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8-1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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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키타이안,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영상 최초공개! 그리고 ‘안익태애국가
안익태 애국가 08-14 17:07
[Interview] The untold story behind South Korea’s national anthem
국시모 06-28 13:13
안익태의 만주환상곡 영상자료
자료실 08-14 19:54
만주환상곡 소개 영상, 2차대전 프랑스 방송
자료실 12-31 19:07
에텐라쿠 강천성악 in 1941 헝가리
자료실 12-31 19:06
안익태의 '만주환상곡'은 대한민국 애국가인 '한국환상곡'
안익태 애국가 12-31 17:35
루이웬과 에하라 고이치
자료실 12-3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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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봉 05-11 21:11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 출발을 알리는 세미나 열려

    [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 등을 맞이하면서 대한민국은 친일청산이란 화두가 뜨겁게 전국을 달구었다. 그리고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의 ‘안익태 케이스’ 출판과 함께 오랜 시간 ‘안익태 애국가’의 친일 문제와 표절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은 지난 8월 8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안민석 의원이 주최하고 씨알재단이 주관한 공청회에 이해영 교수와 한예종 김정희 교수가 참석해 안익태 애국가의 친일.친나치행각과 불가리아 군가 표절 문제를 세부적으로 밝혔다. 오랜시간 준비위원회를 구성해온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은 11월 1일 국회에서 발표회를 개최하며 본격적인 안익태 애국가를 대체할 국가(國歌)만들기 시민 운동본부를 출발시켰다. 한신대학교 교수이며 대학원장인 이해영 교수는 ‘에하라 고이치와 에키타이 안 : 졸저 <안익태 케이스> 보유(補遺)’에 대해 발표했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김수현 연구교수는 ‘새로운 국가(國家) 제정 논의의 출발점 – 항일가요 애국가 연구’에 대해,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김정희 외래교수는 ‘세상의 國歌, 우리의 國歌 - 國歌, 누가,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발표했다. 첫 발표자인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가 ‘에키타이 안’이 되어 일본인 에하라 고이치와 연결된 부분을 파헤쳤다. 만주국 건국 축하를 위해 ‘만주환상곡’을 작곡한 ‘에키타이 안’의 발걸음을 그의 독일생활과 프랑스에서 활동,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기울어가던 마지막 시기 스페인으로 도주한 흔적까지 추적하며 해방 후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에서 애국지사로 변신한 ‘에키타이 안’을 고발하고 있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김수현 연구교수는 국가(國歌)라 부르지 않고 애국가(愛國歌)라고 부르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지적하며 법으로 제정된 국가(國歌)가 한국에 없다는 현실을 지적했다. 김수현 교수는 가사문제와 작자미상 등 안익태 애국가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앞선 연구에서 다뤄진 안익태 애국가의 표절문제가 1964년 5월 19일 ~ 26일 사이 열린 제3회 서울국제음악회에서 불가리아 출신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에 의해 이미 지적됐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김수현 교수는 지난 70여년간 안익태 애국가의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지적된 가운데 새로운 애국가를 지정하려고 한다면 역사적 맥락, 즉 항일운동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애국가의 역사적 배경이 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가리아 출신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가 지적했던 불가리아 군가를 표절했다는 안익태 애국가의 곡 전체를 분석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정희 외래교수는 불가리아 군가 ‘오 도브루잔스키 크라이’와 안익태 애국가를 1:1로 악보비교를 했다. 김정희 교수의 악보비교분석은 일반인들도 한 눈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국가(國歌)만들기 시민모임’에서도 김정희 교수의 악보비교분석을 중심으로 안익태의 친일.친나치행각 뿐만아니라, 표절이라는 부분에 또 하나의 초점을 맞춰 안익태 애국가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애국가, 더 나아가 國歌로 자격을 상실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이날 행사는 국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연구회'(대표의원 인재근, 강창일)가 주최했으며, 소속 의원으로 소병훈, 오영훈 의원이 연구의원을 맡고 있으며, 정회원으로 신경민, 심재권, 유승희, 유은혜, 이인영, 이해찬, 장정숙, 주승용, 추미애 의원등이 있으며, 준회원으로 권미혁, 기동민, 김영진, 김용태, 김철민, 박완주, 박홍근, 우원식, 윤관석, 윤후덕, 전혜숙, 정동영, 홍익표, 황희 의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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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봉 05-11 19:59

    안익태의 ‘애국가’를 꼭 불러야 하나?

    [더뉴스=김재봉 선임기자] 애국가(愛國歌)의 뜻(意味)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를 말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 고난의 역사를 이겨내고 앞으로 함께 나가자는 뜻을 내포한 노래, 과거의 찬란한 역사와 영광, 그리고 현재의 자긍심을 담은 노래 등 다양한 노래들이 애국가로 불릴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애국가는 안익태의 애국가 외에는 존재하지 않은 상황이 이승만-박정희 정권출범과 함께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고향의 봄’, ‘임을 위한 행진곡’, 윤도현의 아리랑‘, 아, 대한민국’ 등 수 많은 노래가 애국가로 불릴 수 있다. 대한민국은 법률로 수도(首都)와 국가(國歌)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 기능을 다하고 있지만,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고 정하지 않고 있으며, 안익태의 애국가 역시 ‘대한민국의 국가(國歌)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로 한다’란 결정을 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안익태는 친일행각에 히틀러 치하의 독일제국에서 나찌의 선전도구로 또는 일제의 선전도구로 활용된 음악가다. 각종 자료를 통해 안익태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저질렀고, 나찌 치하의 독일에서 히틀런 편에 서서 음악활동을 하고 돈을 받은 사람이다. 위키백과에서 안익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고 있다. “안익태(安益泰, 스페인어: Eak-tai Ahn, 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는 대한민국 출신의 스페인 작곡가, 첼리스트,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이다.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1945년 8.15 조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서울의 숭실중학교와 숭실고등학교에서 각각 명예 졸업장을 수여받기도 한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國歌)인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대표 작품으로 한국환상곡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 있다.” 안익태 케이스의 저자 이해영 교수(한신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국제관계학부)는 오랜 시간 안익태와 그가 작곡한 애국가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다. 6월 24일 가평 ‘포럼 1939:음담패설’에서 이해영 교수와 안익태기념재단 김형석 연구위원장의 찬반논쟁이 있었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친나찌행각 및 1942년 9월 18일 연주된 만주국환상곡이 일제의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 10년을 찬양하는 내용이었으며, 이후 80년대 ‘안익태추모사업회’에서 만주국 찬양 부분에 ‘나의 사랑 한반도’로 변경한 사실을 지적했다. 하지만 김형석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은 안익태 애국가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안익태가 음악가로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였으며 독일제국시대였는데,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안익태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시기였다고 주장했다. 김형석 연구위원장의 이 같은 인식에 대해 취재기자는 “일제 강점기였고 독일 제국시대였다고 하지만, 한반도 내에서도 조국 독립운동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일제가 세운 만주국 안에서도 항일독립투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왜 안익태는 친일을 선택했는가?”라고 질문했지만,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명쾌하게 답변하지 못했다. 토론에서 이해영 교수는 “대한민국 애국가로 법률로 공식 지정된 곡은 없다. 애국가는 대통령령으로 제정되어 법률상 근거가 없고, 대통령령에도 ‘애국가를 부른다’라고 되어 있지, 누구의 애국가를 부르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사실 확인을 하며, “대통령령은 공무원들은 지킬 의무가 있지만, 국민들은 지킬 의무가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대한민국은 성문법의 국가이며, 관습법을 지키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언급한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의 애국가를 애국가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서울을 대한민국 수도로 하는 것도 관습법 아닌가?”란 주장으로 안익태의 애국가가 대한민국 공식 애국가로 문제점이 없다고 주장했다. 토론은 격한 논쟁으로 번졌다. 김형석 연구위원장은 안익태 애국가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방적인 이야기를 이어갔고,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 기념재단에서는 안익태의 친일부역행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맞섰다. ‘애국가, 대한민국의 국가로서 정당한가?’ 토론회는 사실 안익태기념재단에서 회심의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하지만 참가자들에게 안익태의 친일행각과 친나찌행각을 더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자리로 안익태의 애국가를 국가로 부를 수 없다는 당위성을 더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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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키타이안,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영상 최초공개! 그리고 ‘안익태애국가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 이미 나는 약 10년 전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의 자료실에서 찾아낸 40초가량의 이 연주회 클라이맥스 장면을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영상은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이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쟁뉴스의 후반부에 실려 있다. 당시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말미에 문화뉴스 꼭지에 실린 이 연주회 소식 말고도 그 날의 전쟁뉴스는 꽤 긍정적인 톤이다. 이후 나는 <안익태케이스>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사전 예약을 거쳐 베를린 소재 독일연방기록원(Bundesarchiv)산하 영상원(Filmarchiv)를 방문했다. 저 클라이맥스 장면의 원 필름을 보기위해서다. 이 영상은 2000년대 잠시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파리에 머물 때였는데, 그 전날 베를린에서 하룻밤을 묶고 아침 일찍 영상원을 찾으니 직원이 내가 신청한 필름을 준비해 두었다. 영상원은 과거 내가 베를린에 살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이미 연방기록원은 안익태 즉 나치 시절 기록물에 포함된 에키타이안 파일을 열람 복사하기 위해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영상원은 처음이었다. 혼자 앉아 보고 또 보고하면서 직원의 동의하에 나의 휴대폰으로 그 영상을 두 번 촬영했다. 몇 달 전에 예약하고 또 파리에서 비행기로 이 이른 시간에 방문했던 때문인지 직원도 촬영요청에 선 뜻 동의해 주었다. 물론 대각선으로 검은 테이핑을 한 뒤에 말이다. 몇 년 전 나는 광복회에 바로 이 필름 원본 입수를 권고한 적이 있다. 비록 친일파의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역사 아닌가, 그렇다면 공법단체인 광복회라면 그 필름을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지금 공개하는 이 필름은 그렇게 입수된 원본 필름의 사본이다. 이 필름은 당시 국회토론회에서 공개한 바 있다. 그리고 축약본이 광복회 홈피에 올라간 적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이 영상은 전 국민이 한 번은 보고 들어야 할 우리 흑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판단된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안익태가 만든 ‘애국가’는 트로트처럼 ‘사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비록 법정 국가는 아니지만 ‘공적 의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안익태의 ‘명예회복’을 외치고 나섰다. 나로서는 국민 스스로가 이런 일부 극소수 뉴라이트의 주장에 얼마나 동의할 것인지 충분한 자료와 근거를 제공하고 판단해 보자는 쪽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에키타이안의 2차 대전 시기 영상자료는 모두 3가지다. 먼저 프랑스 국립영상원 자료가 있다. 두 번째는 시기적으로 이보다 앞선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 깊은 페스티 비가도홀에서 열린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 1주년 기념 연주회 영상이다. 여기서 에키타이안은 일본을 대표해서 ‘에텐라쿠’를 연주했다. 해방 후 에키타이안은 이를 ‘강천성악’이라 달리 부르며 청중을 우롱한 바 있다. 앞의 두 영상은 모두 내가 올려놓은지라 유튜브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영상이 바로 여기에 소개한 영상이다. 첫 번째 영상은 약 7분 50초 정도인 이 영상의 마지막 40초를 편집해 나치의 전쟁뉴스 영상에 내보낸 것이다. 이 곡이 연주된 때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인 시점에서 1년이 채 안 된 시점이다. 당시 상해 임정은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발동해 조선과 일본은 전쟁상태였다. 일본의 놀라운 전과를 목격한 독일 전역은 당시 일본 붐이 불고 있었다.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 일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독-일협회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가 독일 전역에, 그리고 <일독협회>가 일본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 바로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는 어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안이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전시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자 일본 귀족으로서 에키타이와 마찬가지 지휘자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다음이 에키타이였다. <독일협회>는 나치선전성의 지휘·감독을 받는 기관이었다. 즉 그 정점에 괴벨스가 있다. 안익태를 추적하면서 여러 차례 서신 교환을 한 바 있는 미 시카고대학 음대 티모시 잭슨 교수는 1942년 연주회 녹화가 괴벨스의 지시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시점 독일외교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반소 제2 전선을 열어 주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독일 동부전선의 압박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이 연주회는 일본 괴로 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이었다. 이 행사는 만주일대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던 그런 각종의 기념행사 중 하나였다. 즉 에키타이안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한 바로 그 적국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개최된 각종의 행사에 일본을 대표해서 이적행위에 솔선수범한 것이다. 에키타이안이 하필 ‘만주국’을 찬양하는 곡을 만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의 스폰서인 에하라 고이치가 당시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이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참사관이었지만 에하라 고이치는 동경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얼빈시 부시장을 역임한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하얼빈시 총무처장 그리고 부시장으로 재직 시 731부대 창설에 핵심적으로 조력하고 이후 독일과 일본의 생화학전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급상 참사관이지만 정식 공사인 한인 여의문 보다 실세였다. 바로 그런 그의 사저에 에키타이안은 2년 반 가까이 주소지를 두고 여기서 기식했다. 바로 베를린 호숫가에 있는 이 집에서 작곡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그리고 미 CIA 전신인 OSS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 고이치는 전쟁 말기 일본의 재독 첩보조직의 총책이었다, 쉽게 말해 재독 일본 스파이 수장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은 셈이다. 에키타이안과 같은 시기 에하라 고이치가 관리하던 베를린 체류 또 다른 조선인이자 현대 무용가 박영인(쿠니 마사미)을 OSS는 ‘가장 영리한 첩보원agent’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스파이총책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안은? 박영인은 전시에 독일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다녔다. 에키타이안은 전시에 추축국과 친추축국 그리고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그들을 위해 복무했다. 이 영상의 오프닝 크레딧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만주제국Mandschoutikuo 건국 10주년 기념 축하 연주회,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베를린 대편성 라디오방송교향악단이 라미LAMY 합창단 협연하에 작곡가 에키타이안이 지휘하고 에하라 고이치가 합창 대본을 쓴 ’축전곡Festmusik’.” 그리고 배경에 깔린 총보의 제목도 ‘축전곡’으로 되어 있고 바로 그 밑에 에하라 고이치가 일본어로 쓴 ‘오족협화’를 찬양하는 합창대본이 음역되어 있다. 1942년 9월 18일의 이 영상은 이 축전곡의 마지막 악장이다. 영상의 5:30초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에하라 고이치다. 그리고 합창대본을 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동양인이 만주국 공사 여의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후 그는 중국에서 ‘한간’ 혐의로 총살되었다. 당시 주독 일본대사 육군중장 오시마 히로시는 영상 6:36초에 등장한다. ‘히틀러보다 더 히틀러스럽다’는 평을 받던 인물이다. 6:40초 즈음 에하라 고이치가 다시 잠깐 등장하고 6:59초 너무나 익숙한 애국가의 ‘우리나라 만세’와 거의 같은 선율이 등장한다. 물론 이때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만주국이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에키타이가 청중석을 가리키는 데 아마 에하라 고이치가 아닐까 싶다. 이 영상은 전곡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1944년 말 이후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해지자, 사실상 추축국 편이었던 스페인의 프랑코정권은 추축국을 지원하기 위해 에키타이안의 '만주국'을 수차례 방송한 사실이 바르셀로나 라디오 방송국 편성표에 그 일자, 시간과 더불어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이 방송이 '음반'을 통해 나갔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축전곡’의 전곡을 들어야 과연 에키타이안이 안익태 애국가선율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로서는 꽤 장기간, 이 음반을 추적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상에서도 보듯 악보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에키타이안 본인이 이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 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코리아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가 스페인 도피 중 가지고 있던 이 곡의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한 바로 그것이다. 나는 몇 년 전 에키타이안이 만주국 악보를 한국환상곡으로 표지 갈이를 한 바로셀로나 북쪽 휴양지 사가로라는 곳을 직접 답사한 적이 있다. 훗날 에키타이는 이 악보를 '민족의 영도자'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1955년 문득 애국자로 둔갑 이승만 탄신기념연주를 위해 귀국한 에키타이안은 이승만에게 이 악보를 헌정한다. 바로 그 악보는 현재 김형석이 관장으로 있는 독립기념관에 있다! 1944년 이미 전황은 가망이 없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 히틀러 생일주간에 열린 연례 베토벤 페스티벌 연주를 위해 에키타이안은 에하라 고이치와 파리를 방문했다. 이 연주회에서 저 유명한 알프레드 코르토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협연했다. 알프레드 코르토는 그 직후 파리가 해방된 뒤 ‘입국 금지 인물 persona non grata’로 지목되어 한참 동안 프랑스에 올 수가 없었다. 에키타인안도 이 리스트에 올랐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연주를 끝으로 에키타이는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망’간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애국자가 이제 해방이 되었는데 그리운 조국으로 가지 않았을까. 일본인이지만 일본으로, 조선인이지만 조선으로도 가지 못한, 그렇다고 독일에 남을 수도 미국으로 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의 스페인행은 그의 친일, 친나치 행적을 은폐하기에 나름 '잘 된(?)' 선택일지 모르겠다. 프랑코 독재가 싫어 파블로 카잘스는 살아생전 조국인 스페인에 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가 나치 패망 후 손쉽게 도망갈 곳 중 하나가 스페인이었다. 최근 나는 해외 경매사이트에 에키타이안의 ‘흰백합화’ SP판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곡은 특히나 에키타이안의 몇 안 되는 곡 중 작곡 연도나 곡 내용이 불명인 상태로 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어디서 작곡되었는지는 이미 밝혀졌다. 에하라 고이치가 전후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귀국한 뒤 동경에서 자신의 후일담을 수필로 낸 것을 내가 발굴할 적이 있다. 여기에 이 ‘축전곡’과 함께 ‘흰백합화’도 자신의 집에서 작곡했다고 되어 있다. 가격이 터무니없어 나는 이 음반을 사지 않았다. 아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만주국 ‘축전곡’ 음반이 경매사이트에 등장하면 그것은 내가 산다. 누가 에키타이안의 명예회복을 말한다. 하지만 그전에 이런 자의 애국가를 불러야 했던 우리 국민의 ‘명예회복’이 먼저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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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키타이안,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영상 최초공개! 그리고 ‘안익태애국가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 이미 나는 약 10년 전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의 자료실에서 찾아낸 40초가량의 이 연주회 클라이맥스 장면을 유튜브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영상은 프랑스국립영상원(INA)이 소장한 나치독일 점령기인 1942년 10월 2일자 전쟁뉴스의 후반부에 실려 있다. 당시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하지 않았던 때문인지 말미에 문화뉴스 꼭지에 실린 이 연주회 소식 말고도 그 날의 전쟁뉴스는 꽤 긍정적인 톤이다. 이후 나는 <안익태케이스>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사전 예약을 거쳐 베를린 소재 독일연방기록원(Bundesarchiv)산하 영상원(Filmarchiv)를 방문했다. 저 클라이맥스 장면의 원 필름을 보기위해서다. 이 영상은 2000년대 잠시 국내에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파리에 머물 때였는데, 그 전날 베를린에서 하룻밤을 묶고 아침 일찍 영상원을 찾으니 직원이 내가 신청한 필름을 준비해 두었다. 영상원은 과거 내가 베를린에 살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이미 연방기록원은 안익태 즉 나치 시절 기록물에 포함된 에키타이안 파일을 열람 복사하기 위해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영상원은 처음이었다. 혼자 앉아 보고 또 보고하면서 직원의 동의하에 나의 휴대폰으로 그 영상을 두 번 촬영했다. 몇 달 전에 예약하고 또 파리에서 비행기로 이 이른 시간에 방문했던 때문인지 직원도 촬영요청에 선 뜻 동의해 주었다. 물론 대각선으로 검은 테이핑을 한 뒤에 말이다. 몇 년 전 나는 광복회에 바로 이 필름 원본 입수를 권고한 적이 있다. 비록 친일파의 수치스러운 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역사 아닌가, 그렇다면 공법단체인 광복회라면 그 필름을 소장하고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지금 공개하는 이 필름은 그렇게 입수된 원본 필름의 사본이다. 이 필름은 당시 국회토론회에서 공개한 바 있다. 그리고 축약본이 광복회 홈피에 올라간 적도 있다. 그리고 이제 이 영상은 전 국민이 한 번은 보고 들어야 할 우리 흑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판단된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모두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가진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안익태가 만든 ‘애국가’는 트로트처럼 ‘사적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비록 법정 국가는 아니지만 ‘공적 의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김형석 신임 독립기념관장이 안익태의 ‘명예회복’을 외치고 나섰다. 나로서는 국민 스스로가 이런 일부 극소수 뉴라이트의 주장에 얼마나 동의할 것인지 충분한 자료와 근거를 제공하고 판단해 보자는 쪽이다. 현재 남아 있는 에키타이안의 2차 대전 시기 영상자료는 모두 3가지다. 먼저 프랑스 국립영상원 자료가 있다. 두 번째는 시기적으로 이보다 앞선 1941년 10월 10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서 깊은 페스티 비가도홀에서 열린 헝가리의 추축국 가입 1주년 기념 연주회 영상이다. 여기서 에키타이안은 일본을 대표해서 ‘에텐라쿠’를 연주했다. 해방 후 에키타이안은 이를 ‘강천성악’이라 달리 부르며 청중을 우롱한 바 있다. 앞의 두 영상은 모두 내가 올려놓은지라 유튜브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영상이 바로 여기에 소개한 영상이다. 첫 번째 영상은 약 7분 50초 정도인 이 영상의 마지막 40초를 편집해 나치의 전쟁뉴스 영상에 내보낸 것이다. 이 곡이 연주된 때는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인 시점에서 1년이 채 안 된 시점이다. 당시 상해 임정은 진주만 공습 직후 대일 선전포고를 발동해 조선과 일본은 전쟁상태였다. 일본의 놀라운 전과를 목격한 독일 전역은 당시 일본 붐이 불고 있었다. 독-일문화협정에 따라 독, 일 양국은 프로파간다 활동을 상호지원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반관반민의 <독-일협회 (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가 독일 전역에, 그리고 <일독협회>가 일본 전역에 조직되어 있었다. 바로 이 협회의 지원으로 에키타이는 어떤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물론 에키타이안이 재독 일본음악인의 선두 혹은 일진은 아니었다. 당시 전시 일본 총리의 친동생이자 일본 귀족으로서 에키타이와 마찬가지 지휘자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고노에가 먼저고 그다음이 에키타이였다. <독일협회>는 나치선전성의 지휘·감독을 받는 기관이었다. 즉 그 정점에 괴벨스가 있다. 안익태를 추적하면서 여러 차례 서신 교환을 한 바 있는 미 시카고대학 음대 티모시 잭슨 교수는 1942년 연주회 녹화가 괴벨스의 지시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시점 독일외교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반소 제2 전선을 열어 주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독일 동부전선의 압박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다. 이 연주회는 일본 괴로 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이었다. 이 행사는 만주일대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던 그런 각종의 기념행사 중 하나였다. 즉 에키타이안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선전포고한 바로 그 적국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개최된 각종의 행사에 일본을 대표해서 이적행위에 솔선수범한 것이다. 에키타이안이 하필 ‘만주국’을 찬양하는 곡을 만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자신의 스폰서인 에하라 고이치가 당시 주베를린 만주국 공사관 참사관이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참사관이었지만 에하라 고이치는 동경대 법대를 졸업하고 하얼빈시 부시장을 역임한 뒤 만주국 참사관으로 부임한 인물이었다. 하얼빈시 총무처장 그리고 부시장으로 재직 시 731부대 창설에 핵심적으로 조력하고 이후 독일과 일본의 생화학전무기 개발 프로그램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급상 참사관이지만 정식 공사인 한인 여의문 보다 실세였다. 바로 그런 그의 사저에 에키타이안은 2년 반 가까이 주소지를 두고 여기서 기식했다. 바로 베를린 호숫가에 있는 이 집에서 작곡한 곡이 바로 이 곡이다. 그리고 미 CIA 전신인 OSS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 고이치는 전쟁 말기 일본의 재독 첩보조직의 총책이었다, 쉽게 말해 재독 일본 스파이 수장의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그의 후원을 받은 셈이다. 에키타이안과 같은 시기 에하라 고이치가 관리하던 베를린 체류 또 다른 조선인이자 현대 무용가 박영인(쿠니 마사미)을 OSS는 ‘가장 영리한 첩보원agent’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스파이총책의 집에 기식하던 에키타이안은? 박영인은 전시에 독일군을 위한 위문 공연을 다녔다. 에키타이안은 전시에 추축국과 친추축국 그리고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그들을 위해 복무했다. 이 영상의 오프닝 크레딧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만주제국Mandschoutikuo 건국 10주년 기념 축하 연주회,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베를린 대편성 라디오방송교향악단이 라미LAMY 합창단 협연하에 작곡가 에키타이안이 지휘하고 에하라 고이치가 합창 대본을 쓴 ’축전곡Festmusik’.” 그리고 배경에 깔린 총보의 제목도 ‘축전곡’으로 되어 있고 바로 그 밑에 에하라 고이치가 일본어로 쓴 ‘오족협화’를 찬양하는 합창대본이 음역되어 있다. 1942년 9월 18일의 이 영상은 이 축전곡의 마지막 악장이다. 영상의 5:30초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에하라 고이치다. 그리고 합창대본을 쓴 사람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있는 동양인이 만주국 공사 여의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후 그는 중국에서 ‘한간’ 혐의로 총살되었다. 당시 주독 일본대사 육군중장 오시마 히로시는 영상 6:36초에 등장한다. ‘히틀러보다 더 히틀러스럽다’는 평을 받던 인물이다. 6:40초 즈음 에하라 고이치가 다시 잠깐 등장하고 6:59초 너무나 익숙한 애국가의 ‘우리나라 만세’와 거의 같은 선율이 등장한다. 물론 이때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만주국이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에키타이가 청중석을 가리키는 데 아마 에하라 고이치가 아닐까 싶다. 이 영상은 전곡이 아니다. 하지만 이 곡이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1944년 말 이후 전황이 추축국에 불리해지자, 사실상 추축국 편이었던 스페인의 프랑코정권은 추축국을 지원하기 위해 에키타이안의 '만주국'을 수차례 방송한 사실이 바르셀로나 라디오 방송국 편성표에 그 일자, 시간과 더불어 고스란히 나와 있다. 그리고 이 방송이 '음반'을 통해 나갔다고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이 ‘축전곡’의 전곡을 들어야 과연 에키타이안이 안익태 애국가선율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로서는 꽤 장기간, 이 음반을 추적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영상에서도 보듯 악보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에키타이안 본인이 이곡의 악보를 폐기처분했고, 영상 속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용했을 악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코리아환상곡>의 가장 오래된 버전은 에키타이가 스페인 도피 중 가지고 있던 이 곡의 악보를 폐기하고 이를 이보한 바로 그것이다. 나는 몇 년 전 에키타이안이 만주국 악보를 한국환상곡으로 표지 갈이를 한 바로셀로나 북쪽 휴양지 사가로라는 곳을 직접 답사한 적이 있다. 훗날 에키타이는 이 악보를 '민족의 영도자' 이승만에게 헌정했다. 1955년 문득 애국자로 둔갑 이승만 탄신기념연주를 위해 귀국한 에키타이안은 이승만에게 이 악보를 헌정한다. 바로 그 악보는 현재 김형석이 관장으로 있는 독립기념관에 있다! 1944년 이미 전황은 가망이 없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 히틀러 생일주간에 열린 연례 베토벤 페스티벌 연주를 위해 에키타이안은 에하라 고이치와 파리를 방문했다. 이 연주회에서 저 유명한 알프레드 코르토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황제를 협연했다. 알프레드 코르토는 그 직후 파리가 해방된 뒤 ‘입국 금지 인물 persona non grata’로 지목되어 한참 동안 프랑스에 올 수가 없었다. 에키타인안도 이 리스트에 올랐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연주를 끝으로 에키타이는 프랑코 파시스트 정권이 집권한 스페인으로 ‘도망’간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애국자가 이제 해방이 되었는데 그리운 조국으로 가지 않았을까. 일본인이지만 일본으로, 조선인이지만 조선으로도 가지 못한, 그렇다고 독일에 남을 수도 미국으로 갈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의 스페인행은 그의 친일, 친나치 행적을 은폐하기에 나름 '잘 된(?)' 선택일지 모르겠다. 프랑코 독재가 싫어 파블로 카잘스는 살아생전 조국인 스페인에 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가 나치 패망 후 손쉽게 도망갈 곳 중 하나가 스페인이었다. 최근 나는 해외 경매사이트에 에키타이안의 ‘흰백합화’ SP판이 나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곡은 특히나 에키타이안의 몇 안 되는 곡 중 작곡 연도나 곡 내용이 불명인 상태로 있던 바로 그 곡이었다. 어디서 작곡되었는지는 이미 밝혀졌다. 에하라 고이치가 전후 모스크바, 만주를 거쳐 귀국한 뒤 동경에서 자신의 후일담을 수필로 낸 것을 내가 발굴할 적이 있다. 여기에 이 ‘축전곡’과 함께 ‘흰백합화’도 자신의 집에서 작곡했다고 되어 있다. 가격이 터무니없어 나는 이 음반을 사지 않았다. 아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 만주국 ‘축전곡’ 음반이 경매사이트에 등장하면 그것은 내가 산다. 누가 에키타이안의 명예회복을 말한다. 하지만 그전에 이런 자의 애국가를 불러야 했던 우리 국민의 ‘명예회복’이 먼저다. 그래야 한다.

    [이해영의 구이 보노] "에하라와 에키타이"

    도쿄생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ㆍ1896~1969)와 평양생 에키타이 안(한국명 안익태ㆍ1906~1965).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근대 이후 한일 관계사의 가장 괴이하고, 희비극적인 한 대목일지 모른다. 꽤 오랫동안 에키타이의 행적을 추적해 온 나는 최근 3건의 원본 문서들과 한 건의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미 CIA 문서고에서 기밀 해제된 것들이다. 문서 중 하나는 전쟁 중인 1944년 4월 18일자 ‘터키에서의 일본 첩보·선전활동’에 관한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1945년 1월 30일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일본 첩보활동’에 대한 보고서다. 전자는 미 전략첩보국(OSS) 이스탄불지부가, 후자는 영국 정보원이 생산한 것이다. 세 번째 문서는 종전 이후인 1949년 11월 18일자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이 미 합참 정보국장에게 보낸 ‘전시 독일의 외교·군사 정보활동’이라는 보고서다. 그리 보면 마지막 보고서가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셈이다. 전시 일본의 재유럽 첩보활동의 본부는 베를린에 있었다. 2차 대전 직후 일본은 처음에는 ‘간첩활동의 수도’라 불리던 포르투갈 리스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태평양전쟁이 확전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위협하게 되자 마찬가지 중립국인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한다. 하지만 터키마저 연합국으로 기울자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미·영 첩보전의 기지로 활용했다. 일본 첩보활동의 동선을 미국은 매우 촘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나라의 첩보 라인이 이렇게 ‘탈탈 털리는’ 경우는 드물다. 오직 패전이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에하라의 회고에 따르면 에키타이안은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까지 자신의 베를린 사저에 기거했다고 했다. 안익태가 나치 독일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에 기재한 주소지가 바로 이 사저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 나와는 다른 시기에 또 다른 이유로 에하라 고이치를 추적한 학자가 있다. 북텍사스대학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학 교수 팀 잭슨이다. 잭슨 교수는 에하라가 하얼빈 소재 731부대의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와 연루돼 있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1938년 에하라가 독일로 건너간 뒤 731부대의 생체실험 정보를 독일과 공유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우슈비츠 등에서의 생체실험과 731부대의 그것은 에하라를 고리로 해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말이다. 잭슨 교수와 서로 자료를 공유해 온 내 쪽에서도 확인해 본 결과 에하라는 1935~1937년 하얼빈의 총무처장으로 있다가 1937년 7월 1일자로 하얼빈 부시장으로 승진한 뒤 1년 뒤 베를린 주재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파견됐다. 731부대가 일왕 히로히토의 칙령에 의해 본격적으로 하얼빈으로 확장 이전된 때가 1936년이다. 만주국의 직제는 이른바 일만정위(日滿定位) 원칙 곧 일계(日係)와 만계의 직위가 정해져 있었다. 일본의 괴뢰국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장, 시장이나 공사 등은 만계에 할당하고 그 아래에 일계를 배치했는데 실세는 당연히 일계였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총무청(처) 중심주의를 기본으로 해서 인사ㆍ재정, 특히 모든 기밀업무를 총무(청)처장이 관장했고, 그 배후에는 관동군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에하라가 하얼빈 시절 직간접적으로 731부대와 연관됐을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다. 위에서 말한 1949년 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는 “재독 일본 첩보망의 총책”이었다. 이 진술은 페터 바이라우흐 나치 독일의 SS 해외첩보부(SD) 소련·일본국장에게서 나온 것이다. 독일과 소련은 군사동맹이었지만, 1943년 8월 이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상호 첩보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에하라는 1945년 1월의 영국 첩보부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당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핀란드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등록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1949년 보고서만큼 정확한 정보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 첩보원은 그가 일본과 러시아 간 협상을 담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OSS 이스탄불지부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베를린에서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약 300명의 정보망을 운용하고 있었다. 에하라 고이치는 외교관이라는 합법적 신분으로 위장한 ‘화이트’였다. 그의 집에 주소지를 둔 에키타이 안은 추축국과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나치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음악으로 응원했다. 에키타이 안이 안익태다.

    보충-베토벤과 안익태

    올 해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 해다. 전세계적으로 온갖 행사가 준비되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그의 사거일인 3월 26일에 조차도 아무 일도 없었다. 대개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이 그가 죽기 일 년 전인 1826년 작곡된 작품번호 135 곧 현악 4 중주 제16번으로 알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 베토벤 작품번호 136 <영광의 순간>이 있다. 유튜브등에서 정명훈의 좋은 지휘로 쉽게 찾아 들을 수 있다. 이 작품은 1814년 작곡되었다. 그의 교향곡 제8번이 발표된 해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은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을까? 베토벤 자신이 거절한 탓이다. 그렇다면 왜? 이 곡은 1814년에 초연되었다. 1814년! 전유럽을 혁명 의 소용돌이로 내 몬 나폴레옹전쟁이 종결되고 메테르니히 반동체제가 자리잡는 비엔나회의, '회의는 춤춘다'로 유명한 이 반나폴레옹 전후처리회의는 그 해 9월 개최되어 다음 해 6월까 지 지리하게 이어지는 데, 그 와중인 1814년 11월 이 곡은 첫무대에 오른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등 전승4국의 의도는 자명했다. 타도된 부르봉왕조를 복고 시켜 다시는 혁명운동이 부활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다. 아울러 일체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경향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그래서 삼엄한 경찰국가체제제를 안착시키는 것이었다. 베토벤은 바로 이 비엔나체제를 찬양하는 곡을 회의기간에 무대에 올린 것이다. 한 때 프랑스혁명을 동경, 파리로 이주할 생각조차 했었고 또 '황제' 나폴레옹에 대해 극단적 혐오감을 내비친 급진 공화주의자였던 그가, 제우스라는 기성의 절대권력에 맞선 프로메테우스라는 항의와 저항의 아이돌을 형상화했던 그가 이제 보수반동체제의 나팔수로 변신한 셈이다. 그래서 황제와 합스 부르크왕가를 낯 뜨겁게 찬양하는 그리고 바로 그 '새로운 유럽'의 중심 비엔나의 희망찬 미래를 기리는 곡을 만든 것이다. 우리로 치면 전두환시절 타락한 종교인들의 '조찬기도회'를 연 상하면 이해가 쉽다. 변절도 이런 변절이 없다. 1941년 2월 1일자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69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대한민국 22년(1940년) 12월 20일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서 그의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하다.” 물론 정식 국가로 의결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안익태의 신곡조 애국가는 이렇게 임정의 사용 허가를 얻었다. 같은 해 12월 10일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임정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한다. 이 선전포고문에서 임정은 ‘축심국’ 곧 일본, 독일, 이태리등 추축국에 ‘전쟁을 선언’하고 만주국과 남경정부를 절대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그래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할 것이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임정이 대일본 선전포고를 발표했던 바로 그 시점전후, 안익태에서 에키타이안으 로 변신한 그는 베를린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집 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까지 약 2년 반을 기식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기록과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의 비밀보고서에 의하면 에하라 고이치는 일본 유럽첩보망의 독일 총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정보는 나치 제국안전본부 제6국 해외첩보부산하 극동국장의 재판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에하라 고이치의 사저에 있으면서 에키타이안은 1942년 독일음악계의 거두 리하르트 슈트라 우스의 <황기 2600년 기념 축전곡>을 지휘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18일 중국에서 9.18사변이 라 불리는 즉 만주사변일에 맞추어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축전곡>을 작곡해서 지휘했다. 나치 선전성이 제작한 이 날의 실황 영상은 마지막 4악장이 독일연방기록원에 남아있는데, 그 중 마지막 40초가량이 편집되어 나치의 전쟁뉴스를 통해 전세계에 방송되었다. 에키타이안은 1943년 2월 11일 일본 건국기념일에 비엔나에서 만주국을 다시 지휘했다. 이 때 그는 자신의 <만주국>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같이 올리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하지만 5.16이후인 1962년 자신이 주도한 제1회 국제음악제때 꿈을 이루었다. 물론 <만주국>이 아니 라 <한국환상곡>과 <합창>을 묶어서 말이다. 베토벤은 메테르니히 반동체제를 위해 자신의 공화주의 신념을 훼절했지만 그 작품은 버렸다. 에키타이안은 변절의 도구였던 그 작품을 울궈먹고 또 울궈 먹었다. 그러는 사이 좌건 우건 우리 모두가 비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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