중국에서 ‘한간’ 혐의로 총살되었다. 당시 주독 일본대사 육군중장 오시마 히로시는 영상 6:36초에 등장한다. ‘히틀러보다 더 히틀러스럽다’는 평을 받던 인물이다. 6:40초 즈음 에하라 고이치가 다시 잠깐 등장하고 6:59초 너무나 익숙한 애국가의 ‘우리나라 만세’와 거의 같은 선율이 등장한다. 물론 이때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만주국이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에키타이가 청중석을 가리키는 데 아마 에하라 고이치가 아닐까 싶다. 이 영상은 전곡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1944년 말 이후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해지자, 사실상 추축국 편이었던 스페인의 프랑코정권은 추축국을 지원하기 위해 에키타이안의 '만주국'을 수차례 방송한 사실이 바르셀로나 라디오 방송국 편성표에 그 일자, 시간과 더불어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이 방송이 '음반'을 통해 나갔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축전곡’의 전곡을 들어야 과연 에키타이안이 안익태 애국가선율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로서는 꽤 장기간, 이 음반을 추적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상에서도 보듯 악보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에키타이안 본인이 이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 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코리아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가 스페인 도피 중 가지고 있던 이 곡의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한 바로 그것이다. 나는 몇 년 전 에키타이안이 만주국 악보를 한국환상곡으로 표지 갈이를 한 바로셀로나 북쪽 휴양지 사가로라는 곳을 직접 답사한 적이 있다. 훗날 에키타이는 이 악보를 '민족의 영도자'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1955년 문득 애국자로 둔갑 이승만 탄신기념연주를 위해 귀국한 에키타이안은 이승만에게 이 악보를 헌정한다. 바로 그 악보는 현재 김형석이 관장으로 있는 독립기념관에 있다! 1944년 이미 전황은 가망이 없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 히틀러 생일주간에 열린 연례 베토벤 페스티벌 연주를 위해 에키타이안은 에하라 고이치와 파리를 방문했다. 이 연주회에서 저 유명한 알프레드 코르토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협연했다. 알프레드 코르토는 그 직후 파리가 해방된 뒤 ‘입국 금지 인물 persona non grata’로 지목되어 한참 동안 프랑스에 올 수가 없었다. 에키타인안도 이 리스트에 올랐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연주를 끝으로 에키타이는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망’간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애국자가 이제 해방이 되었는데 그리운 조국으로 가지 않았을까. 일본인이지만 일본으로, 조선인이지만 조선으로도 가지 못한, 그렇다고 독일에 남을 수도 미국으로 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의 스페인행은 그의 친일, 친나치 행적을 은폐하기에 나름 '잘 된(?)' 선택일지 모르겠다. 프랑코 독재가 싫어 파블로 카잘스는 살아생전 조국인 스페인에 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가 나치 패망 후 손쉽게 도망갈 곳 중 하나가 스페인이었다. 최근 나는 해외 경매사이트에 에키타이안의 ‘흰백합화’ SP판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곡은 특히나 에키타이안의 몇 안 되는 곡 중 작곡 연도나 곡 내용이 불명인 상태로 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어디서 작곡되었는지는 이미 밝혀졌다. 에하라 고이치가 전후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귀국한 뒤 동경에서 자신의 후일담을 수필로 낸 것을 내가 발굴할 적이 있다. 여기에 이 ‘축전곡’과 함께 ‘흰백합화’도 자신의 집에서 작곡했다고 되어 있다. 가격이 터무니없어 나는 이 음반을 사지 않았다. 아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만주국 ‘축전곡’ 음반이 경매사이트에 등장하면 그것은 내가 산다. 누가 에키타이안의 명예회복을 말한다. 하지만 그전에 이런 자의 애국가를 불러야 했던 우리 국민의 ‘명예회복’이 먼저다. 그래야 한다.
-
- [북리뷰] 애국가에 국가(國歌)의 자격을 묻다
- 한미 FTA,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와 현실의 첨예한 이슈에 예리한 정론으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해온 한신대 이해영 교수가 ‘애국가’를 들고 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음악적 가치가 아닌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애국가가 과연 국가(國歌)로 적절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그리고 정치적 행위로서 국가란 무엇인지 불편하지만 마주해야 할 물음을 우리에게 묵직하게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저자가 오랫동안 치열하게 찾은 자료들의 제시와 분석, 날카롭고 곧은 정치·역사적 관점 속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된다.국가(國歌)는 시민 주권의 구현체인 국가(國家)와의 정서적 결속이자 충성의 서약이다. 따라서 국가(國歌)는 정치적이고 시민 종교적인 면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인 애국을 담아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르고 듣는 안익태의 [애국가]에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숭고한 애국심을 지닌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휘장 속에 가려진 안익태의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행적과 [애국가]의 변천 과정을 통해 과연 우리가 [애국가]를 국가로 제창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것에 대해 합의할 것인지 우리에게 판단을 요구한다. ■목차 들어가는 말1. 안익태 「애국가」의 탄생2. ‘프린스 리’는 누구인가?3. 더블린에서 베를린으로4. 그러면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5. 「에텐라쿠(월천악越天樂)」인가, 「강천성악(降天聲樂)」인가?6.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과 에키타이 안7. 독일 협회(獨日協會,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와 나치 독일8. 1942년 9월 18일 그날의 「만주국」9. 우리에게 만주국이란? 소설가 박영준, 그리고 에키타이 안의 경우9.1. 만주국의 민족 협화9.2. 소설가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 개작9.3. 에키타이 안의 「만주국」 개작10. 「애국가」 논쟁: 국가 상징의 재구성을 위하여10.1. 두 개의 ‘분단’ 애국가의 형성10.2 안익태 「애국가」의 공고화: 이승만과 박정희10.3. 봉인과 도전참고문헌, 사진 및 도판 출전맺는 말 ■출판사 리뷰 에키타이 안에게 애국을 묻다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 판타지'는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됐다. 안익태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조선의 새 '애국가'의 작곡가라고 말하지만 임시 정부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신 곡조의 사용을 허가했을 뿐이었다. 더블린 초연 이후 안익태는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의 베를린 저택에 2년 반 가까이 기거했다. 에하라 고이치는 다름 아닌 주 베를린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 정보기관 총책이었으며, 다양한 분야에 있는 300여 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 저자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정황들은 에키타이 안이 일본 정보기관의 특수 공작원이나 정보원이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최소한 에키타이 안은 유럽에서 추축국 중심으로 연주 여행을 하며 일본제국을 선전하는 고급 나팔수 역할을 하고 편익을 제공받았다.일본 궁중음악에서 우리 전통음악으로의 둔갑저자는 안익태의 행적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친일적 성격을 파헤치고 후에 이 작품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까지의 변모들을 보여준다. 우선 '강천성악(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은 전통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59년 작곡된 것이 아니다. 악보와 음원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아악의 선율을 서양 악기로 편곡해 전시 유럽에서 선전용으로 연주한 '에텐라쿠'의 개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남아 있는 영상 자료를 비교하여 저자는 밝히고 있다.또한 에키타이 안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대일본제국 2600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하고 일본 천황에게 헌정한 '일본 축전곡'의 지휘를 맡았다.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동경으로 적은 에케타이 안의 나치 독일의 제국 음악원 회원증에는 나치 독일 비밀경찰의 ‘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기재 사항 없음’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 나치 비밀경찰로부터 정치적 흠결이 없다는 확인을 받았다는 의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관계로부터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독일 협회(獨日協會)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은 예술과 문화 교류를 통해 정치적·군사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으며 그 중심에 독일협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키타이 안의 베를린 필 연주회는 바로 이 독일 협회의 주최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만주국 환상곡'의 '한국 환상곡'으로의 변신에키타이 안은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를 위해 만주에서 유행하는 선율들을 활용하여 '만주국 환상곡'을 만든다. 이 곡의 작사는 일본 정보기관 총책 에하라 고이치가 맡았다. 문제는 우리가 부르고 듣는 애국가가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라는 것이다. 일본제국이 만주 사변 이후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건국을 축하위해 만든 곡을 우리의 국가로 재사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에키타이 안은 친일 부역의 산물인 '만주국 환상곡'을 1944년 파리 해방을 앞두고 파시스트 독재 국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면서 악보를 폐기했다. 그리고 1938년 더블린 판을 개작하여 새롭게 1944년 판 '한국 환상곡'을 냈다.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유사한 주제를 되풀이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스스로 만든 '애국가'를 ‘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하다 그것을 다시 애국이라 주장하면서 그 중간 과정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우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다.상상의 법정을 열 때해방 이후 안익태의 애국가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대한민국의 정식 국가(國歌)에 대한 필요성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법정(法定) 국가는 아니지만 ‘관행상’ 국가로 기능한 것이다. 이후 안익태는 이승만 정권에 친화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박정희 정권에도 영합하는 행위를 보였다. 2000년 '만주국 환상곡' 영상이 발견되기 전까지 애국적 인물로 영예와 권력을 누렸던 것이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은 폐지되었지만 우리는 상상의 법정을 열어 이른바 ‘기억 투쟁’을 해야 한다. 에키타이 안은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에 협력하는 부역을 했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 저자는 통일 전까지는 현행 그대로 두거나 제2의 애국가를 만들어 부르기, 공론화하여 새로운 애국가를 공모하기 등의 대안들은 제안한다. ■저자소개 - 이해영 1962년 마산에서 나고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당시로선 서독) 마부룩(Marburg) 대학교에서 철학박사(Dr.Phil.)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을 거쳐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지금에 이른다. 이 대학에서 국제평화인권대학원 원장을 맡은 적이 있고, 그 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투기자본감시센터, 참여연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KNCC, 국제통상연구소등 다수의 시민단체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해 왔다. 산업통상부, 몇 개의 국회상임위, 국회입법조사처 등에서도 오랫동안 자문을 한 바 있다. 21세기정치학회 이사를 했고, 한국안보통상학회, 국제지역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박사학위 논문으로 『그람시와 하버마스: 시민사회, 생활세계 그리고 정치』 (독문, 1994)를 상재했고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2000), 『낯선 식민지, 한미 FTA』(2006)를 저술했다. 이 밖의 공저로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2008), 편저로 『1980년대: 혁명의 시대』(1999), 『한미FTA 국민보고서』 (2006), 『한미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2007)가 있다. 논문으로 「칼 슈미트의 정치사상: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2004) (『21세기 정치학회보』 14(2)호), 「역사문제와 ‘동맹의 논리’: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중심으로」(2016) (『씨알의 소리』 2016년, 11·12호) 등 다수가 있다. 주된 연구 영역은 서양정치사상과 국제정치경제다. 대학에선 마키아벨리, 그람시, 슈미트, 하버마스 등을 강의한다. 국제관계에서는 국제통상을 주되게 하면서 한미관계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지정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
- [북리뷰] 우리는 우크라이나전쟁과 연결되어 있다
- 이 책은 2022년 2월에 시작된 이상한 전쟁, ‘우크라이나전쟁’의 원인, 경과 그리고 해법을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는 “푸틴 치매설” “러시아군 키예프 대패설” 등 이 전쟁에 대해서는 한쪽(이른바 서방 1세계)으로 치우친 해석/보도에 관하여 “과연 사실이 그러한가?”라고 질문한다.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전쟁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브레히트의 연극처럼 이 전쟁을 바라보는 독자의 관점을 낯선 방향으로 뒤집고, 이 전쟁의 드러나지 않은 혹은 의도적으로 가려진 국면으로 독자를 잡아당긴다.지은이는 전쟁과 평화는 천당과 지옥처럼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절대로 이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의 해석이라고 말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니라 상호의 이익과 전략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들리지 않던 우크라이나전쟁의 다른 국면을 가리킨다. 전쟁이 정치라는 선으로 평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전쟁의 해석을 통해 해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바로 그 순간 평화를 상상하고 실행할 교두보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 지정학적 변화를 인식하고 미래로 나아갈 교두보를 찾고자 한다. 나아가 그로부터 이어질 미래 한국의 삶을 상상한다. ■목차 머리말1장. 들어가며정답 없는 전쟁을 바라보며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1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2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32장. 전쟁의 성격과 원인1 대리전쟁으로서의 우크라이나전쟁─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실존 위협론’─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대응─우크라이나전쟁은 제2의 아프가니스탄전쟁인가?2 ‘내전의 계속’으로서 우크라이나전쟁─2014년 마이단: 존엄혁명 아니면 ‘뻔뻔한 쿠데타’─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3 루소포비아의 정치학3장. 2022년 전쟁의 전개1 전쟁은 언제 시작되었나?2 전쟁의 1단계: 러시아의 패배인가 거대한 기만인가?3 전쟁 2단계의 전개와 특성─전쟁의 전개 양상: 작전과 전투─아조프연대와 마리우폴 전투─탈산업화 시대의 물량전4 하이브리드전쟁─경제전쟁으로서 대러 제재: EU의 자해인가 러시아의 고립인가?─프레스티튜트와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언론(정보)전쟁5 전쟁의 3단계: 돈바스를 넘어 노보로시야?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1 지정학적 대전환과 신냉전: 단극에서 다극으로─다극 체제로의 평화적 이행은 가능한가?: 지정학의 귀환과 중러 전략협력 체제─미국의 대전략: 글로벌 나토와 동맹 궁핍화─다극 체제와 글로벌사우스2 달러 헤게모니의 위기: 새로운 준비통화의 출현3 산업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 글로벌 경제의 종말?4 정의로운 신세계질서?5장. 한국의 ‘지정치경제적’ 대위기?1 한국의 지정학적 정체성과 오리엔탈리즘2 한국의 대전략: 다극 체제와 포스트 한반도평화프로세스6장. 클라우제비츠와 함께 칸트로?주참고문헌찾아보기 ■책 속으로 대리전쟁으로서의 우크라이나전쟁개전 초기부터 나는 이 전쟁은 고전적 전면전(적지, 적 영토의 점령을 동반한 적의 완전 섬멸과 무장 해제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한 제한전limited war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 정치적 목표에 과연 우크라이나 전역의 군사적 점령과 이후의 정권 교체까지 포함되는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푸틴은 개전과 동시에 이 전쟁의 정치적 목표로 ‘돈바스 해방’, ‘나치 제거’, ‘탈군사화’를 제시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펼치고 있는 특수 군사작전은 바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인 셈이다. ---「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 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대응나토 동진, 특히 그 순번이 우크라이나에 왔을 때 이 문제가 얼마나 휘발성이 강해질지 미국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8년 2월 1일자 모스크바발 비밀 전문을 살펴보자.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 국무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나토, 유럽연합 협의기구로 전달된 전문은 “러시아는 나토에 의한 포위와 역내 영향력 축소 시도를 인지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안보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할지도 모르는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되지 않은 결과를 우려하고 있다”고 전한다. (중략) 나토 가입 문제가 장기적으로 미러 관계의 최대 불안 요소이며, 양국을 전형적인 대결 태세로 몰고 갈 수 있다고 보고한다. 즉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초래할 위험에 내전과 영토 분할, 신냉전이 모두 포함되므로 이는 결국 러시아가 개입 여부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고 밝힌다. 즉 이 말을 뒤집으면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개입을 강요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2014년 마이단: 존엄혁명 아니면 ‘뻔뻔한 쿠데타’저항운동의 첫날부터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마이단에 가담했다. 진보, 현대화, 인권 등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세력과 급진 민족주의파의 합류는 시민 저항이 반헌법적 정권 타도로 귀결된 무장 투쟁으로 바뀌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마이단 혁명에서 급진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쿠데타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마이단운동이 형성되었다. 이 근시안적이고 불행한 동맹의 비극적 결과를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다. 젤렌스키는 앞서 약속한 화해 정책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세력 쪽으로 유턴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체 국민 중 소수에 불과한 급진파 정치인, 법원, 경찰관, 미디어 종사자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프로파간디스트들은 “젤렌스키는 유대인이라서 나치가 될 수 없다”라고 되풀이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어젠다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우크라이나의 정치 과정을 통제하는 이들이 바로 급진 세력이라는 것이 진실이다. ---「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2014년 이른바 유로마이단 운동은 네오나치의 공간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미국이 있었다. 특히 나토 대사를 지냈고 현재 국무부 차관인 빅토리아 눌런드가 핵심 고리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 무장 나치들은 지리멸렬한 우크라이나 군경을 대신해 사실상 미국이 조직한 국립 경찰을 장악했고 국방군에도 정식 편입된 상태다. 조선의 해방 직후를 생각하면 된다. 미국은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이유로, 또한 우크라이나의 민주화를 지원한다는 구실로 인종주의,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나치 집단의 뒷배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어떻게 네오나치가 국회의장이 될 수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 ---「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전쟁의 1단계: 러시아의 패배인가 대기만술인가?젤렌스키는 한편으로 나토가 우크라이나 가입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해야 나토 가입이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전쟁을 일종의 나토 입장권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4월 러시아 국방부는 ‘전쟁 2단계’를 선언했다. 그러자 서방 언론은 러군이 키예프 점령에 실패해 패주했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가 승리했다는 말이다. 이 우크라이나 대승론은 장기 전쟁의 모멘텀이다. 이로써 전장의 실제 상황과 분리 자립된 상상 속의 내러티브 전쟁이 시작되었다. 관념 속, 머릿속 새로운 전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탈산업화 시대의 물량전첫째, 미국의 연간 포탄 생산량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잘해야 10일에서 2주를 버틸 수 있다. 둘째, 러시아는 지금까지 1100발에서 2100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은 연간 110발의 프리즘PRISM, 500발의 재즘JASSM, 60발의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구매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러시아가 고작 3개월 만에 미국이 한 해에 생산하는 미사일의 네 배를 태워버렸다는 뜻이다. 버시닌 중령은 미국의 포탄 재고로는 우크라이나전쟁을 10~14일 정도만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이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군이 참여한 최근의 워게임에서 영국군은 확전 8일 만에 비축한 포탄을 다 써버렸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 버시닌은 서방은 대규모 전쟁을 치를 만한 산업 역량이 없다고 추론한다. 두 강대국의 장기전에서 승패는 어느 쪽의 제조업 기반이 더 튼튼한지에 달렸다. 국가는 미래 전쟁에서 대량의 탄약을 제조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갖추고 유사시 무기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산업 설비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서방은 둘 다 없다는 것이다.---「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경제전쟁으로서 대러 제재: EU의 자해인가, 러시아의 고립인가?“대러시아 경제 제재가 러시아를 굴복시킬 거라고 오판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사실은 그 반대다. 러시아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수입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면 러시아의 수출은 서방의 경제 후생에 결정적이다. 러시아가 밀, 탄산칼륨, 가스, 석유, 팔라듐, 제련 니켈, 그 밖의 핵심 광물을 서방에 공급하지 않는다면 유럽과 미국의 경제는 유린당할 것이다. 러시아를 제재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역할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 ---「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프레스티튜트와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언론(정보)전쟁마이클 허드슨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인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반전을 말하며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보도하는 매체는 놀랍게도 공화당 우파인 폭스뉴스이다. 오직 이 채널만 러시아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제대로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사태를 우리의 관점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볼 것인지 정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미국에서 우크라이나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은 공화당과 우파이다. 좌파는 찬성 일색이다. 좌파가 집권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지만, 사태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 한 사람도 없다.” 지금 이 전쟁은 네오콘 전쟁이다. 아니 더 정확히 리버럴 혹은 진보네오콘의 대리전쟁이다. ---「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미국의 대전략: 글로벌 나토와 동맹 궁핍화조약의 이름은 ‘북대서양’으로 한정되는데 신전략 개념은 슬그머니 ‘유럽과 대서양 지역’으로 확장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의 “체제 변경 도전systemic challenges” 위협을 강조한다. 더군다나 중러 양국의 전략적 협력 강화로 인해?입만 열면 등장하는?‘규칙 기반 국제 질서’가 위험에 처했다고 한다. 이제 이번 신전략을 나토판 ‘신냉전’ 선언이라 할 만하다. 나토는 좁은 유럽을 벗어나 글로벌 군사동맹을 선언한 셈이다. 인구로 보면 서구 대 비서구는 각각 12퍼센트와 88퍼센트를 차지한다. 서구와 브릭스의 인구는 각각 7억 8000만 명과 32억 명이다.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고, 경제력은 아직 전자가 크지만 10년 안에 뒤집힐 것이다. 브릭스의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가운데 이란과 아르헨티나에 이어 인도네시아와 이집트도 가입을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세계는 서방(한국 포함) 대 브릭스와 글로벌 사우스로 블록화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상당수의 국가는 둘 사이의 완충지대에 남으려 할 것이다. 양대 블록의 관계가 안정될 때까지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이것은 또한 리버럴과 콜로니얼 대 포스트리버럴과 포스트콜로니얼 블록 사이의 분계다. ---「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중에서정의로운 신세계질서?정치군사적 차원에서는 미국과 나토 블록의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개입주의를 억지하는 모멘텀을 찾게 될 것이다. 시리아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이 일례가 될 수 있다. 중국 또한 핵심 이익 영역에 군사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양극 지경학은 미국의 군사비를 압박하고, 이로 인해 미국은 부단히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미국의 고삐 풀린 과잉 팽창을 냉각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을 머지않아 중국과 러시아가 군사력을 해외 투사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완전한 다극 체제가 완성될 것인지는 전망하기 어렵지만, 일단 그 경과단계로 양극과 다극이 혼성하는 체제는 충분히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중에서
-
- [북리뷰] 친일의 오늘 - 안익태애국가와 트로트
- 안익태 〈애국가〉는 표절곡인가? 그리고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각은 역사적 사실인가? 이 책의 대답은 분명코 그렇다이다. 우리 민족의 국가적 정체성이 반일 독립투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생각할 때 친일 작곡가의 곡을 국가를 대표하는 의식에 사용하는 것은 분명 코미디다. 게다가 그 곡이 외국곡을 거의 그대로 표절한 곡이라니 이건 국가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안익태 〈애국가〉는 해방 직후부터 숱한 논란을 야기해왔으며 보수, 진보를 망라해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애국가〉가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표절곡이라는 데 대한 동의를 넘어 분개하는 마음이 저절로 솟구칠 것이다. 전체 16마디 중 무려 12마디의 선율이 거의 그대로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보다 음악적 분석을 통해 표절론에 종지부를 찍고 있는 점이다.한편 최근의 ‘트로트 열풍’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문화생활이야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트로트 바람을 타고 돌연 ‘한국 고유양식’론까지 대두하는 판이다. 하지만 트로트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일본 대중음악인 쇼와가요에 가닿게 된다. 쇼와가요, 곧 엔카와 트로트의 음악적 비교 분석을 통해 그 뿌리가 결국 하나이고, 트로트가 식민 지배라는 구조 속에서 이식 강제된 음악양식임을 실증적으로 밝혀내고 있는 점에 이 책의 또 다른 가치가 빛난다. ■목차 들어가는 말안익태 〈애국가〉와 국가상징 __이해영표절곡을 언제까지 ‘애국가’로 부를 것인가 __김정희음악문화의 가치 선택 __신현국트로트의 음악적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__박영금엔카와 트로트, 그 탄생과 음악적 연관성 __강태구 ■출판사 리뷰 ‘트로트 열풍’이 거세다. 돌연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등장하였다. 트로트 바람을 타고 ‘한국 고유양식’론까지 대두하는 판이다. 하지만 그것이 포스트 민주화 시대, 그리고 팬데믹 시대의 ‘퇴행적’ 감수성이라는 점에서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친일’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가닿기 때문이다.이 책은 친일의 오늘을 상징하는 문화사적 사건으로 에키타이 안(안익태)의 〈애국가〉와 트로트 두 가지를 소환한다. 앞의 것이 과거의 친일을 상징하는 그렇지만 우리의 음악적 공생활을 강제하는 이벤트라면, 뒤의 것은 현재의 은폐된 친일의 대표 일상이다.이해영은 국가상징으로서 안익태 〈애국가〉의 적격성을 역사정의의 관점에서 묻고 있다. ‘애국가’를 통해 ‘애국’이라는 기본가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정언명법이다. 하지만 안익태는 친일과 일제 동맹국 독일을 위한 친나치 부역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비애국적’ 애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용모순이다.작곡가이자 한국음악학자인 김정희는 음악 분석을 통해 안익태 〈애국가〉의 표절성을 고발하고 있다. 〈애국가〉가 표절곡이라니, 그것도 다른 나라의 곡을 표절한 노래라니,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안익태 〈애국가〉는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표절곡이다. 선율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총 16마디 중 12마디의 선율이 유사하고, 〈애국가〉의 출현음 총 57개 중 맥락과 음정이 일치하는 음은 모두 33개로, 일치도가 58%이다. 변주된 음까지 포함하면 그 개수는 41개, 유사도는 72%로 높아진다. 음악 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안익태 〈애국가〉 표절의 실상을 해부한 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박영금은 일본과 한국의 전통음악, 그리고 트로트의 음악 요소를 세밀히 비교함으로써 트로트의 음악적 뿌리가 일본 쇼와가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더 이상 트로트가 ‘한국 고유의 음악양식’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일본근대 음악사를 연구해온 강태구는 엔카로 통칭되는 일본 대중음악 탄생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엔카와 트로트가 어떻게 음악적 골격을 공유하게 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결국 ‘음악의 근대화’라는 문화사적 맥락과,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엔카, 즉 쇼와가요와 트로트는 필연적으로 그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물론 현재 음악적 장르로서의 엔카와 트로트는 한일 양국의 문화풍토 속에서 각자 독자적으로 변용 발전해왔기에 하나의 장르로 묶어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트로트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한국 대중음악의 한 갈래로 자리했다고 해서 그 음악적 뿌리가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올바른 일본문화 수용을 위해서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필요가 있다.결론적으로 이 책은 안익태 〈애국가〉와 트로트라는 두 개의 사건을 통해 친일의 오늘을 보고 있다. 이 두 가지가 오늘의 친일을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문화적 토대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론이 배제된 채 국가 의식과 학교행사 등에서 법정 국가(國歌)의 지위에 있지도 않거니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안익태 〈애국가〉 부르기가 강요되고 친일음악인의 노래가 울려 퍼지니 어찌 친일사상이 우리의 의식을 좀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래서 해방 직후부터 안익태 〈애국가〉를 폐기하고 법적 지위를 갖는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꾸준히 제기되었던 것이다. 더 이상 ‘친일’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살기 위해서도 제대로 된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 이 책은 그 같은 노력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國歌)만들기시민모임’이 일군 공동작업의 결실이다. ■저자소개 - 이해영 1962년 마산에서 나고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당시로선 서독) 마부룩(Marburg) 대학교에서 철학박사(Dr.Phil.)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을 거쳐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지금에 이른다. 이 대학에서 국제평화인권대학원 원장을 맡은 적이 있고, 그 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투기자본감시센터, 참여연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KNCC, 국제통상연구소등 다수의 시민단체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해 왔다. 산업통상부, 몇 개의 국회상임위, 국회입법조사처 등에서도 오랫동안 자문을 한 바 있다. 21세기정치학회 이사를 했고, 한국안보통상학회, 국제지역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박사학위 논문으로 『그람시와 하버마스: 시민사회, 생활세계 그리고 정치』 (독문, 1994)를 상재했고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2000), 『낯선 식민지, 한미 FTA』(2006)를 저술했다. 이 밖의 공저로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2008), 편저로 『1980년대: 혁명의 시대』(1999), 『한미FTA 국민보고서』 (2006), 『한미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2007)가 있다. 논문으로 「칼 슈미트의 정치사상: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2004) (『21세기 정치학회보』 14(2)호), 「역사문제와 ‘동맹의 논리’: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중심으로」(2016) (『씨알의 소리』 2016년, 11·12호) 등 다수가 있다. 주된 연구 영역은 서양정치사상과 국제정치경제다. 대학에선 마키아벨리, 그람시, 슈미트, 하버마스 등을 강의한다. 국제관계에서는 국제통상을 주되게 하면서 한미관계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지정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자소개 - 김정희 김정희는 음악학 박사이다. 작곡가, 한국음악학자. 부산예술대학 음악과,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전문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박사 졸업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를 지냈다.MBC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민요전문방송작가(2011년 5월~2013년 8월) 역임, 국악관현악 〈홍애기〉, 실내악 〈풍구타령〉, 서도피리산조 〈아용소리〉, 무반주남성중창곡 〈가거도 뱃노래〉, 무반주혼성중창곡 〈시선뱃노래〉 등을 작곡했다. 논문에 「평안도민요의 음조직 연구」, 「향토민요에 나타난 전조유형 연구」, 「민요의 시김새 유형에 관한 일고찰」, 「토속민요 음조직의 변이 양상」 등이 있다.
-
- 에키타이안, 알프레드 코르토 그리고 프랑스 비시부역정부 일영사의 딸
- 1944년 히틀러생일주간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페스티벌에 에키타이안이 알프레도 코르토와 협연했다. 공연뒤 프랑스 비시부역정부 일본 영사의 딸에게 코르토가 사인을 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 사진이 게재된 프랑스 일간지 사주는 파리수복후 즉각 체포되고, 신문은 폐간되었다.
-
- 스페인 사가로S'Agaro, 1944년 바르셀로나로 가던 에키타이는 여기서 한 달 정도 체류한다
-
- 에키타이안 과 스페인 바르셀로나 방송국 1944년
-
- [이해영의 구이 보노] "에하라와 에키타이"
- 도쿄생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ㆍ1896~1969)와 평양생 에키타이 안(한국명 안익태ㆍ1906~1965).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근대 이후 한일 관계사의 가장 괴이하고, 희비극적인 한 대목일지 모른다. 꽤 오랫동안 에키타이의 행적을 추적해 온 나는 최근 3건의 원본 문서들과 한 건의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미 CIA 문서고에서 기밀 해제된 것들이다. 문서 중 하나는 전쟁 중인 1944년 4월 18일자 ‘터키에서의 일본 첩보·선전활동’에 관한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1945년 1월 30일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일본 첩보활동’에 대한 보고서다. 전자는 미 전략첩보국(OSS) 이스탄불지부가, 후자는 영국 정보원이 생산한 것이다. 세 번째 문서는 종전 이후인 1949년 11월 18일자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이 미 합참 정보국장에게 보낸 ‘전시 독일의 외교·군사 정보활동’이라는 보고서다. 그리 보면 마지막 보고서가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셈이다. 전시 일본의 재유럽 첩보활동의 본부는 베를린에 있었다. 2차 대전 직후 일본은 처음에는 ‘간첩활동의 수도’라 불리던 포르투갈 리스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태평양전쟁이 확전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위협하게 되자 마찬가지 중립국인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한다. 하지만 터키마저 연합국으로 기울자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미·영 첩보전의 기지로 활용했다. 일본 첩보활동의 동선을 미국은 매우 촘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나라의 첩보 라인이 이렇게 ‘탈탈 털리는’ 경우는 드물다. 오직 패전이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에하라의 회고에 따르면 에키타이안은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까지 자신의 베를린 사저에 기거했다고 했다. 안익태가 나치 독일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에 기재한 주소지가 바로 이 사저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 나와는 다른 시기에 또 다른 이유로 에하라 고이치를 추적한 학자가 있다. 북텍사스대학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학 교수 팀 잭슨이다. 잭슨 교수는 에하라가 하얼빈 소재 731부대의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와 연루돼 있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1938년 에하라가 독일로 건너간 뒤 731부대의 생체실험 정보를 독일과 공유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우슈비츠 등에서의 생체실험과 731부대의 그것은 에하라를 고리로 해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말이다. 잭슨 교수와 서로 자료를 공유해 온 내 쪽에서도 확인해 본 결과 에하라는 1935~1937년 하얼빈의 총무처장으로 있다가 1937년 7월 1일자로 하얼빈 부시장으로 승진한 뒤 1년 뒤 베를린 주재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파견됐다. 731부대가 일왕 히로히토의 칙령에 의해 본격적으로 하얼빈으로 확장 이전된 때가 1936년이다. 만주국의 직제는 이른바 일만정위(日滿定位) 원칙 곧 일계(日係)와 만계의 직위가 정해져 있었다. 일본의 괴뢰국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장, 시장이나 공사 등은 만계에 할당하고 그 아래에 일계를 배치했는데 실세는 당연히 일계였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총무청(처) 중심주의를 기본으로 해서 인사ㆍ재정, 특히 모든 기밀업무를 총무(청)처장이 관장했고, 그 배후에는 관동군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에하라가 하얼빈 시절 직간접적으로 731부대와 연관됐을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다. 위에서 말한 1949년 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는 “재독 일본 첩보망의 총책”이었다. 이 진술은 페터 바이라우흐 나치 독일의 SS 해외첩보부(SD) 소련·일본국장에게서 나온 것이다. 독일과 소련은 군사동맹이었지만, 1943년 8월 이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상호 첩보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에하라는 1945년 1월의 영국 첩보부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당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핀란드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등록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1949년 보고서만큼 정확한 정보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 첩보원은 그가 일본과 러시아 간 협상을 담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OSS 이스탄불지부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베를린에서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약 300명의 정보망을 운용하고 있었다. 에하라 고이치는 외교관이라는 합법적 신분으로 위장한 ‘화이트’였다. 그의 집에 주소지를 둔 에키타이 안은 추축국과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나치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음악으로 응원했다. 에키타이 안이 안익태다.
국시모 세미나더보기 +
국시모 토론회더보기 +
논문더보기 +
연구자료더보기 +
-
고문서
국시모 06-28 15:27 -
보도자료-에키타이 안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 공개 기자회견 관련 자료
에키타이 안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영상 공개 기자회견 관련 자료국시모 07-21 14:37 -
안익태의 만주환상곡 영상자료
폐친 조계문님이 홍영두교수의 중계로 안익태=에키타이 안(아래 사진)의 1942년 9월 '만주환상곡' 장면을 다시 편집해서 유튜브에 성공적으로 복원시켜 놓으셨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미 밝힌 대로 이 40초가량의 연주회 클라이막스 장면은 프랑스국립영상원INA 가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황뉴스의 마지막부분에 실려 있다. 연주장 맨 앞에 앉아 있는 자는 당시 주독 일본대사이고 그 옆은 만주국 영사가 아닌가 싶다. 이 시기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공습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인 시점이었다. 당시 상해 임정은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정식으로 한 바 있다. 아무튼 일본의 놀라운 전광에 당시 독일 전역은 일본붐이 불고 있었다. 안익태가 본격적인 친일 행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이시기이고,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 일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독-일협회가 독일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고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는 인생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가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수상의 친동생이자 일본귀족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 다음이 에키타이였다. 이 영상에서 연주되는 곡은 '만주환상곡'이다. 내가 누차 말한 바 있지만 에키타이는 30년대에 작곡했던 '코리아 환상곡'을 자기표절 바로 만주곡 건국 10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만주환상곡'을 지휘했고, 이후 동일한 곡을 '극동', '동아'라는 이름으로도 지휘했다. 에키타이는 독일점령국이거나 추축국을 중심으로 유럽 곳곳에서 자신의 이 곡 만주환상곡을 지휘했다. 거의 1942년-43년이다. 그러다 1944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당시 파리에 연주여행중이던 에키타이는 프랑코 파시스트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주한다. 논란의 핵심은 지금 한 40초 정도 나오는 만주환상곡이 과연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환상곡이냐 아니냐다. 현재 에키타이 본인이 바로 만주환상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지금 독립기념관에 남아 있는 코리아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던중 가지고 있던 만주환상곡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한 바로 그 것이다 훗날 에키타이는 이 악보를 '민족의 영도자'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그리고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 하면 에키타이가 스페인으로 도주한 뒤에 바르셀로나 방송국 편성표에는 만주환상곡이 방송된 일자 시간등이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음반으로 방송한 사실도 기재되어 있다. 이 편성표는 내가 이미 포스팅한 바 있다. 바로 이 SP음반을 찾아 낸다면, 애국가 논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갈 것으로 본다. 그리된다면 정부도 지금처럼 소닭보듯 할 수는 없을 게다. 안익태의 친일부역 행위 여부는 전혀 논란거리가 아니라고 나는 본다. 그저 이 동영상을 딱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답변은 충분하다. 그리고 7분짜리 영상도 이미 존재한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이 SP음반을 찾으러 가야것다.국시모 08-14 19:54
포토슬라이드1 / 2
Book Review
-
[북리뷰] 애국가에 국가(國歌)의 자격을 묻다
한미 FTA, 영화 스크린쿼터 등 사회와 현실의 첨예한 이슈에 예리한 정론으로 지식인의 책무를 다해온 한신대 이해영 교수가 ‘애국가’를 들고 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음악적 가치가 아닌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애국가가 과연 국가(國歌)로 적절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그리고 정치적 행위로서 국가란 무엇인지 불편하지만 마주해야 할 물음을 우리에게 묵직하게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저자가 오랫동안 치열하게 찾은 자료들의 제시와 분석, 날카롭고 곧은 정치·역사적 관점 속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된다.국가(國歌)는 시민 주권의 구현체인 국가(國家)와의 정서적 결속이자 충성의 서약이다. 따라서 국가(國歌)는 정치적이고 시민 종교적인 면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인 애국을 담아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현재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르고 듣는 안익태의 [애국가]에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숭고한 애국심을 지닌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음악가라는 휘장 속에 가려진 안익태의 그동안 드러나지 않은 행적과 [애국가]의 변천 과정을 통해 과연 우리가 [애국가]를 국가로 제창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것에 대해 합의할 것인지 우리에게 판단을 요구한다. ■목차 들어가는 말1. 안익태 「애국가」의 탄생2. ‘프린스 리’는 누구인가?3. 더블린에서 베를린으로4. 그러면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5. 「에텐라쿠(월천악越天樂)」인가, 「강천성악(降天聲樂)」인가?6.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과 에키타이 안7. 독일 협회(獨日協會,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와 나치 독일8. 1942년 9월 18일 그날의 「만주국」9. 우리에게 만주국이란? 소설가 박영준, 그리고 에키타이 안의 경우9.1. 만주국의 민족 협화9.2. 소설가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 개작9.3. 에키타이 안의 「만주국」 개작10. 「애국가」 논쟁: 국가 상징의 재구성을 위하여10.1. 두 개의 ‘분단’ 애국가의 형성10.2 안익태 「애국가」의 공고화: 이승만과 박정희10.3. 봉인과 도전참고문헌, 사진 및 도판 출전맺는 말 ■출판사 리뷰 에키타이 안에게 애국을 묻다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 판타지'는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됐다. 안익태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조선의 새 '애국가'의 작곡가라고 말하지만 임시 정부는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 신 곡조의 사용을 허가했을 뿐이었다. 더블린 초연 이후 안익태는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의 베를린 저택에 2년 반 가까이 기거했다. 에하라 고이치는 다름 아닌 주 베를린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 정보기관 총책이었으며, 다양한 분야에 있는 300여 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 저자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정황들은 에키타이 안이 일본 정보기관의 특수 공작원이나 정보원이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최소한 에키타이 안은 유럽에서 추축국 중심으로 연주 여행을 하며 일본제국을 선전하는 고급 나팔수 역할을 하고 편익을 제공받았다.일본 궁중음악에서 우리 전통음악으로의 둔갑저자는 안익태의 행적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친일적 성격을 파헤치고 후에 이 작품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때까지의 변모들을 보여준다. 우선 '강천성악(하늘에서 내려온 음악)'은 전통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59년 작곡된 것이 아니다. 악보와 음원은 존재하지 않지만 일본 아악의 선율을 서양 악기로 편곡해 전시 유럽에서 선전용으로 연주한 '에텐라쿠'의 개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남아 있는 영상 자료를 비교하여 저자는 밝히고 있다.또한 에키타이 안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대일본제국 2600년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하고 일본 천황에게 헌정한 '일본 축전곡'의 지휘를 맡았다.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동경으로 적은 에케타이 안의 나치 독일의 제국 음악원 회원증에는 나치 독일 비밀경찰의 ‘정치적 관점에서 흠결이 될 만한 기재 사항 없음’이라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 나치 비밀경찰로부터 정치적 흠결이 없다는 확인을 받았다는 의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관계로부터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독일 협회(獨日協會)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은 예술과 문화 교류를 통해 정치적·군사적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으며 그 중심에 독일협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에키타이 안의 베를린 필 연주회는 바로 이 독일 협회의 주최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만주국 환상곡'의 '한국 환상곡'으로의 변신에키타이 안은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경축 음악회를 위해 만주에서 유행하는 선율들을 활용하여 '만주국 환상곡'을 만든다. 이 곡의 작사는 일본 정보기관 총책 에하라 고이치가 맡았다. 문제는 우리가 부르고 듣는 애국가가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라는 것이다. 일본제국이 만주 사변 이후 세운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건국을 축하위해 만든 곡을 우리의 국가로 재사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에키타이 안은 친일 부역의 산물인 '만주국 환상곡'을 1944년 파리 해방을 앞두고 파시스트 독재 국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면서 악보를 폐기했다. 그리고 1938년 더블린 판을 개작하여 새롭게 1944년 판 '한국 환상곡'을 냈다.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유사한 주제를 되풀이하는 일은 드물지 않지만 스스로 만든 '애국가'를 ‘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하다 그것을 다시 애국이라 주장하면서 그 중간 과정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우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어도단이다.상상의 법정을 열 때해방 이후 안익태의 애국가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대한민국의 정식 국가(國歌)에 대한 필요성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법정(法定) 국가는 아니지만 ‘관행상’ 국가로 기능한 것이다. 이후 안익태는 이승만 정권에 친화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박정희 정권에도 영합하는 행위를 보였다. 2000년 '만주국 환상곡' 영상이 발견되기 전까지 애국적 인물로 영예와 권력을 누렸던 것이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은 폐지되었지만 우리는 상상의 법정을 열어 이른바 ‘기억 투쟁’을 해야 한다. 에키타이 안은 민족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에 협력하는 부역을 했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 저자는 통일 전까지는 현행 그대로 두거나 제2의 애국가를 만들어 부르기, 공론화하여 새로운 애국가를 공모하기 등의 대안들은 제안한다. ■저자소개 - 이해영 1962년 마산에서 나고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당시로선 서독) 마부룩(Marburg) 대학교에서 철학박사(Dr.Phil.)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을 거쳐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지금에 이른다. 이 대학에서 국제평화인권대학원 원장을 맡은 적이 있고, 그 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투기자본감시센터, 참여연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KNCC, 국제통상연구소등 다수의 시민단체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해 왔다. 산업통상부, 몇 개의 국회상임위, 국회입법조사처 등에서도 오랫동안 자문을 한 바 있다. 21세기정치학회 이사를 했고, 한국안보통상학회, 국제지역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박사학위 논문으로 『그람시와 하버마스: 시민사회, 생활세계 그리고 정치』 (독문, 1994)를 상재했고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2000), 『낯선 식민지, 한미 FTA』(2006)를 저술했다. 이 밖의 공저로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2008), 편저로 『1980년대: 혁명의 시대』(1999), 『한미FTA 국민보고서』 (2006), 『한미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2007)가 있다. 논문으로 「칼 슈미트의 정치사상: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2004) (『21세기 정치학회보』 14(2)호), 「역사문제와 ‘동맹의 논리’: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중심으로」(2016) (『씨알의 소리』 2016년, 11·12호) 등 다수가 있다. 주된 연구 영역은 서양정치사상과 국제정치경제다. 대학에선 마키아벨리, 그람시, 슈미트, 하버마스 등을 강의한다. 국제관계에서는 국제통상을 주되게 하면서 한미관계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지정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
[북리뷰] 우리는 우크라이나전쟁과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은 2022년 2월에 시작된 이상한 전쟁, ‘우크라이나전쟁’의 원인, 경과 그리고 해법을 본격적으로 탐구한다.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는 “푸틴 치매설” “러시아군 키예프 대패설” 등 이 전쟁에 대해서는 한쪽(이른바 서방 1세계)으로 치우친 해석/보도에 관하여 “과연 사실이 그러한가?”라고 질문한다.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전쟁은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브레히트의 연극처럼 이 전쟁을 바라보는 독자의 관점을 낯선 방향으로 뒤집고, 이 전쟁의 드러나지 않은 혹은 의도적으로 가려진 국면으로 독자를 잡아당긴다.지은이는 전쟁과 평화는 천당과 지옥처럼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절대로 이을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전쟁의 해석이라고 말한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아니라 상호의 이익과 전략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들리지 않던 우크라이나전쟁의 다른 국면을 가리킨다. 전쟁이 정치라는 선으로 평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전쟁의 해석을 통해 해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바로 그 순간 평화를 상상하고 실행할 교두보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 지정학적 변화를 인식하고 미래로 나아갈 교두보를 찾고자 한다. 나아가 그로부터 이어질 미래 한국의 삶을 상상한다. ■목차 머리말1장. 들어가며정답 없는 전쟁을 바라보며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1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2보론: 전쟁과 시민사회 32장. 전쟁의 성격과 원인1 대리전쟁으로서의 우크라이나전쟁─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실존 위협론’─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대응─우크라이나전쟁은 제2의 아프가니스탄전쟁인가?2 ‘내전의 계속’으로서 우크라이나전쟁─2014년 마이단: 존엄혁명 아니면 ‘뻔뻔한 쿠데타’─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3 루소포비아의 정치학3장. 2022년 전쟁의 전개1 전쟁은 언제 시작되었나?2 전쟁의 1단계: 러시아의 패배인가 거대한 기만인가?3 전쟁 2단계의 전개와 특성─전쟁의 전개 양상: 작전과 전투─아조프연대와 마리우폴 전투─탈산업화 시대의 물량전4 하이브리드전쟁─경제전쟁으로서 대러 제재: EU의 자해인가 러시아의 고립인가?─프레스티튜트와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언론(정보)전쟁5 전쟁의 3단계: 돈바스를 넘어 노보로시야?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1 지정학적 대전환과 신냉전: 단극에서 다극으로─다극 체제로의 평화적 이행은 가능한가?: 지정학의 귀환과 중러 전략협력 체제─미국의 대전략: 글로벌 나토와 동맹 궁핍화─다극 체제와 글로벌사우스2 달러 헤게모니의 위기: 새로운 준비통화의 출현3 산업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 글로벌 경제의 종말?4 정의로운 신세계질서?5장. 한국의 ‘지정치경제적’ 대위기?1 한국의 지정학적 정체성과 오리엔탈리즘2 한국의 대전략: 다극 체제와 포스트 한반도평화프로세스6장. 클라우제비츠와 함께 칸트로?주참고문헌찾아보기 ■책 속으로 대리전쟁으로서의 우크라이나전쟁개전 초기부터 나는 이 전쟁은 고전적 전면전(적지, 적 영토의 점령을 동반한 적의 완전 섬멸과 무장 해제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한 제한전limited war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이 정치적 목표에 과연 우크라이나 전역의 군사적 점령과 이후의 정권 교체까지 포함되는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푸틴은 개전과 동시에 이 전쟁의 정치적 목표로 ‘돈바스 해방’, ‘나치 제거’, ‘탈군사화’를 제시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펼치고 있는 특수 군사작전은 바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인 셈이다. ---「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 나토 동진과 러시아의 대응나토 동진, 특히 그 순번이 우크라이나에 왔을 때 이 문제가 얼마나 휘발성이 강해질지 미국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8년 2월 1일자 모스크바발 비밀 전문을 살펴보자.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 국무장관, 국가안전보장회의, 나토, 유럽연합 협의기구로 전달된 전문은 “러시아는 나토에 의한 포위와 역내 영향력 축소 시도를 인지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안보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할지도 모르는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되지 않은 결과를 우려하고 있다”고 전한다. (중략) 나토 가입 문제가 장기적으로 미러 관계의 최대 불안 요소이며, 양국을 전형적인 대결 태세로 몰고 갈 수 있다고 보고한다. 즉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초래할 위험에 내전과 영토 분할, 신냉전이 모두 포함되므로 이는 결국 러시아가 개입 여부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고 밝힌다. 즉 이 말을 뒤집으면 미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개입을 강요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2014년 마이단: 존엄혁명 아니면 ‘뻔뻔한 쿠데타’저항운동의 첫날부터 급진 민족주의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마이단에 가담했다. 진보, 현대화, 인권 등을 지지하는 자유주의 세력과 급진 민족주의파의 합류는 시민 저항이 반헌법적 정권 타도로 귀결된 무장 투쟁으로 바뀌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마이단 혁명에서 급진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쿠데타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반마이단운동이 형성되었다. 이 근시안적이고 불행한 동맹의 비극적 결과를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다. 젤렌스키는 앞서 약속한 화해 정책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세력 쪽으로 유턴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체 국민 중 소수에 불과한 급진파 정치인, 법원, 경찰관, 미디어 종사자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프로파간디스트들은 “젤렌스키는 유대인이라서 나치가 될 수 없다”라고 되풀이한다. 그러나 민족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어젠다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우크라이나의 정치 과정을 통제하는 이들이 바로 급진 세력이라는 것이 진실이다. ---「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2014년 이른바 유로마이단 운동은 네오나치의 공간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미국이 있었다. 특히 나토 대사를 지냈고 현재 국무부 차관인 빅토리아 눌런드가 핵심 고리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 무장 나치들은 지리멸렬한 우크라이나 군경을 대신해 사실상 미국이 조직한 국립 경찰을 장악했고 국방군에도 정식 편입된 상태다. 조선의 해방 직후를 생각하면 된다. 미국은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이유로, 또한 우크라이나의 민주화를 지원한다는 구실로 인종주의,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나치 집단의 뒷배가 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어떻게 네오나치가 국회의장이 될 수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 ---「2장. 전쟁의 원인과 성격」중에서전쟁의 1단계: 러시아의 패배인가 대기만술인가?젤렌스키는 한편으로 나토가 우크라이나 가입을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해야 나토 가입이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전쟁을 일종의 나토 입장권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4월 러시아 국방부는 ‘전쟁 2단계’를 선언했다. 그러자 서방 언론은 러군이 키예프 점령에 실패해 패주했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가 승리했다는 말이다. 이 우크라이나 대승론은 장기 전쟁의 모멘텀이다. 이로써 전장의 실제 상황과 분리 자립된 상상 속의 내러티브 전쟁이 시작되었다. 관념 속, 머릿속 새로운 전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탈산업화 시대의 물량전첫째, 미국의 연간 포탄 생산량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잘해야 10일에서 2주를 버틸 수 있다. 둘째, 러시아는 지금까지 1100발에서 2100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은 연간 110발의 프리즘PRISM, 500발의 재즘JASSM, 60발의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구매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러시아가 고작 3개월 만에 미국이 한 해에 생산하는 미사일의 네 배를 태워버렸다는 뜻이다. 버시닌 중령은 미국의 포탄 재고로는 우크라이나전쟁을 10~14일 정도만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이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군이 참여한 최근의 워게임에서 영국군은 확전 8일 만에 비축한 포탄을 다 써버렸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 버시닌은 서방은 대규모 전쟁을 치를 만한 산업 역량이 없다고 추론한다. 두 강대국의 장기전에서 승패는 어느 쪽의 제조업 기반이 더 튼튼한지에 달렸다. 국가는 미래 전쟁에서 대량의 탄약을 제조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을 갖추고 유사시 무기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는 산업 설비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서방은 둘 다 없다는 것이다.---「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경제전쟁으로서 대러 제재: EU의 자해인가, 러시아의 고립인가?“대러시아 경제 제재가 러시아를 굴복시킬 거라고 오판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사실은 그 반대다. 러시아는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수입에 의존하지 않는다. 반면 러시아의 수출은 서방의 경제 후생에 결정적이다. 러시아가 밀, 탄산칼륨, 가스, 석유, 팔라듐, 제련 니켈, 그 밖의 핵심 광물을 서방에 공급하지 않는다면 유럽과 미국의 경제는 유린당할 것이다. 러시아를 제재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역할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 ---「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프레스티튜트와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언론(정보)전쟁마이클 허드슨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붙인다. “미국에서 유일하게 반전을 말하며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보도하는 매체는 놀랍게도 공화당 우파인 폭스뉴스이다. 오직 이 채널만 러시아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제대로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사태를 우리의 관점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볼 것인지 정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미국에서 우크라이나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은 공화당과 우파이다. 좌파는 찬성 일색이다. 좌파가 집권 민주당을 장악하고 있지만, 사태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 한 사람도 없다.” 지금 이 전쟁은 네오콘 전쟁이다. 아니 더 정확히 리버럴 혹은 진보네오콘의 대리전쟁이다. ---「3장. 2022년 전쟁의 전개」중에서미국의 대전략: 글로벌 나토와 동맹 궁핍화조약의 이름은 ‘북대서양’으로 한정되는데 신전략 개념은 슬그머니 ‘유럽과 대서양 지역’으로 확장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의 “체제 변경 도전systemic challenges” 위협을 강조한다. 더군다나 중러 양국의 전략적 협력 강화로 인해?입만 열면 등장하는?‘규칙 기반 국제 질서’가 위험에 처했다고 한다. 이제 이번 신전략을 나토판 ‘신냉전’ 선언이라 할 만하다. 나토는 좁은 유럽을 벗어나 글로벌 군사동맹을 선언한 셈이다. 인구로 보면 서구 대 비서구는 각각 12퍼센트와 88퍼센트를 차지한다. 서구와 브릭스의 인구는 각각 7억 8000만 명과 32억 명이다.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력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고, 경제력은 아직 전자가 크지만 10년 안에 뒤집힐 것이다. 브릭스의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가운데 이란과 아르헨티나에 이어 인도네시아와 이집트도 가입을 신청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세계는 서방(한국 포함) 대 브릭스와 글로벌 사우스로 블록화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상당수의 국가는 둘 사이의 완충지대에 남으려 할 것이다. 양대 블록의 관계가 안정될 때까지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이것은 또한 리버럴과 콜로니얼 대 포스트리버럴과 포스트콜로니얼 블록 사이의 분계다. ---「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중에서정의로운 신세계질서?정치군사적 차원에서는 미국과 나토 블록의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개입주의를 억지하는 모멘텀을 찾게 될 것이다. 시리아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이 일례가 될 수 있다. 중국 또한 핵심 이익 영역에 군사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양극 지경학은 미국의 군사비를 압박하고, 이로 인해 미국은 부단히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미국의 고삐 풀린 과잉 팽창을 냉각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것을 머지않아 중국과 러시아가 군사력을 해외 투사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완전한 다극 체제가 완성될 것인지는 전망하기 어렵지만, 일단 그 경과단계로 양극과 다극이 혼성하는 체제는 충분히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4장. 우크라이나전쟁과 신세계질서」중에서
-
[북리뷰] 친일의 오늘 - 안익태애국가와 트로트
안익태 〈애국가〉는 표절곡인가? 그리고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각은 역사적 사실인가? 이 책의 대답은 분명코 그렇다이다. 우리 민족의 국가적 정체성이 반일 독립투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생각할 때 친일 작곡가의 곡을 국가를 대표하는 의식에 사용하는 것은 분명 코미디다. 게다가 그 곡이 외국곡을 거의 그대로 표절한 곡이라니 이건 국가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안익태 〈애국가〉는 해방 직후부터 숱한 논란을 야기해왔으며 보수, 진보를 망라해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애국가〉가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표절곡이라는 데 대한 동의를 넘어 분개하는 마음이 저절로 솟구칠 것이다. 전체 16마디 중 무려 12마디의 선율이 거의 그대로다. 이 책의 가치는 무엇보다 음악적 분석을 통해 표절론에 종지부를 찍고 있는 점이다.한편 최근의 ‘트로트 열풍’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문화생활이야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트로트 바람을 타고 돌연 ‘한국 고유양식’론까지 대두하는 판이다. 하지만 트로트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일본 대중음악인 쇼와가요에 가닿게 된다. 쇼와가요, 곧 엔카와 트로트의 음악적 비교 분석을 통해 그 뿌리가 결국 하나이고, 트로트가 식민 지배라는 구조 속에서 이식 강제된 음악양식임을 실증적으로 밝혀내고 있는 점에 이 책의 또 다른 가치가 빛난다. ■목차 들어가는 말안익태 〈애국가〉와 국가상징 __이해영표절곡을 언제까지 ‘애국가’로 부를 것인가 __김정희음악문화의 가치 선택 __신현국트로트의 음악적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__박영금엔카와 트로트, 그 탄생과 음악적 연관성 __강태구 ■출판사 리뷰 ‘트로트 열풍’이 거세다. 돌연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등장하였다. 트로트 바람을 타고 ‘한국 고유양식’론까지 대두하는 판이다. 하지만 그것이 포스트 민주화 시대, 그리고 팬데믹 시대의 ‘퇴행적’ 감수성이라는 점에서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친일’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가닿기 때문이다.이 책은 친일의 오늘을 상징하는 문화사적 사건으로 에키타이 안(안익태)의 〈애국가〉와 트로트 두 가지를 소환한다. 앞의 것이 과거의 친일을 상징하는 그렇지만 우리의 음악적 공생활을 강제하는 이벤트라면, 뒤의 것은 현재의 은폐된 친일의 대표 일상이다.이해영은 국가상징으로서 안익태 〈애국가〉의 적격성을 역사정의의 관점에서 묻고 있다. ‘애국가’를 통해 ‘애국’이라는 기본가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정언명법이다. 하지만 안익태는 친일과 일제 동맹국 독일을 위한 친나치 부역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렇기에 ‘비애국적’ 애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용모순이다.작곡가이자 한국음악학자인 김정희는 음악 분석을 통해 안익태 〈애국가〉의 표절성을 고발하고 있다. 〈애국가〉가 표절곡이라니, 그것도 다른 나라의 곡을 표절한 노래라니,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안익태 〈애국가〉는 불가리아 노래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의 표절곡이다. 선율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총 16마디 중 12마디의 선율이 유사하고, 〈애국가〉의 출현음 총 57개 중 맥락과 음정이 일치하는 음은 모두 33개로, 일치도가 58%이다. 변주된 음까지 포함하면 그 개수는 41개, 유사도는 72%로 높아진다. 음악 분석을 통해 실증적으로 안익태 〈애국가〉 표절의 실상을 해부한 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 있다.박영금은 일본과 한국의 전통음악, 그리고 트로트의 음악 요소를 세밀히 비교함으로써 트로트의 음악적 뿌리가 일본 쇼와가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더 이상 트로트가 ‘한국 고유의 음악양식’이라는 데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일본근대 음악사를 연구해온 강태구는 엔카로 통칭되는 일본 대중음악 탄생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엔카와 트로트가 어떻게 음악적 골격을 공유하게 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결국 ‘음악의 근대화’라는 문화사적 맥락과, ‘식민 지배’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엔카, 즉 쇼와가요와 트로트는 필연적으로 그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물론 현재 음악적 장르로서의 엔카와 트로트는 한일 양국의 문화풍토 속에서 각자 독자적으로 변용 발전해왔기에 하나의 장르로 묶어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트로트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한국 대중음악의 한 갈래로 자리했다고 해서 그 음악적 뿌리가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올바른 일본문화 수용을 위해서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필요가 있다.결론적으로 이 책은 안익태 〈애국가〉와 트로트라는 두 개의 사건을 통해 친일의 오늘을 보고 있다. 이 두 가지가 오늘의 친일을 정당화하고 강화시키는 문화적 토대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치론이 배제된 채 국가 의식과 학교행사 등에서 법정 국가(國歌)의 지위에 있지도 않거니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안익태 〈애국가〉 부르기가 강요되고 친일음악인의 노래가 울려 퍼지니 어찌 친일사상이 우리의 의식을 좀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래서 해방 직후부터 안익태 〈애국가〉를 폐기하고 법적 지위를 갖는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꾸준히 제기되었던 것이다. 더 이상 ‘친일’이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를 살기 위해서도 제대로 된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 이 책은 그 같은 노력을 주도하고 있는 ‘국가(國歌)만들기시민모임’이 일군 공동작업의 결실이다. ■저자소개 - 이해영 1962년 마산에서 나고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당시로선 서독) 마부룩(Marburg) 대학교에서 철학박사(Dr.Phil.)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서울대학교 지역종합연구소 특별연구원을 거쳐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로 지금에 이른다. 이 대학에서 국제평화인권대학원 원장을 맡은 적이 있고, 그 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투기자본감시센터, 참여연대,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KNCC, 국제통상연구소등 다수의 시민단체에서 직간접적으로 활동해 왔다. 산업통상부, 몇 개의 국회상임위, 국회입법조사처 등에서도 오랫동안 자문을 한 바 있다. 21세기정치학회 이사를 했고, 한국안보통상학회, 국제지역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박사학위 논문으로 『그람시와 하버마스: 시민사회, 생활세계 그리고 정치』 (독문, 1994)를 상재했고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2000), 『낯선 식민지, 한미 FTA』(2006)를 저술했다. 이 밖의 공저로 『한미 FTA 하나의 협정 엇갈린 진실』(2008), 편저로 『1980년대: 혁명의 시대』(1999), 『한미FTA 국민보고서』 (2006), 『한미FTA는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2007)가 있다. 논문으로 「칼 슈미트의 정치사상: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중심으로」(2004) (『21세기 정치학회보』 14(2)호), 「역사문제와 ‘동맹의 논리’: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중심으로」(2016) (『씨알의 소리』 2016년, 11·12호) 등 다수가 있다. 주된 연구 영역은 서양정치사상과 국제정치경제다. 대학에선 마키아벨리, 그람시, 슈미트, 하버마스 등을 강의한다. 국제관계에서는 국제통상을 주되게 하면서 한미관계도 연구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리엔탈리즘과 지정학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자소개 - 김정희 김정희는 음악학 박사이다. 작곡가, 한국음악학자. 부산예술대학 음악과, 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전문사,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박사 졸업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강사를 지냈다.MBC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민요전문방송작가(2011년 5월~2013년 8월) 역임, 국악관현악 〈홍애기〉, 실내악 〈풍구타령〉, 서도피리산조 〈아용소리〉, 무반주남성중창곡 〈가거도 뱃노래〉, 무반주혼성중창곡 〈시선뱃노래〉 등을 작곡했다. 논문에 「평안도민요의 음조직 연구」, 「향토민요에 나타난 전조유형 연구」, 「민요의 시김새 유형에 관한 일고찰」, 「토속민요 음조직의 변이 양상」 등이 있다.
오피니언
-
'일본축전곡'을 지휘했던 에키타이 안
소장하고 있는 안익태 <한국환상곡> LP판, 1961년 LA필하모니 버전이다. 오래전 서라벌레코드사에서 찍었다. 작곡자 자신이 해석하고, 연주도 LA필 정도 되니 음악적으론 꽤나 가치 있다고 볼 만하다. 판의 뒷면을 보면 1942년 베를린 필과 <코리아> 즉 이 곡 <코리아환상곡>을 지휘했고 또 슈트라우스 페스티벌에서 지휘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 이런 식이다. 사실은 날조되고 철저하게 은폐된 채, 진실은 사라지고 허구만 살아 있다. 직전 포스팅한 영상에서 똑똑히 볼 수 있듯, 전쟁중 그것도 나치 심장부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주독 일본대사와 만주국 고위층을 모신 자리에서 "대한사람 대한으로 우리 나라 만세"를 합창했다는 말 아닌가. ... 마찬가지 에키타이가 슈트라우스 페스티벌에서 지휘한 것은 슈트라우스가 일본 황기 2,600년을 기념해 작곡한 <일본축전곡>이었다. 허기사 그런 슈트라우스 출생 150주년을 맞아 작년 우리 KBS가 기념 연주회를 했으니 아직도 길 길이 멀다. 작년 그 맘때쯤 슈트라우스와 에키타이 그리고 <일본축전곡>을 상기한 것이 전국에 나 하나라면 이는 쫌 심각하다 해야하나.
-
일본 천황 찬양을 지휘한 에키타이 안
비엔나엔 유명한 교향악단이 2개 있다. 비엔나 필하모니와 비엔나 심포니다. 앞에 것이 훨씬 우월한 명성을 누린다.에키타이 안은 후자 곧 비엔나 심포니와 42년 3월과 43년 2 월 두번 협연한 것으로 보인다. 안익태 시리즈 맨 처음 포스팅한 것이 1943년 2월 자신의 <만주국> 연주 프로그램이었다. 동부전선 곧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의 패배가 확실시 되던 급박한 시점이었다.그보다 일년 앞서 42년 3월 그는 비엔나 심포니를 지휘했다. 프로그램을 보자면 베에토벤 <에그몬트서곡>, 바흐 <토카타, 아다지오와 푸가>, <야악>, 리스트 피아노협주곡 2번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번호 84, <일본축전곡 , 황기2600 년 봉축음악>등이다.이 중 밤의 음악이란 뜻인 <야악>은 현재 악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에텐라쿠>처럼 일본아악을 편곡한게 아닌가 싶다.이날 연주에서 중심은 아무래도 황기 2,600년을 봉축하기 위해 일본정부가 의뢰하고 나치 선전상 괴벨스가 슈트라우스에게 요청해 만든 <일본축전곡>이다. 이 곡은 5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바다풍경 2.벚꽃축제 3.화산폭발 4.사무라이의 공격 5. 천황찬가. 추측건대 이연주를 고리로 슈트라우스와 에키타이 안이 만나게 된 것으로 보이고, 당대의 문화권력 슈트라우스는 안에게 꽤나 만족했던지 다른 악단등에 안의 추천장을 써주게 된다. 하지만 이 작품 은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아무튼 이렇게 에키타이 안은 일본 천황을 찬양하는 곡을 지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